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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를 위한 불교산책55-삶과 깨달음

기자명 박경준
  • 수행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깨달음 위한 삶' 아닌 '삶을 위한 깨달음'을 얻자

불교는 믿음보다는 개개인의 주체적 깨달음을 더 중시한다. 불교에서 믿음은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점이며,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요 과정이다. 믿음을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는 깨달음이다. 그래서우리는 불교를 서슴없이 깨달음의 종교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좀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교의 최종 목표는 깨달음'이라는 명제가 과연 참인가? 만약 이것을 `우리가깨닫기만 하면 인간의 할 바를 다한 것이다' 또는 `깨달음은 삶의 완성이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든가, 더 나아가 `따라서 깨달은 사람은 죽어도 좋다'는 의미로까지 확대 해석한다면 이 명제는 분명 거짓이다.하지만 이 명제를 `깨달음 그 자체는 궁극적 목표가 아니며, 깨달음을통해서 진정으로 뜻있고 자유롭고 참다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의 최종 목표는 깨달음이다'는 명제는 문장상으로 볼 때 분명히 오해의 소지가있다. 따라서 이러한 진술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단적으로 말해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깨달음의 완성'에 있는것이 아니라 `삶의 완성'에 있다. 말하자면 `깨달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한 깨달음'을 불교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교인들이 깨닫기만 하면 사람으로서 할바를 다해 마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아마도 깨달음에 대한 신비주의적 또는 관념론적 이해 때문에 야기되는 현상이라추측된다. 물론 깨달음은 상식과 논리로써 파악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들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깨달음은 상당한 신비로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당사자가 볼 때는 깨달음은 신비가 아니라 당연하고도 평범한 세계일 수도 있다. 요컨대 깨달음의 세계에는신비적 측면이 없지 않겠지만, 신비가 깨달음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는 연기(緣起)의 진리였고, 연기법의요지는 `인생의 괴로움(老死憂悲苦惱)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므로, 그조건을 알아 제거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것이다. 깨달음은 우리들 삶의 괴로움, 아니 `생활세계' 그 자체와 맞물려있는 매우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대각(大覺)을 이루시고 곧바로 열반에 들지도 않았고, 무위도식으로 여생을 보내지도 않으셨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통해참으로 보람있고 가치있는 삶의 길을 발견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중생과 함께 하는 삶 속에 있음을 아셨다. 그리하여중생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중생의 미혹을 깨뜨려 주시기 위해 중생 속으로 뛰어드셨던 것이다.
깨달음은 결코 삶의 완성이 아니다. 깨달음은 참다운 삶의 시작인것이다.


박경준/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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