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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불교교리 - 불교의 지혜 3 : 내면의 윤리

기자명 법보신문

‘무애행’과 ‘막행막식’은 ‘似而不同’

일편단심 이데올로기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한번만 마음 주면 변치 않는 여자가 정말 여자지.” 누구나 흥얼거리는 유행가 가사에 있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건 어찌되었든 간에 여자는 님을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가 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여기에 담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마음 잘 변하기는 남자도 매일반인데….

무언가 초지일관의 꽉 찬 분위기가 있어야 안정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정리해고문제를 두고 나온 재판결과에서 우리시대의 마지막 양심이시며, 마지막 파수꾼이라고 할 수 있는 법관마저 헷갈리고 있다는 보도를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얘기인즉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는데, 엄격하게 할 것인지 느슨하게 할 것인지가 법관마저 왔다리갔다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시면 안되죠. 근로기준법에서 정리해고의 조건으로 인정한 것은 4개인데, 그 중에 일부만 해당하면 정리해고요건으로 볼 것인지, 전부가 다 있어야 요건이 된다고 볼 것인지, 술 취한 사람 마냥, 갈지자걸음을 하고 있답니다.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심순애가 돈에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택하자니 돈이 너무도 아쉬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애매모호한 법조항

정리해고 4개 조건 중에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인정되면, 나머지 조항은 조금 무시되더라도 크게 보아 문제없다는 관대한 입장도 있고, 4개 조건 모두를 다 충족시켜야 한다는 엄격한 견해도 있답니다. 이렇게 다른 판결이 나온 것은 ‘전체적이고 종합적 고려’라는 애매모호한 말이 뒤에 턱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무언가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신문에서는 끝을 맺고 있더군요.

저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무어라 말을 할 건더기가 없습니다. 그 어려운 법을 어떻게 해석해서 적용할 것인지, 그거 하라고 머리 싸매고 몇 년을 고시공부에만 전념하고, 게다가 뛰어난 인재들만 추려서 법관에 임명했으니 그들의 몫입니다. 하지만, 이는 관점의 문제이고 철학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기에, 철학전공자들이 몇 마디 거든다고 해서 큰 일이야 나겠습니까? 저는 이 문제에도 원효의 계율해석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원효는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호방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걸 무애행(無碍行)이라고 한다는데, 잘못 쓰면 ‘막행막식’의 천박한 행실로 이어질 위험도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해방 후 한국에서는 수많은 원효의 후학들이 나와서 “원효를 봐라. 나도 내 맘대로 살련다. 나의 길을 가련다”고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나무소주불’을 외치면서 의로운 도(道)의 길을 걷고 있는 양 행세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내면 동기를 중시해야

원효가 계율을 무시하는 듯한 행위를 하게 된 것은 위선이 싫어서 입니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하게 착한 말을 하고, 진리의 말씀을 잘잘 토해내지만, 그 안은 욕심과 번뇌로 곪아터져 있는 삶을 경계하고자 한 것입니다. 중요한 건 외부의 행동이 아니고, 마음의 청정함에 달려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계율적으로 문제가 되는 듯한 행동도, 안으로 청정한 마음, 중생을 보살피려는 마음에서 터 잡은 것이라면 결코 계율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계율을 잘 지킵네 하면서, 남보다 내가 뛰어남을 과시해서 사람들의 존경이나 공양을 받는데 골몰한다면, 이게 계율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원효는 일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효의 관점을 판결이 엇갈린 법관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근로기준법에서 말한 4개의 조건을 엄격히 다 채워야 정리해고사유가 된다는 입장은 언뜻 보아서 노동자의 입장에 선 것 같이 보이지만, 속에서는 노동자의 권익을 진정으로 생각해서 결정한 게 아닐 수 있고, 정리해고의 조건을 관대하게 해석한 견해는 경영자의 편을 든 것 같지만, 내면에서는 노동자의 입장을 더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4개 조항을 엄격하게 해석할 것인가, 관대하게 적용할 것인가는 법관의 양식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그 해석하는 정신은 아무도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겠다는 정의감의 발로이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게 원효의 관점입니다. 행위의 외면보다는 내면의 동기를 중시하는 게 원효의 입장이자, 불교의 정신입니다.



이병욱 (고려대 강사)



<2001.07.11 / 6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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