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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5주기 특별기획

기자명 심정섭

“민족은 창공처럼 영원하고 사상은 한 철 활엽수일 뿐”

“남편 윤이상 선생은 남보다 앞선 사고와 행동실천으로 한 생을 살다 간 사람입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변화를 그는 40년 전부터 갈망해 왔습니다.”

‘현대음악의 도인’으로 불리는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여사. 이 여사는 “선생은 남북통일에 대한 열정과 조국애를 온 몸으로 표현한 민족운동가 였다”며 “때문에 동백림 사건으로 인해 실추된 남편의 명예회복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여사는 또 요즘 국내에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인사들의 명예회복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반한인사로 낙인찍힌 남편의 명예는 언제 돌려줄 수 있는지 묻고 싶다”며 “선생은 살아서 민족을 생각하고 문화유산을 남겨놓고 간 사람”이라고 남편을 회상했다. 또 “선생의 고향에서는 길에 그분의 이름을 붙이고, 국제현대음악 페스티발을 계획하고 기념관을 세우려 하는 것으로 안다”면서 “정부가 그 일을 후원한다고 해서 명예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선생은 ‘역사적인 긴 안목에서 볼 때 민족은 창공과 같이 영원한 것이고 정권·이념·사상은 활엽수와 같다’고 했었다”고 말한 이 여사는 “우리의 자손이 이어갈 우리의 강토와 조국을 한 시대의 정권이 대표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정치적 이념과 사상이 실추시킨 윤이상의 명예회복을 다시한번 강조했다. 또 “선생의 고향은 그에게 소년시절의 꿈을 키워주고 눈물을 받아주고 무한한 예술을 불어 넣어준 우주의 어머니였다”며 “그런 그가 어찌 어머니 품속에서 잠들고 싶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수자 여사는 또 “조상의 뼈가 묻혀있고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르는 연로한 형제가 살아 있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라고 귀국을 희망하면서도 “저의 귀국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동백림 사건의 주범으로 몰리고 국제적 여론에 밀려 특사로 풀려났던 남편이 그일 자체를 지극히 불명예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명예회복이 선결돼야 할 것”이라고 윤이상 명예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내 남편 윤이상은?

“남편의 음악세계는 조국의 분단으로 인한 불행과 오랜 군사정권에서의 횡포로 인해 희행된 사람의 내적 갈등이 예술로서 표현되어 나왔기 때문에 시대성과 예술성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수자 여사가 말하는 남편 윤이상의 음악세계이다. 이 여사는 “윤이상 선생은 생전에 ‘작곡가는 비단 예술가 뿐아니라 세계 속의 한 인간이기에 나는 세계를 무관심하게 볼 수 없다. 고통이 있고 부당함이 있는 곳에 나는 나의 음악을 통하여 더불어 얘기하고자 한다. 나의 음악은 경쾌하지 않고 차라리 정의를 향한 절규 그리고 아름다움에의 호소에 더 가깝다. 거기에는 억압된 자들을 위한 위로와 외침이 있다. 나는 음악가이기 전에 양심과 정의감을 굳게 지키는 인간이고 싶다. 나는 이제 더 근본적인 것에 나 자신을 국한시키고 있는데 이는 더 많은 평화와 아름다움 그리고 순수와 온정을 세계에 지어나르기 위함’이라고 자신의 음악을 설명했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남편은 동양과 서양의 중간 현실사회에서 살아간 작곡가로서 힘차고 강한 표현력과 긴장감을 가진 작곡어법을 발견해 발전시키고 확립시키며 세계음악사에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이라고 윤이상을 평가했다. 또 서울에서 남북합동으로 윤이상음악회를 개최 하는 문제에 대해 “남북합동음악회는많은 인친이 동원되기 때문에 시일이 걸린다”며 “금년은 5주기를 맞는 음악회가 긴박하여 불가능하고 내년에는 적절한 기회에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남한 불교계에 바란다

“저의 꿈은 한국의 산사를 순방하며 더 깊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수자 여사는 한국 사찰을 참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희망했다. 그동안 방북 인사들을 통해 신심 돈독한 불자로 알려진 이 여사는 “북에 있을 때는 스님을 모시고 인연 닿는 절에가서 예불을 올린다”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소개했다.

이 여사는 “어린시절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간 것 외에는 불교와 특별한 인연이 없었으나, 10여년전 일본에서 백제의 조각가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을 보고 감화돼 불교에 입문했다”고 말하는 늦깍이 불자다. 그러나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진리와 우주만상에 불성이 없는 것이 없으며 부처님 가르침과 동시에 자신이 깨닫고 쌓아 올리는 것이 불교”라고 말할 만큼 불심 깊은 보살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제가 불경을 외우면 남편은 옆에서 목탁을 두들기며 반주를 해 주었다”고 옛 기억을 더듬은 이 여사는 “북한의 절 대웅전에서 부처님 앞에 앉아 있으면 그 거룩하신 자비에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남편 윤이상의 신앙은 그의 작품속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말한 이 여사는 “남북 왕래가 이루어지면 남한 스님들이 북한 불교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당부할 만큼 북한불교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여사는 또 “불국사 전 주지 월산스님이 북한 강원도 안변의 석왕사에 주석하신 것으로 안다”며 “불국사가 터만 남아 있는 석왕사 복원에 협력해 주길 바란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이수자 여사는 누구


윤이상 사상-음악 함께한 평생 도반

고 윤이상 씨의 부인 이수자(李水子) 여사는 1927년 부산에서 출생해 경남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를 수료했다. 이화여대 수료후 부산 南여자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교직에 봉직하던 이 여사는 1950년 윤이상과 결혼한 후 61년 독일로 이주했다.

67년 남편이 동백림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백방으로 구명운동을 펼치기도 했으며 69년 석방된 남편의 음악세계를 이해하고 내조한 현모양처 였다. 지난 98년 자신이 지켜 본 윤이상의 음악관과 인생관 또 그의 철학이 담긴 민족관을 엮은 《내 남편 윤이상》을 출간해 일반인들에게 윤이상을 바로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현재는 독일과 평양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으며 북한 불교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여사는 최근 북한 윤이상음악연구소·한계레통일문화재단과 함께 서울에서 합동 통일음악제를 개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본 이수자 여사

“북한 불교 발전에 기여한 참 불자”

“이수자 여사는 북한불교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 보살 그 자체입니다.”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 대표 법타 스님은 이수자 여사를 “꺼져가는 북한불교의 불씨를 살린 보살”이라고 평가했다. 법타 스님은 “이 여사는 윤 선생처럼 애국 애족의 뜻이 큰 분이고 남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내조자”라고 말했다. 또 “동백림 사건으로 인해 명예가 실추된 윤 선생의 한이 남아 있는 것처럼 이 여사 역시 정치적으로 상처가 큰 분”이라고 이수자 여사의 한서린 마음을 전했다.

스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실한 신심을 바탕으로 남북화해와 평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이라며 “한 마디로 북한불교의 총 신도회장”이라고 이수자 여사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스님은 11월 초 방북, 윤이상 타계 5주기 추모제에서 평불협 및 윤이상명예회복추진위원회 명의의 추도사를 낭독하고 음악제에 참석해 이수자 여사를 만날 예정이다.


평불협 회장 법타 스님




고 윤이상 부인 이수자 여사 단독 인터뷰 전문




법보신문은 세계적인 작곡가 고 윤이상 씨 5주기를 맞아 부인 이수자 여사와의 서면 인터뷰를 추진했다. 이수자 여사는 본지 이학종 부장 편집부장 앞으로 10월 20일 평양발 팩스를 통해 윤이상의 음악세계와 민족관 그리고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표현한 장문의 친필 서한을 보내왔다. 서신의 전문을 수정없이 게재한다.

법보신문 편집국 부장 이학종 부장 선생님!
편지 감사합니다. 저는 법보신문의 권위를 독일에서 몇번 구독하여 읽고 알고 있습니다. 법보신문이 보내주신 설문을 읽고 아픈 가슴이 다시 져려옴을 느낍니다.

남편의 음악세계는 우리나라의 분단으로 인한 불행과 오랜 군사정권에서의 횡포로 인한 희생된 사람의 내적 갈등이 예술로서 표현되어 나왔기 때문에 시대성과 예술성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윤이상 선생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 잠간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윤이상 선생은 남보다 앞선 사고와 행동실천에서 살다간 사람입니다. 오늘날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그는 40년 전부터 갈망하였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예술가 였습니다. 그의 책상 앞에는 고구려의 벽화의 사신도가 붙여져 있었습니다. 그 사신도는 시대와 사조에 관계없이 우리민족이 가지고 있는 예술의 흐름은 7세기초의 고구려 벽화와 20세기 중엽부터의 급진적인 현대음악을 쓰는 윤이상 선생의 예술은 같은 맥락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동서남북을 지키는 4신. 청룡 현무 백호 주작의 동물은 그 유창한 화필의 선의 흐름에 있었스나 환상적인 구상에 있었스나 약동하는 구도와 색채에 있었스나 시대를 초월한 예술 작품입니다.

그는 이 사신도를 직접보기 위한 이유와 입북한 죽마고우의 소식과 분단된 조국인 북의 현실을 보기 위하여 63년에 방북하였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67년에 조작된 국제간첩단의 두목으로 만들어 세웠으나 국제적인 여론에서 10년의 형에 특사로 풀려나와 베르린에서 40년이나 긴 세월을 망명자로 생을 마친 분입니다.

사건당시 베르린은 동서가 분단되어 있었스나 한도시 속에서 버스나 전차도 왕래하였으며 법적 단속없이 서로 어울려 살았습니다. 그런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쉽게 이루어진 북의 방문이 안기부 취조실에서 가한 고문은 그를 자살로 몰고가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분입니다. 그후 형무소에서 쓴 사신도에 관한 작품 ‘연상’은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로서 4중주는 명곡으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1969년에 베르린으로 돌아온 그는 그가 겪은 폭발된 분노를 작품세계에 표현됐으며 그 뒤 그 감정을 음악세계에서 승화에로 지향하여 또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기까지 근 10년이 소요됐습니다. 70년 후반기부터 그의 예술세계는 종교적으로 흐르기 시작하여 기독교 도교 불교 샤머니즘에까지 미친 광범위한 세계속에서 작품을 썼습니다. 그러니 근본적인 그의 작품세계는 우리나라의 생활문화와 미학 동양철학에서 오는 도교와 불교철학에 근거했으며 인류세계는 아무리 선을 향하고 노력해도 천상에 까지 미치지 못함을 알고 끊임없이 천상에 도달하기 위한 내부세계의 승화였습니다.

 그는 세계 평화와 인류의 평화를 지향하며 조국의 평화통일의 염원과 실천을 한시도 머물은 적이 없는 일관된 삶이였습니다. 이러한 정신세계가 전부 작품에 반영됐으며 그의 작품은 눈물없이는 듣지 못한다는 평을 독일 평론가들에게서 듣곤 합니다.

그가 생전에 남긴 말속에

“작곡가는 비단 예술가 뿐아니라 세계 속의 한 인간이다. 나는 결코 그 세계를 무관심하게 볼 수 없다. 세상에는 인간적인 고통 억압 고난과 부당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생각속에 들어온다. 고통이 있고 부당함이 있는 곳에 나는 나의 음악을 통하여 더불어 얘기하고자 한다. 나의 음악언어는 경쾌하지도 않다. 그것은 차라리 정의를 향한 절규에 아름다움에의 호소에 더 가깝다. 거기에는 억압된자들을 위한 위로와 외침이 있다. 나는 음악가이기 전에 양심과 정의감을 굳게 지키는 인간이고 싶다. 나는 이제 더 근본적인 것에 나 자신을 국한시키고 있는데 이는 더 많은 평화와 많은 아름다움, 더 많은 순수와 온정을 세계에 지어나르기 위함이다.”

이러한 정신세계에서 작품을 썼으니 현대음악의 도인으로 부르기도 했겠습니다.

또한 윤이상 선생이 세계음악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보석같은 작품을 많이 쓴 것외에 그의 작품 기법에 있어서 그가 특수한 독자적인 길을 발견하고 개척한 데 더 중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서양의 음악은 직선이고 그 직선은 그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대위법과 화성법을 거쳐 음악이 형성되나, 동양의 음은 휘어져 있고 마치 붓글씨와 같은 곡선적인 음은 그 지체가 많은 성격을 안고 그것이 하나의 소 우주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도교의 뜻이며 휘어져 울리는 음양의 흐름을 기법으로 발견하고 확립시킨 이론이 ‘주요음’의 작곡법이라고 합니다.

즉 동양의 철학에서 온 음악관과 서양의 음악관에서 생겨난 것. 그것들은 그 중간 현실 사회에서 살고 있는 작곡가로 통하여 접근시키고 거기서 힘차고 강한 표현력과 긴장감을 가진 작곡어법을 발견 발전시키고 확립시켰기에 세계음악사에 큰 공로를 세운사람입니다.

남북교류로 인한 음악회는 많은 인친이 동원되기 때문에 합의와 수속 등으로 인하여 시일이 많이 요합니다. 금년은 시간이 너무 긴박하여 성사시키기에는 불가능합니다. 내년에는 어떤 적절한 기회에 추진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요새 국내에서 민주화운동에 희생됐던 사람은 이젠 잃었던 명예를 정부에서 돌려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반한인사의 낙인이 찍힌 남편의 명예는 언제 돌려줄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분은 살아서 오직 민족을 위해서 좋은 일만하고 또 민족의 문화유산을 남겨 놓고 간 사람입니다. 그의 고향에서는 중요한 중요한 길에 그분의 이름을 붙인다고 하고 또 그분의 이름하에 국제현대음악 페스티발을 계획하고 기념관을 세울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또 그의 오페라 ‘심청전’을 작년에 이어 두 번째의 공연도 하고요. 남편의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정부에서 윤 선생의 음악회도 후원하고 있으니 반한인사라는 정치적인 규제는 벗은셈이 되니 들어오십시오” 합니다. 그러나 그 견해는 옳지 않다고 봅니다. 지금 그의 작품은 생명력을 가지고 소리 높이 웨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살아 있는 한 그의 명예도 같이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의 예술은 세계음악사에 우뚝솟아 있으며 민족관과 그의 예술은 민족사에 남을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남북을 합하여 세 종류의 통일상이 있습니다. 북에 있는 민족통일상, 늦봄 통일상, 한겨레통일문화상. 이 셋의 통일상을 전부 그가 일차로 받아 표창되었습니다. 민족통일상은 살아 생전에, 둘은 세상을 떠난 뒤 입니다.

이젠 국가체면을 봐서도 그분의 명예를 돌려주고 죽은 영혼이라도 뜻뜻이 고향에 돌아가도록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동백림 사건과 연관지어 그 명예가 회복되기에는 곤란하다고 합니다. 그때 10년 형의 죄명은 ‘국가 탈출죄. 잠입죄’ 입니다. 베르린에 살고 있던 사람이 언제 국가를 탈출했으며 잠입한 것입니까. 또 그 사건은 대통령 특사로서 끝난 사건입니다. 남편은 그 특사를 지극히 불명예스럽게 생각했습니다.

1990년 범민족통일음악제를 주관할 때 중병을 앓고 있을때(북에서) 베르린에서 인사들이 모여 의장으로 추대해서 의장이 됐습니다. 그 뒤에 붙여진 이름이 '반한인사'입니다.

윤이상 선생은 “역사적인 긴 안목에서 볼 때 민족은 창공과 같이 영원한 것이고 정권 이념 사상은 활엽수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한 시대의 정치로 인하여 어찌 조국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조상이 살다 묻히고 또 우리의 자손이 영원히 이어갈 우리의 강토 우리의 조국을 한 시대의 정권이 조국을 영원히 대표할 수 있겠습니까. 정권과 조국은 엄연히 구별되야지요.

윤이상 선생은 그가 살아서 그렇게도 돌아가고 싶어했던 고향, 그에게는 고향이 그렇게도 값지고 꿈같이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 고향은 소년시절의 꿈을 키워주고 눈물을 받아주고 무한한 예술을 불어 넣어준 우주의 어머니였습니다. 그 고향을 우리의 조국을 생명으로 지키며 살 조국이지요. 그 어머니 품속에서 잠들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저의 조상의 뼈가 묻혀있고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르는 연로한 형제가 살아 있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귀국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광대무변하신 진리와 우주만상에는 불성이 없는 것이 없으며 부처님 가르침과 동시에 자신이 깨닫고 쌓아 올리는 종교, 보살행의 수양 등등 많은 진리가 저를 감동시킵니다. 저는 어린시절 어머니를 딸아 절에 가곤 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기독교하고 가까워질 기회도 많았습니다. 대학에서도(밋숀계) 믿을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기독교신앙이 저를 끌지 못했습니다.

10여년전 일본 나라에 있는 ‘아끼시노노 대학’에 예술의천상을 봤습니다. 그 아름다운 여신상은 분명 일본사람의 얼굴이 아닌 우리민족의 얼굴 이였습니다. 백제의 조각가가 건너가서 만든 불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예술의 천상님의 가피력으로 자동차 사고에서 다친데 없이 살아남은 남편으로 인하여 저는 그때부터 독실한 불교신자가 됐습니다. 남편도 제가 믿으니 같이 믿었습니다. 제가 불경을 외우면 옆에서 목탁을 두들기며 반주를 해 주었습니다. 제가 북의 절 대웅전에 부처님 불상 앞에 앉으면 그 거룩하신 자비에 눈물이 나지요 남편의 신앙은 자신의 작품속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신앙심은 자기 마음에서 울어나며 인연이 있어 믿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꿈은 한국의 산사를 순방하며 더 깊은 신앙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북에 있을 때는 스님을 모시고 인연 닿는 절에가서 예불을 올립니다. 남북의 왕래가 이루어지면 많은 스님들께서 역사적인 문화유적으로서 잘 가꾸고 보존하고 있는 북의 절에서 불교가 발을 펼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북에는 절도 많고 스님도 계십니다. 국법으로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옛날부터 명당자리에 대찰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법보신문이 경주 불국사에서 후원하여 주신다고 하니 생각이 납니다. 1999년 10월에 강원도 안변에 있는 석왕사에 다녀 왔습니다. 이절은 옛날에 이성계가 왕이 되는 꿈을 꾼 뒤 왕좌에 오르고 나서 지은 절입니다. 조국전쟁때 50동이나 있은 절이 대계 타서 없어지고 그 뒤 홍수가 져서 가람이 산사태가 나서 떠내려가고 건물이 세개 남아 있습니다.

이젠 입적하고 안계신다는 불국사 주지스님이셨던 월산스님이 석왕사 출신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석왕사의 환경은 아름답기 말할 수가 없고 절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600년이 더된 느티나무가 14그루 있는데 아래 둘레가 9.30M이나 되는 나무들입니다.

또 600년의 연수를 가진 적송이 빽빽이 있는 곳이며 북에서도 국민들의 휴양지로서 이름이 높습니다. 이 아름답고 또 역사에 일화까지 남아 있는 이 절터에 옛과 같이 다시 재건된다면 하고 소원으로 빌기도 했습니다. 국가에서 생각은 있으나 힘이 자라지 않아 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불국사에서 여기 석왕사를 다시 세우는데 협력하여 주십사고 부탁바랍니다.


이학종 부장 선생님 설문에 맞지 않는 글도 있습니다. 읽어 보시고 교정봐 주시고 저의 뜻이 반영될 수 있게 기사화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판한 ‘내 남편 윤이상’을 여러 불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알려 주십시오.


2000년 10월 20일 평양서 이수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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