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분노가 날때 자비심을 내면
〈26]분노가 날때 자비심을 내면
  • 이미령
  • 승인 2004.08.10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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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벗고 청정해지리라
여하튼 우리는 버럭 화를 내고 봅니다. 화를 내는 동안 내 마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과 악의만이 가득 차 오릅니다.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켰고 내 것을 빼앗았다고 하여 증오를 품고 있으면 증오는 없어지지 않는다.”(『법구경』) 그러한 증오와 적대감은 나의 입을 지배하여 못하는 말이 없게 만들고, 나의 눈을 지배하여 부모와 자식들도 보이지 않게 하여 급기야 그들의 목숨까지도 빼앗게 만듭니다.

분노가 무서운 이유는 이렇게 다른 이를 향해 독한 마음을 품게 만든다는 데에 있습니다.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경전 곳곳에서 일러주십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자심관(慈心觀)으로 다스려야 한다.”(『정법념처경』)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라. 그러나 원한의 마음은 불과 같으니 서둘러 없애야 한다.”(『보살본연경』) “그리하면 분노라는 번뇌가 풀어지고 능히 자심(慈心)을 닦아서 번뇌의 때를 여의고 청정해질 수 있다.”(『달마다라선경』) “성내는 마음을 버려라. 자비가 능히 그것을 다스린다.”(『정법념처경』)

자(慈)는 maitr 즉 우정(friendship)이라는 뜻입니다. 비(悲)는 karu 즉 슬픔인데 남의 괴로움을 나의 괴로움인양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 두 글자의 풀이를 곰곰 생각해보면 그 동안 별다른 생각 없이 써왔던 대자대비라는 말이 새록새록 깊은 감동을 안겨줍니다.

우정을 뜻한다는 ‘자’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따뜻한 마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상하관계도 없습니다. 사회에 나와서 손익을 따지며 사귄 사람과는 우정이란 말을 쉽게 쓰지 않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고동락하며 상대방을 나의 또다른 분신인양 여기며 지내온 관계에게만 우정이란 말은 적용됩니다.

이런 친구라면 상대방이 슬픈 일을 당하였을 때 불쌍하고 안쓰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슬퍼할 것입니다. 내 일처럼 함께 울고 함께 슬퍼하며 함께 비통함에 젖어들 것입니다. 이것이 ‘비’입니다. 그토록 거룩하고 존귀하여 감히 얼굴도 쳐다볼 수 없었던 불보살님들.

이 분들이 이 어리석은 중생인 나를 바라본 눈길에는 바로 이런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한 푼 던져주고 어서 문 밖으로 내보내야 할 불쌍한 인생이 아니라 버선발로 달려나와 두 손을 따뜻하게 감싸쥐고 반기는 당신의 진정한 벗으로 나를 대하셨던 것입니다. 초라하고 남루한 나를 당신의 고대광실로 데리고 들어가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그런 분이 바로 불보살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좥보문품좦에서는 “혹 성내는 마음이 크게 일어나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그 마음을 여일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능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부드러운 음성은 더러움을 여이었으므로 눈, 귀, 코, 혀, 몸, 의지와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 두루 원만하여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분노와 원한이 많은 중생에게서 온갖 분노를 버리게 해줄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친구(慈)는 바로 관세음보살님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노로 인하여 초췌해진 나의 형색에 목놓아 울어줄(悲) 이런 친구가 곁에 있는데도 전혀 생각해내지 못한 채 분노의 불길에 내 몸을 까맣게 태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또다시 내 마음은 원망과 억울함이 마구 뒤섞여 끝을 알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으려 합니다. 나는 이제 염주를 꺼내들고 108배를 올리며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나무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

lmrcitt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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