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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⑦ (3) ‘중대불교’의 사회적 배경 - 중

나당전쟁 승리 후 귀족세력 숙청하고 역대 가장 강력한 왕권 구축

삼국통일 뒤 지배세력 크게 축소되고 백성은 3배로 대폭 증가
나당전쟁 중 당의 분열책에 의해 적지 않은 귀족들 친당 행보
신문왕, 과감한 귀족세력 숙청… 아들 성덕왕대 최전성기 구가

파른본 삼국유사 권2, 만파식적 첫번째장.연세대학교도서관 소장
파른본 삼국유사 권2, 만파식적 첫번째장. 연세대학교도서관 소장

신라는 3국을 통일하여 원래의 신라에 견주어 대략 3배에 달할 정도의 막대한 영토와 인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3국항쟁과 나당전쟁을 겪으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많은 인명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부흥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군비만이 아니고 당의 군사의 군량미까지도 신라가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 지출이 막대하였다. 그런데 멸망당한 백제・고구려 측의 피해는 더욱 참혹하였다. 화려한 궁전과 역대 보물 전적이 적병에 의해 잿더미가 됨으로써 두 나라의 역사는 거의 인멸되고 말았다. 특히 백제・고구려가 멸망할 때에 많은 수의 인원이 당에 포로로 잡혀가는 손실을 입었다. 660년 백제 멸망 당시의 국세는 5부(部) 37군(郡) 200성(城) 76만호(戶)였는데, 당에 포로로 잡혀간 인원수는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융(隆)・연(演) 및 대신・장사 88인과 백성 1만2807인에 달하였다. 그리고 668년 고구려 멸망 당시의 국세는 5부(部) 176성(城) 69만7천호(戶)였는데, 보장왕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남생(男生)・남건(男建)・남산(男産) 등 연씨(淵氏)형제, 기타 다수의 대신들이 당의 포로로서 끌려갔으며, 다음해에 3만8300호(戶)를 데려가 강남・회남・산남・경서 여러 주의 인구 희소한 지방에 분산시켰다.

그런데 본고에서 굳이 포로의 숫자를 밝히는 것은 백제와 고구려의 왕실・귀족이 대부분 제거되어 3국통일 뒤의 지배세력인 귀족의 숫자가 3국의 귀족을 합한 것에 견주어 크게 축소되었고, 반면에 3배로 증대된 백성들에 대한 국왕의 지배기반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신라에서는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해(669) 5천여 호(戶)를 거느리고 귀부해온 고구려 왕족(보장왕의 서자)인 안승(安勝)을 우대하여 고구려왕(뒤에 보덕왕)으로 책봉하여 왕족 신분인 진골에 편입시킨 사실 이외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귀족 관료에게 모두 6두품 이하의 중하급 골품에 배정하였다. 즉 백제인에게는 10등 대나마 이하의 관등, 고구려인에게는 7등 일길찬의 관등을 배정함으로서 백제인에게는 5두품 이하, 고구려인에게는 6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편입하고, 왕족인 진골 신분을 부여하지 않았다. 3국통일 뒤의 왕권 강화는 이러한 진골 귀족세력의 비중 축소와 그 이하 신분층의 확대를 통한 지배기반의 하향 확대라는 사회적 변화를 배경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편 신라는 3국항쟁과 나당전쟁 과정에서 많은 인적 희생과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당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7년의 나당전쟁과정에서 신라는 커다란 희생을 치렀다. 먼저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당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정책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백제 왕자인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앞서 계림대도독으로 임명하였던 문무왕과의 회맹을 강요함으로서 신라와 구백제 세력을 대립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까지 멸망시킨 뒤에는 백제 고지를 실력으로 점유하려는 문무왕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우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교체하는 책략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지배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정책은 일찍이 김유신・삼광 부자를 회유하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다. 나당전쟁 중에는 당의 회유정책으로 신라의 지배세력 가운데 적지 않은 수의 친당적인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친당인물로는 수세(藪世)・대토(大吐)・김진주(金眞珠) 등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수세는 문무왕 원년(661) 남천주총관이 되었다가 동왕 8년(668)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의 군대를 따라 이른바 ‘입공군장(立功軍將)’으로서 당에 갔었다. 문무왕 10년(670)에 한성주총관으로 재직하면서 신라를 배반하려는 모의를 하다가 주살되었다. 그런데 수세의 처형을 담당하였던 대아찬 진주도 그 뒤 문무왕 15년(675) 친당인물로서 복주되었고, 그의 아들 풍훈(風訓)도 당 설인귀의 신라 침공 길안내를 맡았다가 패주하였다. 그 밖에 대토는 아찬 관등을 가지고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다가 사실이 드러나 복주되고 그 처자는 노비로 편입되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전하는 사례는 이상 3인에 불과하지만 실제는 훨씬 많았을 것이고, 이들 가운데 진골 신분이 많았음이 주목된다.

이로써 삼국통일 전쟁 중에 신라의 지배세력 가운데서 친당적인 인물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귀족들이 제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무왕대는 나당전쟁이 아직 종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화합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문무왕 8년(668) 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포로 7천인을 이끌고 귀경하는 길에 한성에서 김유신 이하 장수들에 대한 대규모의 논공행상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다음해(669)에는 교서를 내려 오역(五逆)과 사죄 이하의 모든 죄인을 석방하고, 채무자의 원리금을 탕감케 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어 문무왕 21년(681)에는 유조(遺詔)를 남기어, ‘죽은 자와 산 사람 모두에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여 삼국통일의 달성과 화합의 정치를 자부하였다.

그런데 문무왕의 뒤를 이은 31대 신문왕(681~692)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과감한 귀족세력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오늘날의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이때의 강력한 왕권을 ‘전제왕권(專制王權)’이라고 하였다. 전제왕권이라는 개념은 타당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이지만, 중대의 왕권이 신라사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는 해석에는 이의가 없다. 신문왕은 즉위하던 그 해에 왕비의 아버지 김흠돌(金欽突)을 비롯하여 그 일당인 파진찬 흥원(興元)・대아찬 진공(眞功) 등이 반란을 꾀하였다고 하여 많은 연루자를 샅샅이 찾아 죽이었다. 그리고 이 반란사건을 사전에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병부령 군관(軍官)과 친아들을 자살케 하였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관등과 관직으로 보아 모두 최고의 신분인 진골귀족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군관은 문무왕대 남천주총관・한산주도독・한성주행군총관을 역임하면서 나당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20년(680)에는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올랐고, 다음해 죽임을 당할 당시의 관직이 병부령임을 보아 최고 권력자의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문왕의 전격적인 숙청 작업은 실로 대담한 것이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왕권의 강화는 결정적인 단계에 도달하였다. 김흠돌의 모반사건은 중대 최대의 정치적 사건 중의 하나로 통일전쟁과정에서 세력을 키워온 일부 귀족세력을 억압하려고 한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왕권강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신문왕 3년(683)에는 김흠돌의 딸 대신에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새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김흠운은 나물왕의 8대손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로서 무열왕 2년(655)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인물이었다. ‘삼국사기’ 권8 신문왕3년조에는 이 결혼의 예식절차에 대해 예외적으로 자세한 기록을 남겨 주었는데, 그만큼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행사였기 때문이다. “(2월에) 먼저 이찬 문영(文潁)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하게 하였는데, 예물로 보낸 비단이 15수레, 쌀・술・기름・꿀・간장・된장・포・젓갈이 135수레, 조(租)가 150수레였다. 그리고 5월7일에 이찬 문영과 개원(愷元)을 그 집에 보내 책봉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大常)・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양부(梁部)・사량부(沙梁部)의 여자 각 30명과 함께 부인을 맞아오게 하였다. 부인이 탄 수레 좌우에 시종하는 관원들과 부녀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왕궁의 북문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갔다.” 성대한 혼례를 통하여 왕권의 위상을 유감없이 과시한 정치적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유신의 장자 삼광과 문무왕의 동생 개원 등 권력의 최고 실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음이 주목된다. 그리고 양부와 사량부의 여인 각 30명이 동원된 것을 보아 2부가 ‘중고’ 이래 여전히 왕경 지배세력의 두 축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신문왕은 외척 김흠돌의 모반사건과 또 다른 외척 김음운의 딸과의 혼인을 계기로 하여 왕권의 위상을 드높이고, 나아가 국왕을 옹호하는 정치세력의 결속을 다짐으로써 정치와 군사 등에 대한 제도정비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33대 성덕왕대(702~737) 신라는 전성기에 도달하여 왕권은 안정되었고, 또한 당을 침공한 발해에 대한 군사동원을 계기로 하여 평양 이남 지역의 신라 소유를 당으로부터 공인받게 됨으로써 삼국통일의 숙원을 완전히 풀게 되었다.

그런데 중대왕권은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다거나, 나아가 전제화(專制化)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중대왕권은 앞선 시기의 중고왕권에 비하여 크게 강화되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왕권의 성격 자체가 본질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고대왕권은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신성을 기본 요소로 하여 제정일치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신라의 중고왕권도 정치적 권력과 함께 불교적 신성이 일체화된 형태로서 부족국가시대의 제정일치의 여운을 아직 벗어나지 못하였다. 일찍이 23대 법흥왕은 율령 반포와 상대등 설치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면서 불교를 공인하여 왕권의 초월화를 추구하였고, 24대 진흥왕은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영역 확장을 추진하면서 전륜성왕 이념으로 정복 군주의 위상을 드높이었다. 그리고 26대 진평왕은 중앙의 행정관서를 정비하면서 부처 가족의 신성관념으로 왕권의 신성화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27대 선덕여왕대 이르러 정치적 권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불교적 신성만을 강조하게 되면서 실체가 없는 ‘성골’신분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상대등 비담의 반란 진압을 계기로 하여 김유신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와 외교의 권력을 장악한 김춘추가 마침내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여 중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면서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고 불교 대신에 유교를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채택함으로서 불교적 신성의 요소는 크게 축소되는 대신 정치적 권력이 크게 확대되는 왕권의 성격 변화를 겪었다. 왕권의 상징물도 중고의 3보(三寶:진흥왕대의 황룡사장육존상・진평왕대의 천사옥대・선덕여왕대의 황룡사9층탑)에서 중대의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교체되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하게 된다”는 만파식적을 국보로 삼아 태평시대를 구가할 정도로 왕권은 안정되고 국가가 융성한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83호 / 2021년 4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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