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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⑧ (3) ‘중대불교’의 사회적 배경 - 하

관료적 성격 강한 정치제도 확립하면서 진골중심 골품제는 유지

신라 중대 율령과 정치기구는 중고의 것 답습하면서 순차적 보강
왕권 보좌하는 내성과 행정조직 관장하는 집사부 통해 왕권 강화
왕권 강화와 관료제 발전에도 진골귀족 독점적 지배력 변함 없어 

신라는 ‘중대’에 들어와 왕권의 정치력이 크게 강화되고, 종교적 신성의 요소가 퇴색됨으로서 정치권력의 정상으로서의 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체제로서 율령제도와 정치제도가 정비되었는데, ‘중고’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그를 바탕으로 당의 율령체제를 받아들여 접목시킴으로써 신라의 정치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른바 율령체제라는 것은 당나라의 법률체계, 즉 당률(唐律)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중국의 후세에 이르기까지 계승된 중앙집권적 관료조직의 기본틀을 정립한 것이다. 

신라는 김춘추가 집권하면서부터 당나라의 국가조직과 관료체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부족적 요소를 불식시키고 통일국가를 지향하고자 하는 제도 혁신을 추구하였다. 김춘추는 가야 계통의 김유신과 연합하여 상대등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고, 외교권과 군사권을 장악하면서 당의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정치와 문화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김춘추의 정치개혁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진덕여왕 5년(651) 행정관부를 총괄하는 집사부와 율령 제정을 담당하는 이방부(理方府)를 새로 설치한 것이었다. 그리고 태종무열왕 원년(654) 이방부령 양수(良首)에게 명하여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케 하였다. 

당나라의 법령에는 율(律)・영(令)・격(格)・식(式)의 4종류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율은 금지법이나 형벌법, 영은 명령법이나 행정적 규정, 격은 백관과 유사(有司)가 시행하는 업무규정, 식은 율령시행상의 세칙규정을 말하는 것이다. 당에서는 수나라의 개황률(開皇律,581)을 이어받아 율은 7회, 영은 10여 차례 제정되었는데, 무덕(武德)율령격식(624)을 비롯하여 정관(貞觀)율령격식(637)・영휘(永徽)율령격식(651)・수공(垂拱)율령격식(685)・신룡(神龍)율령격식(705)・개원(開元)율령격식(719・737) 등이었다. 이 가운데 신라 중대에 직접 영향을 준 것으로는 정관율령격식과 영휘율령격식이었을 것이다. 한편 문무왕 21년(681) 문무왕이 내린 유조(遺詔)에, “율령격식에서 불편한 것은 곧 고치라” 라는 대목이 있는 것을 보아 신라의 법령에도 율・영・격・식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태종무열왕 원년(654)에 이방부로 하여금 제정케 한 이방부격 60여조도 백관과 유사가 시행하는 업무에 관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태종무열왕대와 문무왕대에 율령의 제정 문제가 대단히 중요시되었음은 문무왕 7년(667) 이방부를 좌・우(左・右)이방부로 확대하고, 중앙의 상급관서와 같이 각각 영 2인, 경 2인, 좌 2인, 대사 2인, 사 10인 등 5등급으로 구성하였으며, 앞서 진덕여왕 6년(652)의 천효(天曉), 태종무열왕 원년(654)의 양수(良首)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방부령의 인사에 관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특기된 사실 등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신라 중대 율령의 제정과 함께 정비된 정치기구는 외형상으로는 대체로 중고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보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고의 정치기구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각 정치세력을 상호 견제하는 구조였다. 

첫째는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上大等), 둘째는 왕궁과 왕실을 관리하는 내성(內省), 셋째는 중앙행정관서를 총괄하는 집사부(執事部)였다. 그 가운데 제일 먼저 설치된 것은 상대등으로서 법흥왕 18년(531) 초월적인 지위로 상승한 국왕을 대신하여 6부회의(和白會議)를 주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25대 진지왕과 27대 선덕여왕 같이 왕권이 약화되었을 때는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총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덕여왕 16년(647) 상대등 비담이 왕권에 도전하다가 김춘추와 김유신의 연합세력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어 진덕여왕 8년(654) 상대등 알천이 왕위계승경쟁에서 김춘추에게 밀려난 이후 그 위상은 크게 약화되었다. 29대 태종무열왕 이후에도 화백회의 의장으로서 귀족을 대표하는 역할과 위상은 존속되었지만, 왕권의 강화에 반비례하여 그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둘째 내성은 왕권을 안정시키고, 중앙의 행정관서를 정비한 26대 진평왕이 즉위 44년(622) 대궁・양궁・사량궁 등 3궁의 통합 관리를 담당하는 궁정관부(일종의 궁내부)로 설치되었다. 내성은 실제 왕권을 뒷받침하는 중심 기구였는데, 3궁의 통합 관리는 6부 가운데 양대 세력인 양부와 사량부를 왕실에 통합시킴으로써 2부체제를 극복하여 왕실 중심으로 일원화시켰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성 장관의 명칭인 사신(私臣)은 상대등의 별칭인 상신(上臣)에 대응되는 것으로서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과 대립되는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또한 사신은 임기 제한이 없고, 또한 병부령을 겸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특히 김춘추의 아버지 용수가 진평왕의 사위로서 초대 사신을 맡아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할 수 있었고, 그것이 뒷날 김춘추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내성은 중고기인 진평왕대 설치되었지만, 중대 왕권강화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중대의 성격을 가진 관부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내성은 중대에 들어와 왕권 강화에 비례하여 더욱 중시되어 수많은 궁정관서들을 거느리는 거대한 규모로 확대되었다. 뒷날 어룡성(御龍省)과 동궁관사(東宮官司)가 분리되었는데, 소속 관사의 수는 내성 이하 71개, 어룡성 이하 35개, 동궁관사 이하 9개 등 115개에 이르게 되어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행정관서의 숫자를 훨씬 능가하였다.

셋째 집사부는 28대 진덕여왕 5년(651) 행정관서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정치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행정관서들을 통괄하는 핵심적인 관부로서 설치하였다. 집사부는 귀족적인 전통보다도 왕권을 보좌하고 그 지시를 받아 시행하는 행정부의 성격을 띤 관부였다. 그러므로 집사부의 장관으로서 수상의 직위에 해당하는 중시(中侍, 뒤에 侍中으로 개칭)는 귀족을 대표하는 상대등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시는 중대에 들어와 왕권의 강화에 비례하여 정치적으로 상대등보다 더 중요시되었다는 것은 신라의 관료체제가 한 단계 발전하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한편 집사부의 중시는 왕권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한 내성의 사신과 비교하면 내성의 사신이 왕실의 가신(家臣)으로서 사적 성격이 강한 직위인데 비하여 중시는 정부의 재상(宰相)으로서 공적인 성격이 강한 직위였다. 그러므로 국가의 공적인 성격의 관부가 더욱 중요시되는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는 중시를 더 중요시하여 임면 기사를 거의 빠짐없이 기술한 반면 사신의 임면 사실은 처음의 용수 임명 사실 외에는 일체 기록을 남겨주지 않았다. 

그러나 ‘삼국사기’ 직관지에서는 상편에 집사부 이하 44개의 중앙행정관서, 중편에 내성 이하 115개의 궁정관사, 하편에 무관 및 외관으로 분류 편집하였는데, 신라 당대에는 내성 이하의 궁정관사가 집사부 이하의 중앙행정관서에 결코 뒤지지 않는 비중을 가졌던 관부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신라 하대로 내려가면서 집사부의 중시도 점차 귀족 중심의 직위로 전락하여 상대등과 같은 귀족적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내성 소속의 상문사(詳文師)-통문박사(通文博士)-한림翰林), 어룡성 소속의 세택(洗宅)-중사성(中事省) 등의 학문기구가 국왕의 근시기구로서 새롭게 주목받는 관부가 되었음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한편 정치기구의 정비과정에서는 역시 집사부 이하의 중앙행정관부가 주목되는데, ‘삼국사기’ 직관지에 열거된 상급 중앙행정관부의 이름과 설치 연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집사부(651), 병부(516), 조부(584), 창부(651), 예부(586), 승부(584), 사정부(544), 예작부(686), 선부(663), 영객부(621), 위화부(581), 좌리방부(651), 우이방부(667).

이들 13개의 상급 중앙행정관부 가운데 문무왕대에 설치된 선부와 우이방부를 제외하면 모두 삼국통일에 앞선 중고기에 설치된 것이고, 그 명칭으로 볼 때, 뒷날의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 등의 6부, 또는 6조의 기능을 담당하는 관서들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에 율령을 제정하거나 감찰을 담당하는 관부인 우이방부와 사정부, 관료들에 대한 녹읍과 관료전 및 세조(歲租)를 관장하는 좌・우사록관, 해상교통을 담당하는 선부, 국왕 호위와 왕성 수비를 담당하는 시위부, 왕성의 축조와 정비를 담당하는 예작부와 경성주작전, 서시와 남시 등 시장을 관장하는 각 시전(市典),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와 유교 교육을 담당하는 국학 등의 관서가 신설, 또는 증설되는 등 시대적 요청에 따른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상급과 중급의 중앙행정 관부의 정원을 크게 늘려서 각 관부의 관직체계가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를 기본으로 하는 5단계 조직으로 정비된 것이었다. 이러한 체계는 관료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6부체제의 전통, 및 골품제도와 관등제도로 인한 제약 등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선 상급 중앙행정관부의 장관인 영은 최고위 신분인 진골 출신만이 선임될 수 있었다. 그밖에 귀족회의를 대표하는 상대등은 말할 것도 없고, 내성과 어룡성의 장관인 사신, 9주(州)의 장관인 총관(뒤에 도독), 중요 군단의 최고지휘관인 장군 36인 등은 모두 진골 출신만이 독점하게 되어 있어서 왕권의 강화와 관료제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진골귀족의 독점적인 지배력은 변함없이 유지된 귀족사회였다. 

또한 상급 중앙행정관부의 장관의 정원이 하위 관직의 수에 비하여 지나치게 많고, 관부에 따라 2〜3인의 복수로 되어 있는 점 등은 6부회의체제의 전통, 특히 양부와 사량부 중심의 2부체제의 잔재였다고 본다. 그 다음 각 행정관부의 차관인 경은 6두품 이상, 대사는 5두품 이상, 사지와 사는 4두품까지 임명될 수 있도록 신분에 따른 제약이 있었다. 그리고 44개 상급과 중급 모든 관부의 5단계 정원을 합하면 영 34인, 경 56인, 대사 94인, 사지 26인, 사 313인이었으며, 그밖에 경과 대사 사이의 직위인 감(監)이나 좌(佐)가 24인, 최하위 직위인 박사・노당・목척 화주 등 기술직이 90인으로서 총계 753인이 신라 전성기의 중앙행정관부 정원의 전체 규모였다.

한편 신라의 발전과정은 동시에 영토의 확장과정이었다. 특히 3국통일로 확대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서는 지방행정조직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신라의 지방통치조직의 기본이 된 것은 주(州)・군(郡)・현(縣)으로서 주에는 총관(도독), 군에는 태수, 현에는 현령에 이르기까지 중앙귀족이 임명되었는데, 그 성격이 점차 군사적인 것에서 행정적인 것으로 변화되어 갔다. 

그밖에 새로 귀속한 국가의 귀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5개의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소경제도는 새로 귀속한 주민을 회유하고 통제하는 한편, 중앙의 귀족들을 이주시켜 거주케 함으로서 수도의 지역적 편재성을 보완하여 지방의 사회적・문화적 거점을 구축케 한 독특한 지방제도인데, 그 장관인 사신(仕臣)은 중앙귀족이 임명되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85호 / 2021년 5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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