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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발전·전래 역사 새겨진 타임캡슐 간절한 신심 담지만 정치 수단 되기도

불상, 시대를 읽는 창

2~3세기 조성 간다라 불입상의 얼굴. 파키스탄 마르단 출토. 페샤와르박물관 소장.
2~3세기 조성 간다라 불입상의 얼굴. 파키스탄 마르단 출토. 페샤와르박물관 소장.

‘인천(人天)의 스승’이신 부처님의 모습에 대한 형상화는 시대와 국가, 민족의 구분없이 신심을 표현하는 엄중한 행위이며 오랜 고민과 정성의 총화였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이후 전래 과정에서 각 지역과 민족의 문화와 전통, 고유의 사상을 흡수해 나갔다. 그렇게 조성된 불상은 불교의 전파와 발전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타임캡슐과도 같다. 

하지만 ‘깨달은 이’의 모습을 인간 형상으로 표현하는 일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열반에 든 이후 무려 400여년이 되도록 감히 시도되지 못했다. 그 오랜 금기는 기원 전후 인도의 북부에서 깨졌다. 인도 북부 간다라와 중북부 마투라 두 지역서 비슷한 시기 붓다의 모습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간다라는 현재 파키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페샤와르 분지와 인접한 스와트, 부네르, 탁실라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일부를 지칭한다. 이 지역에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을 계기로 그리스인이 정착하면서 그리스헬레니즘 문화가 유입됐다. 이후 외래 민족인 쿠샨왕조가 서아시아를 거쳐 인도 북부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리스헬레니즘 문화와 서아시아문화의 융합이 이뤄진다.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은 엄청난 폭발력을 낳으며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간다라 지역에서는 오랜 금기를 깨고 마침내 인간의 모습을 한 붓다를 예배의 대상으로 조성하는 역사적인 변화를 이룩해 낸다. 간다라 불상의 이목구비와 머리카락, 옷자락의 표현 등에서 그리스 영향이 뚜렷하지만 그리스 신상들이 옆모습이나 측면 등 다양한 자세로 표현된 것에 비해 간다라의 불상들은 주로 정면을 바라보는 형태라는 점에서 서아시아로부터 유입돼 온 쿠샨왕조의 발자취도 엿볼 수 있다. 
 

2세기 전반기 조성 마투라 불좌상. 인도 카트라 출토. 마투라정부박물관 소장.
2세기 전반기 조성 마투라 불좌상. 인도 카트라 출토. 마투라정부박물관 소장.
5세기 후반 조성 굽타양식 사르나트 불좌상.
5세기 후반 조성 굽타양식 사르나트 불좌상.

간다라와 함께 불상의 탄생지로 지목되는 마투라는 갠지스강의 상류에 자리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간다라와 떨어져 있지만 쿠샨왕조의 지배범위로 두 지역 간 교류의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두 지역의 불상이 확연히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어 비슷한 시기 각기 조성이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오늘날의 주된 의견이다. 마투라 불상은 간다라에 비해 얼굴과 신체 묘사가 다소 추상적이고 단순해 보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훨씬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다. 활짝 뜬 눈과 숨을 한껏 들여 마신 듯 팽창한 몸은 당당함과 특유의 생기를 보여준다. 마투라 지역에서는 신상 조성에 있어 불교보다 앞선 것으로 여겨지는 자이나교가 기원전 2세기부터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종교의 전통이 마투라 불상 탄생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으며 인도인의 미의식도 적극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5세기에 이르러 간다라와 마투라 양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가며 굽타양식이라는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인도 고유의 불상 양식을 이룬다. 특히 사르나트지역의 불상들은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선 붓다의 표정을 깊이 있게 구현하는 동시에 법의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듯 얇게 표현하는 특징을 보이며 인도 불상조성술의 전성기를 말해준다. 굽타양식은 이후 주변국에도 전해져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12세기 스리랑카 폴론나루와에 조성된 갈비하라의 석불.
12세기 스리랑카 폴론나루와에 조성된 갈비하라의 석불.

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에 전해진 불교는 부파불교시대에 접어든 인도와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12세기 스리랑카에 싱할라왕조 제2의 전성기를 연 강력한 군주 파라크라마바후는 여러 부파로 분열된 승단을 하나로 통합하는 대대적인 ‘정화’를 단행한다. 이를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은 상좌부불교가 주도권을 잡으며 스리랑카는 상좌부불교의 종주국이라는 자긍심을 키워나간다. 강력한 왕권으로 승단에 영향력을 행사한 파라크라마바후는 폴론나루와에 거대한 석조불상 3기를 조성하며 자신의 정화를 기념했다. ‘갈비하라’로 불리는 이 석불상은 상좌부불교의 종주국이라는 스리랑카의 자부심이 파라크라마바후에 의해 구축됐음을 말해준다. 

동남아시아의 불교는 주로 스리랑카를 통해 전래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지만 동남아시아의 각 나라와 민족들은 이와는 다른 인식을 드러낸다. 생불을 자청하거나 붓다를 친견했음을 표방하는 불상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12세기 후반 캄보디아 앙코르톰에 조성된 바이욘사원의 인면불. 
12세기 후반 캄보디아 앙코르톰에 조성된 바이욘사원의 인면불. 

12~13세기에 동남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한 앙코르왕국은 수도였던 시엠레아프에 대규모 사원도시를 건설한다.  불교신자였던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12세기 후반에 건립된 앙코르톰은 세계적인 불교유적지로 손꼽힌다. 앙코르톰의 중심인 바이욘사원의 탑에는 총 216개의 인면상이 조성돼 있다. 이 상들은 모두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데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로 추정된다. 참파족의 침략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기도 했던 자야바르만 7세는 전대의 모든 왕들이 힌두교신자였던 것과는 다르게 불교를 국가의 중심이념으로 삼으며 자신 또한 생불로 추앙하게 했다. 자야바르만 7세는 그 자신이 독실한 불교신자였지만 바이욘 사원 곳곳에는 힌두교의 흔적이 혼재돼 있어 불교의 수용이 왕권 강화를 위한 강력하면서도 불가피한 조치였음을 짐작케 한다.

통일신라시대인 751년 조성된 석굴암에는 불교를 통해 백성들을 단결시키려는 국가의 의지가 담겨있다. 
통일신라시대인 751년 조성된 석굴암에는 불교를 통해 백성들을 단결시키려는 국가의 의지가 담겨있다. 

미얀마 만달레이 지역에 위치한 마하무니사원의 대불도 눈길을 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불상은 2500여년 전 지금의 방글라데시 지역에 있던 딘야와디 왕국에서 조성됐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간절히 기도했던 딘야와디 왕국 산다뚜라야의 바람을 헤아린 붓다가 왕국을 방문해 일주일간 설법하자 왕은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마하무니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믿을 만한 기록에 따르면 마하무니 사원의 불상은 1784년 꽁바웅 왕조의 보드퍼야 왕이 라카잉 지방을 침략해 빼앗아 온 것이다. 당시 불교문화의 발전은 국력을 과시하는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기에 명망있는 스님을 비롯해 불상이나 탑, 종 등은 가장 선호되는 전리품이기도 했다. 

불교는 수많은 전법승들을 따라 중국에 전해졌다. 부파불교 시대에 접어들며 인도를 떠나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전법승들은 다양한 부파의 가르침과 대승의 경전들을 중국에 전했고 이는 중국불교만의 특징이 담긴 불상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인도인들이 부처님을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하기까지 오랜 시간 망설였다면 중국인들은 도교 등 그들만의 익숙한 인식 위에 불교를 받아들이며 거침없이 불상을 조성하고 불화를 그려나갔다. 특히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전해지면서 부처님을 초월적 존재로 인식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신심을 대불로 시각화했다. 1세기 전후 전래되기 시작한 불교가 4세까지 꾸준히 동쪽으로 영향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석굴사원이 조성되고 인도의 굽타양식 등이 수용돼 불상조각의 토대를 다졌다면, 5세기 접어들면서 운강석굴 등을 통해 ‘중국화된 부처님’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미얀마 만달레이의 마하무니상.
미얀마 만달레이의 마하무니상.

북위 문성제의 전폭적 지원으로 460년부터 조성된 운강석굴은 국가의 보호 속에 급성장한 불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불교가 이처럼 왕권의 비호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극단적인 폐불의 위기도 수차례 겪었는데 이는 이민족들의 지배가 반복되는 혼란한 중국의 정세를 틈타 불교가 중국에 정착해가는 과정의 단면이기도 했다. 

불교의 중국 전래 과정서 나타난 석굴사원과 대형불상 조성은 한반도까지 이어진다. 신라 경덕왕 10년이던 751년, 김대성의 발원으로 조성된 석굴암은 한반도의 자연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석굴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 전래의 역사를 대변해 준다. 중앙아시아와 중국 내 실크로드 지역과는 달리 단단한 화강암이 다수인데다 목재도 풍부한 한반도의 자연환경에서 석굴은 익숙하지 않은 건축이었며 석재를 다루는 것도 목재에 비해 몇배의 노력이 들어가는 난공사일 수 밖에 없다. 석굴암 조성 역시 김대성이 불사를 발원한 이후 24년이 지나도록 완성하지 못하고 김대성 사후 국가에서 나서 이를 마무리 했다. 그런 점에서 석굴암은 삼국통일 후 고구려나 백제 유민의 흔적을 지우고 모든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완성하는 것이 절실했던 통일신라가 ‘불국토’라는 이상향을 가시화하기 위해 ‘불국사’와 함께 선택한, 삼국 어느 나라의 전통에도 속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건축은  아니었을까. 

5세기 중국 북위의 문성제가 후원해 조성된 운강석굴.
5세기 중국 북위의 문성제가 후원해 조성된 운강석굴.
8세기 일본 쇼무천황이 백제 의자왕 후손의 보시를 받아 완성한 청동대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불국사와 석굴암 조성을 시작하기 직전 일본 나라 지역에서는 쇼무천황이 또 다른 이유로 대불 조성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자연재해와 역병, 흉작, 반란 등에 시달리며 수도를 4번이나 옮길 정도로 혼란을 겪었다. 쇼무천황은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타계하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 도다이지(東大寺) 건립과 대불 조성이라는 대작불사를 일으킨다. 741년 도다이지의 전신 킨쇼지(金鐘寺)를 창건한 쇼무천황은 743년 부처님의 힘으로 자연재해가 사라지길 발원하며 청동대불 조성을 시작한다. 하지만 대불 조성은 6차례나 실패를 거듭했고 국가 재정은 파탄 직전에 이른다. 이때 쇼무천황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가 바로 백제 패망 후 일본에 정착했던 의자왕의 4대손 왕경복이었다. 그가 금 900냥(약34kg)을 보시함으로써 749년, 마침내 청동대불 조성을 완성할 수 있었다. 동대사와 청동대불에는 한반도의 삼국과 통일신라, 그리고 일본 역사의 한 줄기가 지금까지 고여 흐르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586호 / 2021년 5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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