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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중독으로 스스로 쌓아올린 벽, 이젠 허물겠습니다

기자명 법보

[신행수기 당선작] 포교원장상 - 이정민

폭력 일상이던 어린시절 상처로 가족 원망하며 현실 도피
알코올중독 아빠에 진저리쳤지만 10년 뒤엔 내가 그 모습
정토법당서 참회기도하며 “나의 선택이 문제였다” 자각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어려서부터 혼자 조용히 있기를 좋아하는 예민한 소녀였던 내게 아빠는 내 마음을 잘 알아주고 항상 내 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아기 때부터 생일이면 독상을 차려주실 만큼 나를 아끼고 귀하게 생각하셨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가족들의 광기 어린 성향이었다.

“은희야(어릴 적 이름), 니 까자(과자의 경상도 사투리) 어디서 사 왔노?”
“외상으로 사 왔다.”

이 대답에 태어나 처음으로 폭력을 경험했다. 사실 시골에서 외상으로 간식과 술을 사온 건 아빠였고 아빠를 꼬리처럼 따라다닌 나는 배운대로 했을 뿐이었지만 설명 한마디 없이 매질이 돌아왔다. 어린 자식을 죽여버릴 듯한 아빠의 살기를 엄마가 막아주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그런 일이 있고 엄마는 최선을 다해 보호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엄마를 이상하게도 아빠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아빠와 동일화된 정서로 엄마를 무시하고 조롱했다. 

경제적인 문제로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나는 두 사람의 폭력을 몸으로 받아냈다. 사춘기가 되어서도 따귀는 여전히 일상이었고 허리띠로 때리는 참담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외가 친척들이 보는 앞에서도 종종 체벌이 이루어졌다. 어린아이의 자존감은 처절하게 짓밟혔다. 

어느 날, 중학생이 된 나는 외할머니에게 찰흙으로 그릇 만드는 과제를 부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만든 그릇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내 숙제 어떻게 할거냐”며 할머니에게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울었다. 순간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오며 별이 번쩍했다. 온몸에 찬물이 쏟아져내렸다. 엄마가 물 바가지로 머리를 내려쳤고 손찌검이 얼굴로 날아왔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너무 뜨거워 찬물에 젖은 옷이 차갑지 않았다.

‘두고 보자. 죽을 때까지 당신들은 웃을 일이 없을 거다.’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녹음됐다. 그 순간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서 끝없이 반복됐다. 그 후 나는 ‘보이지 않는 힘센 존재들’을 향해 내 편이라 여겨지던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내 저주가 들어진 듯 여겨질 때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어릴 적 나에게 외교관이나 항공기 승무원이 되라고 하던 아빠는 내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고 용돈도 두둑하게 주는 분이었다. 그런 때도 잠시 있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실업자가 된 후로 아빠는 홀로 술에 빠져들었다. 그런 막내아들 걱정에 눈도 제대로 감지도 못하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빠의 알코올중독은 더 심해졌다. 어렵사리 시작한 장사가 잘되지 않고 영화에나 나올 법한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이 이어지면서 아빠의 인생은 알코올중독으로 치달았다. 

엄마는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시작했다. 우리 세 자매 중에 둘째가 엄마 곁에서 일을 도왔다. 동생은 하교해서 교복을 벗기도 전에 곧장 엄마의 가게로 가 갈비불판을 닦았다. 하루 일을 마친 뒤에는 집으로 돌아와 TV 보는 게 동생의 유일한 낙이었다. 내가 공부하던 책상 바로 옆에 TV가 놓여있었고 공부를 좋아하던 나는 방해된다며 동생과 치고받고 싸웠다. 집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다. 

그때 매일같이 술을 드시는 아빠를 병원에 보내 치료받게 할 생각을 왜 못했을까. 왜 이상한 기독교인 아줌마가 우리 집에 와서 아빠를 더 이상하게 만들었을까? 다른 소녀가장들처럼 내가 학업을 나중으로 미루고 취업하는 길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후회들이 떠오르며 안타까울 뿐이지만 전현수 박사님이 강의에서 말씀하시듯이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기에 그러했을 뿐’이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예수의 모습을 나와 동일시하며 10대를 보내고, 스무 살이 되었지만 대학생활에서 그 어떤 기쁨도 보람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해 겨울 외가 근처에 있는 해인사로 가서 겨울방학을 보냈다. 그때가 성철 스님의 49재 기간이었다. 눈이 많이 내린 가야산을 등반했고 겨울방학 내내 물외암의 작은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경전을 사경했다. 그 시간 속에서 만난 가르침들은 미쳐 날뛰던 광기에 잔잔한 휴식을 주었고 며칠을 울어도 모자랄 것 같던 서러움을 위로해줬다. 

해인사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내 생활은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예전 같은 광기도 잠잠해졌고 술도 덜 마셨다. 세상을 좋게 바꿔야 한다는 신념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희망을 찾았지만 행복으로 가는 길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배회하던 어느 날 전봇대에 붙은 포스터를 봤다. ‘실천적 불교사상, 정토포교원, 홍제동…’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날, 바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몇 달 동안 불교를 배우고 일을 도왔다. 스님께서는 ‘깨달음의 장’ 수련을 다녀오라고 하셨다. 수련비가 없다고 하자 당시로서는 내게 거금이었던 20만원을 내어주시며 나중에 갚으라고 하셨다. 

아쉽게도 깨달음의 장에서 깨침을 얻지 못했지만 그 인연으로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곳을 가볼 수 있게 됐다. 한마음과학원의 공생과정, 능인선원의 죽음수련, 푸른누리의 명상수련, 신지아님의 수피춤명상, 아남 툽텐 린포체와 밍규르 린포체의 명상수련을 비롯한 티베트 스승들의 방한 법회, 광성사의 늉네수련, 원네스의 바가반 코스, 대일 스님의 조상해방코스, 샨티 출판사의 가족세우기 워크숍 등을 경험하며 세상이 보이는 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이 머리에서 내려와 심장 가까이로 스며들었다. 머리로는 그 무엇도 움직일 수 없다는 진실과 함께. 

하지만 문제는 나의 선택이었다. 자식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아버지가 취해서 단칸방 문턱을 베개 삼아 쓰러져 자는 모습을 보며 진저리를 쳤던 내가 10년 뒤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유전자 탓을 했다. 아버지처럼 세상을 원망하며, 인생을 한탄하고 홀로 술을 마시며 우는 날도 있었고 때로는 스스로를 이태백과 같은 신선이라 여기며 달을 벗 삼아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술 냄새를 풍기며 새벽예불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취한 상태로 출근했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술이 깨면 고작 몇 시간 맨정신으로 일한 후 저녁에는 다시 반주를 하거나 밥 대신 막걸리를 마셨다. 그게 사는 낙이 되었다. 사찰에서 집중 수련을 한 후에도 술로 회향을 했다. 가족들은 “저런 사람이 왜 절에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결혼 후 남편은 “여자가 그렇게 술 마시는 경우는 처음 봤다”며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내 방식대로 하겠다며 버텼다. 정상인 척하며 혼자서 수행을 열심히 하는 모양새를 보였지만 실상은 정신병자처럼 골방에 갇혀 꿈도 희망도 없이 도망치듯 술에 의지하는 생활을 20년 넘게 하고 있었다. 

정토법당을 만나고, 법당에 갈 때마다 발원했다. 

‘만생명 자기 자리에서 행복하길! 만생명 상처에서 벗어나길! 중독에서 벗어나길! 나와 나의 조상님들과 수많은 인연들이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존재들이여,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저도 용서하겠습니다.’

내가 비록 중독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일에는 실패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된다면 성공이 아니어도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격려했다. 내 기도가 금생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성취되리라 믿었다. 그렇게 매일 절을 했고 집중된 상태는 아니지만 명상을 꾸준히 하기도 했고 염불을 하기도 했다. 비록 지금까지 꾸준히 하나의 수행을 한 것도 아니지만 언제나 단 하나의 목표만은 분명했다. 내 마음속에서 20년 넘게 돌아가는 ‘폭력의 영상’을 끄고 싶었다. 그 목표를 향한 마음은 지금도 가늘게나마 지속되고 있다. 지금도 술을 마시고픈 마음이 일어나지만 예전처럼 강하지는 않다.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면 내 몸의 세포들에게 일러준다.

‘얘들아! 술 많이 마셔봤잖아. 마시면 잠 오고 동물처럼 누워있게만 되잖아. 마신 다음에 기분은 좋았어? 잠시 위장으로 내려갈 때 쏴한 거 다음엔 아니잖아. 그리고 몸 피곤한 거는 어쩌고. 또 다음 날 못 일어나잖아. 살아있는 동안에는 산 사람처럼 살자. 언젠가는 죽잖아. 시체놀이는 그때 하자.’

내 인생에서 트라우마와 중독은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보였다. 모친에게 물바가지 세례를 받은 악몽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벽에서 나아가기 위해 창문을 찾고, 문고리를 잡고자 애썼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잡고자 했던 문고리가 이제는 필요 없어졌다. 문이 없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부터 벽이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저 나 스스로가 종이벽을 만들어 시멘트색을 칠한 뒤 ‘절대 못 넘어간다’고 믿었을 뿐이다. 

선산에 법당을 짓고 정성껏 불공을 올리시며 미륵부처님을 부르셨던 할아버지의 공덕이 나를 보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할아버지께 말씀드린다.

“할아버지! 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아주세요. 주신 생명으로 자비로운 마음을 널리 펼치며 덕망있는 삶을 살게요. 아미타부처님 품에 안기신 아빠도, 항상 지켜주시는 할아버지도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주세요.”

 

[1586호 / 2021년 5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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