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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에게 해탈·열반이라는 최고 행복 선사한 부처님 출가

부처님의 가족들

풍요롭고 호화로운 궁중의 안락함 뒤로하고 출가한 부처님
깨달음 이루고 교단 형성된 뒤에도 가족들과 일정거리 유지
고국 방문 뒤 감화된 가족들의 출가 이어지며 교단에도 기여

[1586호 / 2021년 5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그림=육순호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 전, 히말라야 산기슭 카필라국의 왕위를 계승할 싯다르타 왕자가 출가를 하자 숫도다나왕을 포함한 사캬족 모두가 혼란에 휩싸였다. 숫도다나왕은 왕자가 자신의 뒤를 이어 장차 전륜성왕 같은 훌륭한 왕이 되길 바랐다. ‘모든 것을 다 이룬다’는 의미인 ‘싯다르타’로 이름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왕은 풍요롭고 호화로운 궁중에서 안락하게 지내며 싯다르타가 훌륭한 왕가의 후손으로 자라나도록 세심히 보살폈다.

하지만 숫도다나왕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싯다르타 왕자는 보장된 왕의 길을 과감히 버렸다. 고통에서 헤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탈과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29살 나이에 출가의 길에 오른 것이다.

부처님은 출가 후 가족과 항상 일정거리를 유지했다. 부모의 사랑을 누구보다 아낌없이 받았음에도 야멸찰 정도로 가족을 멀리했다. 깨달음을 위해 생사를 건 고행을 했던 6년 동안은 물론 깨달음을 얻은 후 교단이 형성되고 명성이 높아진 후에도 고향을 찾는 것을 미뤘다.

싯다르타가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 성자가 되고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숫도다나왕은 사신까지 보냈지만 그들조차 부처님을 만나 모두 출가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사신들은 기꺼이 거친 누더기와 진흙 발우만으로 행복한 비구가 됐다. 부처님 곁에서 정진하며 세간의 즐거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부처님이 카필라국을 찾았고 이때 부처님과 처음 마주한 숫도다나왕과 가족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부처님과 제자들의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이 친척들과 백성들을 위해 법을 설했고 그들도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부처님의 설법은 계속됐고 사캬족의 많은 이들이 연기의 깊은 이치를 깨닫고 집착을 내려놓았다. 출가하겠다는 이들이 잇따랐다. 유력한 바라문 가문 사람들의 출가도 이어졌고, 이는 부처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부처님이 카필라국에 온 지 사흘째 되던 날은 부처님의 새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가 낳은 동생 난다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 잔칫집에 나타난 부처님을 따라나선 난다는 한없이 고요하고 성스러운 부처님 모습에 감화돼 그 길로 출가 길에 오른다. 결혼식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 자나파다칼야니 공주의 얼굴이 잠시 떠오르기도 했지만 부처님이 설한 깨달음이라는 최상의 공덕과 해탈의 즐거움을 뿌리칠 수 없어 비구가 된 것이다.

출가 인연은 부처님 아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부처님은 “재산을 물러달라”는 아들 라훌라를 사미로 받아들였다. 최초의 동자승은 부처님 아들인 셈이다. 어린 라훌라에게 출가수행이 쉬울 리 없었고, 어린 마음에 다른 수행자들의 말을 쉽게 들었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라훌라에게 부처님은 여러 차례 자비로운 가르침을 준다. 부처님은 라훌라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안내함으로써 어린 아들이 온전한 수행자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도왔다. 라훌라는 갓 태어난 자신을 내버려 둔 채 떠난 아버지였지만 부처님으로 그를 존경하고 그 길을 닮아가려 애쓴 끝에 후에 부처님의 십대 제자로서 ‘밀행제일’로 칭송받게 된다.

숫도다나왕의 형제인 아미토다나왕의 아들 아난다도 출가자의 길을 선택했다. 부처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으로 출가한 아난다는 당시 고작 여섯 살로, 조카인 라훌라보다도 어렸다. 왕족들의 잇따른 출가로 부처님을 따르는 이들이 많아졌고 교단은 점점 크고 단단해졌다.

비구니승가의 탄생도 부처님 가족에서부터였다. 숫도다나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인인 마하파자파티는 부처님께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세 번이나 요청했다. 그러나 부처님께 번번이 거절당했고 아난다의 도움으로 출가가 허락됐다. 여성 최초의 출가자가 된 것이다. 마하파자파티는 출가 후 부처님을 기른 어머니로서의 어떤 권위도 내세우지 않았다. 언제나 스스로 몸을 낮추고 솔선수범했다. 어려운 수행도 몸소 실천함으로써 왕비로서의 호사스러움도 버렸고, 출가를 통해 여성도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남성과 다르지 않은 구도자임을 인정받았다.

수많은 여성 출가자들이 마하파자파티 이후 당당하게 출가구도의 길을 걸었다. 마하파자파티는 단순히 이름만 출가자이거나 거드름을 피우는 부처님의 양모가 아니었다. 뼈를 깎는 수행과 절제된 생활로서 승가에 모범을 보였다. 그는 항상 자신의 말과 생각을 잘 다스리는 수행자였다.

출가의 인연은 부처님의 아내로까지 이어졌다. 라훌라의 어머니이기도 했던 야소다라는 시아버지인 숫도다나왕이 세상을 떠나자 부처님의 양모였던 마하파자파티를 따라 불제자가 됐다. 야소다라는 부처님과 라훌라 가까이 있는 비구니 수행처에 머물렀다. 가까이서 부처님을 바라보며 살고 싶은 그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승가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잘 단속했다. 비구니가 된 후 야소다라는 자신을 반성하는 일에 매우 엄격해 불제자 가운데 구참괴제일(具慙愧第一)이라 칭해졌다. 부처님과 라훌라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을 넘어서려고 노력했기에 붙여진 것이었다.

야소다라의 일생은 성인을 남편을 둔 여인의 삶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야소다라는 그릇이 큰 여인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남편을 스승으로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깨달음에 대한 정열로 바꿔 정진할 수 있었던 여인이었다.

야소다라와 함께 난다의 아내 자나파다칼랴니, 난다의 여동생 순다리난다도 잇따라 출가해 비구니가 됐다. 이후 새의 두 날개처럼 부처님 교단의 한 축을 이루게 된 비구니승가는 보석처럼 빛나는 훌륭한 비구니들로 채워지게 됐다.

깊은 발심 끝에 부처님 가족의 출가가 이어졌고 교단에 대한 보호와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생사를 건 정진을 멈추지 않았고 이후 아라한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불도를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가족도 있다. 대표적인 이가 부처님의 아버지 숫도다나왕과 사촌인 데바닷타다.

숫도다나왕은 ‘나의 아들이 친족과 나라를 버렸다’는 생각에 누구보다 괴로워했다. 그러면서 집을 떠난 아들을 늘 그리워했다. 마야왕비가 세상을 떠난 후 새 아내로 맞은 마하파자파티 왕비에게서 난다 왕자를 얻었으나 왕의 마음 깊은 곳에는 늘 싯다르타 왕자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깊은 사랑은 숫도다나왕을 수시로 울적하게 만들곤 했다. 그래서일까. 숫도다나왕은 임종 직전까지 부처님을 위없는 깨달음을 이룬 인천(人天)의 스승이 아니라 그저 아들로서 볼 뿐이었다. 숫도다나왕은 자신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온 부처님을 보자 자신을 에워싼 친족들을 물리치고 아들인 부처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부처님의 손을 가슴에 얹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부처님은 숫도다나왕의 장례를 치르며 직접 관을 멨다. 부처님은 세상의 공경을 받는 거룩한 성자였지만 숫도다나왕에게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캬족 왕자 중 한 명이었던 데바닷타는 아누룻다, 밧디야, 아난다, 바구, 킴빌라, 우파난다와 등 왕자들과 함께 출가했다. 데바닷타는 굳은 결심으로 권력과 재산을 버리고 부처님의 뒤를 따랐고 ‘신통과 위력이 뛰어난 비구’로 명성을 높였다. 명석한 두뇌와 유창한 언변, 주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 사교성 덕분에 데바닷타 주위에는 권력자와 자산가들이 넘쳐났다. 여기에 아자타삿투 왕자의 스승이 되면서 그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부처님은 “수행자에게 많은 보시와 드높은 명성은 타오르는 불과 같다”고 경고했지만 권력과 명예에 맛들인 데바닷타의 야욕은 잠재울 수 없었다. 부처님에게 교단 통솔권까지 요구한 데바닷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했고 분노와 야욕으로 부처님을 살해하려까지 했다. 하지만 파견된 궁수들이 부처님께 감화해 수포로 돌아갔고 자신이 직접 나선 살해 계획도 실패했다. 거듭된 반역에도 부처님은 관용과 타이름으로 데바닷타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데바닷타는 병석에 눕고 나서야 잘못을 깨달았다. 결국 참회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전한다.

숫도다나왕과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법에 따라 보지 않고 인간으로 봤기에 감화를 받지 못했다. 각각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시기 질투라는 감정이입을 통해 끝내 법을 보지 못했고 결국은 무명중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감정에 휩싸여 부처님 법에 의지한 깨달음을 실천하지 못했다. 달을 가리키는 손만 봤을 뿐 정작 달은 보지 못한 것이다.

부처님은 혈연과 지연으로 대물림되는 특혜를 타파하고 귀천의 기준은 어떻게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보여주듯 스스로 왕가에서 태어났지만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아름다운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을 뒤로 한 채 출가 수행자의 길을 택했다.

부처님의 냉철하고 처절한 결심과 실행을 통해 수많은 중생들은 물론 부처님 가족들도 최고의 행복을 얻게 됐다. 본인만의 행복이 아닌 가족도 행복한 부처님의 출가는 그래서 더 특별하다. 꺼지지 않는 하나의 등불이 수많은 등불로 이어져 세상을 밝히듯 부처님의 출가는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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