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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병고로 찾아든 절망 속에서 기도로 새 희망 일궈

기자명 법보

[신행수기 당선작] 중앙신도회장상 - 정정례 

갑작스런 남편 뇌종양 선고…수술 후 회복 안 돼 위관 호수로 음식 섭취
아픈 남편 두고 숟가락으로 밥뜰 때면, 밥알이 목에 메어 넘어가질 않아
참회기도 이후 남편 병 기적적으로 호전…“이웃에 감사·자비 실천 발원”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우리 가족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2006년 3월 무렵이었다. 어느 날 남편이 여자의 갱년기 증상처럼 자꾸 얼굴에 열이 나고 매운 것을 먹은 것처럼 혀가 화끈거린다고 했다.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 먹어봤지만 차도가 없었다. 인근 대학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의사는 “남자도 갱년기가 올 수 있으니, 약을 먹고 기다려보자”고만 했다. 내심 걱정이 돼 “MRI라도 찍어보면 좋겠다”고 했지만, 의사는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했다. 의사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남편은 얼굴과 입에서 나는 열을 식히려 찬물과 아이스크림을 달고 살았다. 점점 증상이 악화돼 약도 잘 삼키질 못했다. 9개월이 지났을 무렵 결국 MRI를 찍었다. 결과는 뇌종양이었다. 그것도 뇌의 가장 중요한 숨골 부위에 종양이 붙어있었다. 청천벽력과 같았다. 무작정 기다리라고 했던 의사는 난처하고 미안했던지, 서울의 한 유명병원을 연결해줬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감정에 주저앉을 수 없었다. 어찌됐든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걸고, 서울로 향했다. 

수술은 그해 12월4일 잡혔다. 담당 주치의가 수술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난이도 높은 수술이라 수술 이후 사지마비와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하면서 보호자 동의를 요구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냥 수술을 하지 않고 남편을 집으로 모시고 싶었다. 차라리 남은 시간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고, 편히 임종을 맞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수술 전에는 최악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동생의 말에 일단 싸인을 했지만 불안감은 줄지 않았다. 

수술 날 아침, 남편은 의외로 담담했다. 남편은 병이 생기기 전부터 출퇴근길에 익산 연국사 법당에서 매일 108배를 해왔다. 그런 기도 힘이 수술을 앞두고도 남편을 저렇게 의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했는가 싶었다. 초조함에 손에서 땀이 멈추질 않았다. 의지할 곳은 부처님밖에 없었다. 병원법당에서 부처님과 마주했다. 일 배 일 배를 정성껏 올렸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참회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동안 남편과 내가 누군가에게 섭섭한 말을 했거나 벌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다면, 용서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수술은 꼬박 7시간이 넘게 걸렸다. 회복실로 돌아와 의식을 찾은 남편은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의사가 나를 가리키며 남편에게 누구냐고 물어보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각시”라고 했다. 손가락 발가락도 움직이려는 시늉을 했다.  마음속에서 뜨거움이 올라왔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담당 의사는 “숨골과 너무 가까워 종양을 다 절개하지 못했으니, 나머지는 방사선으로 치료하자”고 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를 수없이 되뇄다. 

남편은 회복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3~4일 정도 지났을 무렵, 남편은 간호사에서 어눌한 말로 무언가를 부탁했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간호사는 필기구를 건넸다. 남편은 그곳에 ‘금강경’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한참 지난 후에 남편은 그때 눈만 감으면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들이 나타나 데리고 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3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는데,  ‘금강경’을 머리맡에 뒀더니 저승사자들이 나타나지 않아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했다. 

순조롭게 회복될 것 같았지만, 남편에게 다시 이상증상이 나타났다. 수술후유증으로 음식물을 삼키는 기능이 마비됐다. 침도 삼키지 못해 남편은 입 밖으로 뱉어내야 했다. 3일이면 휴지 2통이 소진될 정도로 침과 가래를 받아냈다. 남편은 인지기능만 정상일 뿐 먹을 수도, 걸을 수도 없었다. 꼼짝없이 누워만 있는 남편의 대소변을 다 받아내야 했다. 하루에도 수없는 감정들이 교차하며 희비가 엇갈렸다.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곧 괜찮아질 거야’하며 희망을 걸었다. 나쁜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오직 부처님의 한량없는 대자비 대광명의 가피에 기댔다. 

방사선치료까지 그렇게 두 달이 지났지만 남편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먹을 수가 없어, 매 끼니마다 코에다 호수를 꽂아 ‘뉴케어’라는 액체를 주입하는 게 식사의 전부였다. 병원 측에서 퇴원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퇴원을 하느냐고 했지만 병원에선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내과에서 위관에다 호수를 삽입하는 수술을 하고, 집에서 보호자가 음식물을 갈아 주사기로 호수를 통해 천천히 넣어주라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재활의학과 의사는 ‘평생 삼키는 기능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음식물 주입하는 방법을 잘 익히라고 당부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을 간호했다. 세 딸아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는 기숙사 생활을 했던 터라 초등학생이던 막내만 있었다. 끼니마다 남편의 음식을 위해 믹서기를 돌렸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막내는 그 소리가 싫었던지 믹서기를 돌릴 때마다 귀를 막고 문을 ‘꽝’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막내딸이 학교에 가면 남편을 일으켜 식탁 위에 앉히고 갈아놓은 음식을 주사기에 담아 호수에 넣어줬다. 그리곤 나도 밥 한술을 떴다. 그러나 곧 목이 메었다. 남편은 혼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데 나는 살겠다고 숟가락을 들 때, 그때 알았다. 옛날 어른들이 목이 메여 밥을 못 먹었다는 말씀을, 목이 멘 밥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매일 병원으로 출퇴근하며 재활치료를 했다. ‘혹시나’ 할 때는 희망을 걸었고, ‘역시나’ 할 땐 절망이 다가왔다. 그러다 2007년 초파일 무렵 연국사에서 스님 한 분이 병문안을 오셨다. 스님은 남편 얼굴을 보더니 많이 좋아진 것 같다며 다시 검사를 해보라고 권했다. 보기에는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보였지만, 스님의 말씀에 따라 검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남편은 이마에 진땀을 흘리면서 병원에서 주는 음식 몇 스푼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의사도, 지켜보던 나도 놀라고 감사했다. ‘부처님, 제불보살님 감사합니다.’ 힘겹게 음식을 삼키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젠 말랐을 거라 여겼던 눈물샘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수술 후, 침도 물도 못 삼켰던 남편이 그렇게 조금씩 음식을 삼켰고, 걸음도 한발 한발 떼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남편이 중환자실에 있을 땐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막막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 밖에 없었다. 새벽마다 부처님 전에 108배를 하고, 참회하면서 ‘제 남편을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집에 돌아와 자고 있는 막내딸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볼을 부비며 ‘아빠 없는 아이가 되지 않도록 지켜 달라’고 흘렸던 눈물도 적지 않았다. 

남편이 호전되면서 이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이 되어야 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할 무렵 “막내를 키우고 나면 불교용품점을 하면 어떻겠냐”는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 때 ‘결혼 전에는 펜대만 잡았고, 이후에는 전업주부로 살아서 장사라는 것을 할 줄 모른다’고 했지만, 그 인연으로 불교용품점을 열게 됐다. 차와 다구 용품을 팔면서 손님들과 불교이야기를 하며 포교도 했다. 이렇게 살 수 있게 해 준 부처님의 가피에 감사함을 잊지 않겠다고 발원했다. 

부처님 가피는 이어졌다. 한 번은 카이스트를 다니던 큰 딸이 외국 유명대학에서 ‘바이오 뇌 공학’으로 박사과정을 다니고 싶다고 했다. 우리 가정형편상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그랬더니 큰딸은 대기업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겠다고 신청했다고 했다. 벌써 1·2차 시험을 통과했고, 마지막 관문인 면접을 앞두고 있었다. 그 면접만 통과하면 세계 어느 대학이든 1년에 5만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면접날, 스님께도 기도를 부탁드렸다. 법당에서 함께 기도를 하고 싶었지만 가게를 봐야했다. ‘천수경’과 ‘금강경’을 독송했다. 오후 6시 무렵, 딸에게서 연락이 왔다. 면접관의 질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뇌 공학과 연결해 설명해보라’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의 영향으로 평소 절에 다니고, 불교사상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딸아이는 면접관의 질문에 조목조목 답변을 했다고 했다. 순간 ‘스님의 정성어린 기도와 발원이 그곳까지 닿았구나. 부처님 가피가 그곳에 이르렀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또 한 번 ‘부처님 고맙습니다’를 되뇄다. 큰애는 무사히 합격했고,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독일에서 뇌공학 박사로 연구를 하고 있다. 

남편이 아팠던 일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우리 가족의 신심이 더 깊고 단단해졌다는 점이다. 수도 없이 목멘 밥을 삼키지 못해 재채기를 하고 밥알을 뱉으면서 다시 밥을 삼켜야 했던 일도 잊을 수 없다. 세상 어디에는 나처럼 목멘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살림이 아니라서 그분들을 위해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그분들을 위해 기도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또 죽는 날까지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지하면서 쉼 없이 기도 정진할 것이다. 

다시 태어난 남편이 고맙다. 비록 뇌병변장애 1급이지만 기적적으로 회생해 스스로 잘 생활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남편의 불심이 없었다면 불굴의 의지가 없었다면 모든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자기의 길을 가고 있는 큰 딸과, 아빠를 지극히 생각하는 둘째와 잘 돌봐주지 못해 항상 미안함을 갖고 있는 막내에게도 고맙고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준 연국사 스님들,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도반들, 마한거사림회 박중근 회장님과 거사님들, 친정언니와 오빠, 나의 동생들, 남편 회사의 동료분들과 상사, 사장님까지 모두 감사하다. 이 분들이 없었다면 어렵고 힘든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인연에 감사함을 전한다. 

앞으로도 부처님 가피를 잊지 않고 이웃을 돕고 섬기는 자비심을 베풀 수 있도록 정진할 것이다. 

 

[1586호 / 2021년 5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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