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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⑨ (4) ‘중대불교’의 사상적 배경 - 상

통일전쟁·나당전쟁 겪으며 국제관계 지평 인식 크게 확대

3국 중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 고구려·백제에 기대 사신 파견
김춘추·김유신, 정권장악 후 생존 넘어 통일 위한 적극 외교 선회
불교, 왕실을 넘어 대중으로 확대…국가운영에 유교 새롭게 채택

전북 익산시 전경. 문무왕은 고구려 멸망 후 안승이 귀부해 오자 그를 고구려 왕으로 봉하고 금마저라 불리던 이곳에 거주시켰다. 익산시 제공
전북 익산시 전경. 문무왕은 고구려 멸망 후 안승이 귀부해 오자 그를 고구려 왕으로 봉하고 금마저라 불리던 이곳에 거주시켰다. 익산시 제공

삼국통일전쟁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 사이의 항쟁으로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중심세력인 당나라를 비롯하여 북방의 유목민족인 돌궐・거란・말갈, 그리고 바다 건너의 왜 등 주위의 다양한 세력들이 가담한 국제전쟁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러한 여러 세력 사이에는 이른바 합종연횡(合從連衡)의 외교전이 전개되었는데, 그 중심축은 당과 신라의 동서동맹(연형)과 고구려・백제・왜의 남북연합(합종)의 2대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신라의 외교정책은 28대 진덕여왕 2년(648)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의 군사동맹 체결을 분기점으로 하여 크게 바뀌었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신라는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으로 확대된 3국 사이의 항쟁에서 일약 주역의 하나로 떠오르게 되었다.

3국 가운데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가 국제사회의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대 나물마랍간대(356~402)부터였다. 즉 나물마립간 26년(381) 북조왕조인 전진에 위두(衛頭)를 사신으로 파견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낸 것이 아니고 보호국인 고구려의 사신을 따라간 것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중국 왕조에의 사신 파견은 계속되지 못하였고,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그 뒤 신라는 19대 눌지마립간 17년(433) 남진정책을 추진하던 고구려의 압력을 배제하기 위하여 백제와 나제동맹을 체결하고, 부자상속의 왕위계승을 통하여 왕권의 안정을 추구하는데 주력하였다. 신라가 국제무대에 다시 등장한 것은 23대 법흥왕 8년(521)으로서 남조왕조인 양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신라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동맹국인 백제의 사신을 매개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법흥왕대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24대 진흥왕대(540~576)에 한강 유역을 점유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였으나, 고구려와 백제 두 강국의 협공을 당하는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26대 진평왕대(579~632)와 27대 선덕여왕대(632~647)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중국의 왕조, 특히 통일세력으로 등장한 수나라, 이어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사신을 빈번히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활동은 국가의 생존을 위한 소극적인 방어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선덕여왕 말년(647)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 비담의 반란 진압을 계기로 하여 정권을 장악한 김춘추가 외교권을 행사하면서 적극적인 외교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합종연횡의 외교전이 전개되는 국제적 상황에서는 외교정책과 군사력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게 마련인데, 신라의 외교를 주도하게 된 김춘추와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의 연합에 의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으며, 또한 외교정책의 방향도 크게 바꿀 수 있었다. 이제 신라의 외교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에 대응하여 국가의 생존이라는 소극적 자세를 벗어나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3국을 통일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김춘추는 진덕여왕 2년(648) 당에 가기에 앞서 선덕여왕 11년(642) 고구려와 백제의 공동작전에 의해 대당 통로인 당항성을 빼앗기고, 백제군에 의해 서쪽 방어의 요충인 대야성을 함락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자, 직접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김춘추는 당나라를 상대로 한 외교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그는 당에 가기 1년 앞서 진덕여왕 원년(647) 먼저 일본에 갔었는데,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당에 가서 당 태종을 면담하고 나당군사동맹을 체결하는데 성공함으로서 삼국통일의 전쟁기에 돌입하게 되었다. 김춘추의 대당외교는 그의 아들들인 김법민・김인문・김문왕 등에게 이어지면서 계속 주도하였는데, 특히 둘째 아들인 김인문은 일곱 번 당에 들어갔으며, 당에 체류한 기간이 무릇 22년이나 될 정도로 대당외교에 평생을 바쳤다.

신라는 나당군사협정에 의해 당군과 합세하여 태종무열왕 7년(660) 비교적 약소한 백제를 먼저 멸망시키고, 이어 문무왕 8년(668) 동북아시아의 중심세력을 이루었던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서 삼국통일의 1차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런데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평양 이남의 지역은 신라가 점유한다는 당 태종의 약속을 당나라가 지키지 않고, 백제 지역에는 웅진도독부, 고구려 지역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도독으로 임명하는 등 신라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기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유신 등 신라의 지배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주었고, 신라 국왕을 문무왕에서 김인문으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의 분열정책을 격퇴함과 동시에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실력으로 한반도에서 당군을 축출하는 한편, 화친 외교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화전 양면의 정책을 구사하였다. 이제는 고구려와 백제의 두 적국 대신에 동맹국인 당나라를 상대로 새로운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신라와 당 사이의 입장 차이와 이해관계는 ‘삼국사기’ 문무왕 11년조에 전재된 대당총관 설인귀와 문무왕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 그리고 문무왕이 수시로 당 고종에게 보낸 외교문서를 통해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문무왕 12년(672)부터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간 나당전쟁은 문무왕 16년(676) 신라의 승리로 종결되었는데, 신라인들의 강렬한 통일의 의지와 긍지는 삼국통일의 최고 원훈으로서 당의 회유를 거절한 바 있던 김유신(595~673)이 문무왕 8년(668) 평양성 공격을 위해 출발하는 김인문과 김흠순에게 당부한 말에서 읽을 수 있다. “대저 장수된 자는 나라의 간성(干城)과 임금의 조아(爪牙)가 되어서 승부를 시석(矢石) 사이에서 결정하는 것이니, 반드시 위로는 천도(天道)를 얻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얻으며, 중간으로는 인심(人心)을 얻은 뒤에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신(忠信)으로써 존재하고, 백제는 오만(傲慢)으로써 망하였고, 고구려는 교만(驕慢)으로 해서 위태롭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정직(正直)으로써 저편의 왜곡(歪曲)을 친다면 뜻대로 될 수 있거든, 하물며 큰 나라의 명천자(明天子)의 위엄을 빌고 있음에랴?”

이상의 결론으로써 한반도의 동남쪽 변방에서 성장한 약소국 신라가 처음 국제사회에 등장할 때에는 선진국인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 편에 딸려 북조인 전진과 남조인 양에 각각 사신을 파견한 적이 있었으나, 계속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신라가 자력으로 중국 왕조와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이미 전성기를 지난 때인 진흥왕대부터였다. 진흥왕대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조성하였으나, 그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를 적으로 맞게 됨으로서 국가적 위기상황에 직면하였다. 진평왕대부터 대륙에서 통일세력으로 등장한 수와 당에 연이어 군사요청을 한 것은 당면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미봉책일 뿐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 급박한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 말년부터 김춘추가 대당외교를 주도하면서 생존을 위한 삼국항쟁으로부터 삼국통일을 위한 국제전쟁으로 전환되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으며, 이어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고 당의 세력까지 물리침으로써 삼국통일의 주체로서의 긍지(三韓一統意識)를 갖기에 이르렀다. 신라는 통일전쟁과 나당전쟁을 겪으면서 점차 국가의식이 강화되고,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식과 세계관의 변화가 왕권을 강화하고 지배체제를 정비하고, 나아가 그 운영원리로써 유교를 새롭게 채택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영양을 미쳐 좁은 의미에서의 왕실불교・국가불교의 차원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세계종교로서의 사상체계를 성립시키는 한편 불교신앙의 대상을 일반 평민이나 노비까지 대상으로 하는 대중불교로 확대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유교정치이념의 수용과 불교사상체계 성립의 배경을 설명하기에 앞서 우선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고 그 유민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신라 지배층의 국가의식과 세계관을 지적해 보기로 하겠다. 고구려에서는 나당연합군의 계속된 침공으로 국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가는 가운데 독재권력을 장악하였던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666, 천남생의 묘지에서는 665년 사망)에 사망한 뒤 그의 동생과 아들들 사이에 벌어진 권력쟁탈전은 고구려의 멸망을 더욱 재촉하였다. 특히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성읍 12, 인민 763호, 3543인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여 오자, 신라는 연정토와 그 시종 24인에게 의복・음식・주택을 주어 서울과 주부에 안치하고, 12성 가운데 성읍 인민이 완취해 있는 8성에는 군사를 보내어 수비케 하는 등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2년이 지난 문무왕 10년(670)에는 고구려의 대형(7등관계) 검모잠이 부흥군을 일으켜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安勝)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에 귀부하여 왔다. 신라에서는 그를 금마저(金馬渚, 현재 전북 益山)에 거주케 하고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문무왕 14년(674)에는 안승을 보덕왕으로 재차 책봉하고, 문무왕 20년(680)에는 안승에게 왕의 족하딸(外姪)을 시집보내었다. 그런데 고구려왕을 책봉할 때나 족하딸을 시집보낼(下嫁) 때에 내린 교서나 안승의 답서를 보면 형제국의 관계, 또는 제후국으로서의 예식을 취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로써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주체로서 그 산하에 제후국을 두었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영역 확장이 비록 평양과 원산을 잇는 선을 넘지 못한 불완전한 통일이었지만, 그 의식에서만은 천하를 통일하였다는 긍지를 가졌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런데 통합과 관용을 강조하였던 30대 문무왕(661~681)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이 31대 신문왕(681~692)으로 즉위하면서 삼국의 통합보다는 지배체제의 안정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정국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신문왕은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위하여 과감한 귀족세력의 숙청을 단행하고, 왕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정비를 추진하였다. 특히 영토의 확장에 따른 지방조직의 정비가 주목되는데, 신문왕 5년(685)에 완성된 9주와 5소경의 제도가 그 중심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2년 앞선 신문왕 3년(683)에 보덕왕 안승을 불러 소판(3등 관계)으로 삼고 김씨의 성을 주어 서울에 머물게 함으로써 중앙의 진골귀족으로 편입하였다. 다음 해(684) 안승의 조카뻘(族子)되는 장군 대문(大文)이 보덕국의 해체에 반발하여 금마저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고, 남은 무리들은 관리를 죽이고, 성읍을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문왕이 파견한 군사들에게 토벌되고 성은 함락되었다. 그런데 이 전투는 상당히 치열했던 모양으로 신라군의 당주 핍실(逼實)과 김영윤(金令胤) 등이 전사하였는데, 특히 김영윤은 김유신의 족하이자 김흠순(춘)의 아들이었다. 함락 뒤에 그곳 주민들은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기고, 그 땅을 금마군으로 삼았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87호 / 2021년 6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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