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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제임스 서버의  ‘월터 미티의 이중생활’

  • 박사의 서재
  • 입력 2021.06.08 10:15
  • 수정 2021.06.09 10:15
  • 호수 1588
  • 댓글 0

공상으로 알게 된 두 번째 화살의 힘 

자신만의 상상세계를 구축한
20세기 미국 최고 유머작가가
현실과 공상 세계 매끈히 연결
이곳에 진짜 행복 있음 알게 해

‘월터 미티의 이중생활’

“마크 트웨인을 잇는 20세기 미국 최고의 유머작가, 만화가”라는 평이 무색하지 않은 제임스 서버는 공상의 전문가다. 어린 시절 형제들과 빌헬름텔 놀이를 하다가 화살을 눈에 맞아 한쪽 눈을 실명한 그는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를 구축해냈다. 그가 이후 신문사에서 기자로 재직하며 그림을 그리고 뮤지컬 대본을 쓰고 단편소설을 쓴 바탕에는 그가 공상으로 만든 세계가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유머러스하고 기발한 한편 어딘가 어둡고 아이러니한 세계가. 

그가 완벽한 환상의 세계를 창조해냈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현실 또한 생생하게 묘사한다. 단편 ‘월터 미티의 이중생활’은 그가 현실과 공상의 세계를 어떻게 오갔는지 잘 보여준다. 이질적인 두 세계는 매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월터 미티의 이중생활’의 주인공은 초로의 남자인 월터 미티다. 그의 일상은 초라하다. 잔소리꾼인 미티 부인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꼬투리잡고, 점점 늙어가면서 건망증도 심해지고 실수도 잦은 그를 주변 사람들은 다 비웃는 것 같다. 원대한 이상을 이루는 일 따위는 너무나 멀다. 그는 사오라는 강아지 과자를 잊지 않고, 끼라는 장갑을 끼고, 주차 실수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벅차다.  

그러나 공상 속의 그는 영웅이다. “해군 비행 역사상 20년 만에 맞은 최악의 폭풍을 뚫고 비행하는 SN202호”를 지휘하는 중령이기도 하고, “백만장자 은행가이자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한 친구인 맥밀런씨”의 심각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명의이기도 하다. 심지어 새 마취기계를 만년필을 이용해 임시방편으로 고칠 수 있는 기계 전문가다. 그뿐이랴, 오른팔을 깁스한 상태에서 “어떤 종류의 총기로든” “왼손을 사용해서 그레고리 피저스트를 90미터 밖에서 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재판정의 피고인이기도 하고, 미친 듯이 쏟아지는 포격을 뚫고 브랜디를 마시고 샹송을 흥얼거리며 탄약고를 폭격하러 가는 폭격기 조종사이기도 하다. 

그는 공상을 통해 현재의 초라함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공상 때문에 실수를 하기도 한다. 폭풍을 뚫고 날아가는 비행기 속의 자신을 공상하다 차 속도를 지나치게 높여 부인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수술실의 자신을 상상하다 주차장에 반대차선으로 진입하기도 한다.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공상은 자신의 현실을 더더욱 궁색해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에게 유해하다. 멋지고 늠름한 자신을 상상하다 현실로 돌아오면 그곳에는 혼자서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옹졸한 남자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당시 대공황 이후 침체되었던 남자들에게 대단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가히 ‘월터 미티 신드롬’이라 할만했다. ‘월터 미티’라는 말은 사전에 등재되기까지 했다. ‘터무니없는 공상에 빠진 사람’이라는 뜻의 보통명사로. 

상상과 공상의 순기능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이 만든 모든 문화와 예술은 상상력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상은 한편에서는 두 번째 화살로 작동하며 고통을 가져다준다. 공상은 현실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생각 속에 빠져들어 현재를 도외시하거나 현재의 상황에 염증을 느끼게 한다. ‘생각’이 어떻게 고통을 만드는가에 대해 부처님은 그 작동원리를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월터 미티가 능숙한 솜씨로 주차하는 주차장 관리인이나 견인차를 타고 와 그의 실수를 미소를 띠며 바라본 젊은이를 “잘난 척한다”며 못 마땅해 할 때, 그는 이미 고통의 두 번째 화살에 찔려있는 셈이다. 

그러나 공상은 힘이 세다. 작은 실마리 하나만으로도 곧 공상 속으로 빠져드는 월터 미티의 모습은 무척 친숙하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이 짧은 단편에 열광했을 것이다. 공상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무력함을 외면하고 이곳이 아닌 곳에서 짧은 행복을 맛보는 일이란 얼마나 달콤한가.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안다. 진짜 행복이 있는 곳은 바로 지금 이곳임을.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88호 / 2021년 6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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