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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금강암 주지 정만 스님

“험한 여행길서도 나눌 줄 알아야 성자요 보살입니다”

쌀 석 되·고추장 하나 취약지구 영도 대원사
17년 중창불사 회향하며 도심 중심사찰로 ‘우뚝’
강직했던 은사 벽파 스님 모습 온전히 닮고 싶어
99번 참아도 100번 째 실패하면 참지 못한 것

매년 5000만원 장학금 암자 규모로는 메머드급
청년·교도소 법회·노인봉사 36년 역사 마야회 모범적
“우리 필요로 하는 사람과 직접 마주해야 하는 시대”

금강암 주지 정만 스님은 “‘법구경’에는 험한 여행길에서 자기보다 남을 위하고, 조금이라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성자요 보살이라고 했다”며 “금강암 신행단들이 올곧게 그 길을 걷고 있어 참으로 고맙다”고 전했다.

‘산문에 발 멈추니/ 극락이 저만치 속세에 있는데/ 이끼 낀 섬돌/ 닫혀진 법전(法殿).// 열두 돌층계를 올라가면/ 먹장삼 엎드린 비구 있어/ 여기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득히 들려옴직도 한 발자취 소리. …’(박기원 시 ‘범어사’ 중에서)

범어사 대웅전·관음전·3층석탑의 도량과 계곡을 구분하는 돌담길 끝나는 곳에 너덜겅이 있다. 절 입구 등나무 군락지부터 범어천을 따라 금정산성 북문으로 이어지는 폭 70m·길이 2500m의 암괴류다. 이런저런 크고 작은 바위들이 20여만m²에 널려있는데 옛 선지식들은 일러왔다. 

‘솟아 있는 저 바위 숫자만큼의 선지식이 출현할 것이다.’ 

범어사에 거는 기대이자 ‘정진하라’는 무언의 암시다. 
 

은사인 벽파 스님(왼쪽)과 정만 스님.
은사인 벽파 스님(왼쪽)과 정만 스님.

너덜겅 중턱께 자리한 금강암에 주석했던 동주당(東洲堂) 벽파(碧坡·1939∼2001) 스님도 그 대암(大巖)의 하나였다. ‘선사의 평소 성품을 돌아보건대 근엄하면서 청렴결백하여 의(義) 아닌 것에 몸을 굽히지 않고 검약에 편안히 하셨으며 평정한 마음으로 일에 응하고 공평함에 일관하여 조금의 사곡(私曲)도 없었으며 진실 되고 성실함에 바탕이 되어 허위를 엿볼 틈이 없었다’는 그 벽파 스님이다. 시자가 이른 아침 찻물 한 번 갖다 드리면 저녁 공양 때까지도 다시 찾지 않았던 스님. 복잡한 절 일 생기면 사중은 벽파 스님을 찾았고, 그 일 갈무리 되면 그 어떤 소임도 내려놓았다고 한다. 범어사 주지 세 번 맡으면서도 총 임기가 4년도 채 안 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다. 그 짧은 기간에도 지금의 사격 토대를 닦았던 벽파 스님이다.

범어사 최초의 선원인 금강선사(金剛禪社·1899)를 열었던 암자이지만 100년에 가까운 세월에 쇠잔해졌다. 은사의 바람을 읽은 상좌 정여 스님이 8년간의 중창불사를 통해 사격을 일신시켰다.(1991) 그로부터 얼마 후 정여 스님은 “할 일 다 마쳤다”는 듯 바랑 메고 쌍계사로 걸음해 3년 결사에 들어갔다.

그때, 벽파 스님은 정만 스님을 불렀다.

20대 초인 1975년,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과 자주 참배했던 제주 관음사로 들어가 삭발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출가했던 건 아니다. “그냥, 출가하고 싶어서”다. 행자생활만도 2년이었지만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버티고 사미계를 받았다.(1977) 법주사, 백양사, 봉선사 등의 강원에서 정진한 정만 스님은 불국사승가대학을 졸업했다.(1981) 

“금강암을 맡아야 하지 않겠는가?”
“죄송합니다. 지금은 대원사를 떠날 수 없습니다.”

부산의 영도 대원사 주지를 맡았던 건 1980년대 초반이었다.(1983) 165m²(50평) 남짓한 땅에 인법당 하나 덩그러니 있었는데 이것이 법당이자 숙소이고 공양간이었다. 해우소 하나도 변변치 않았다. 절 맡은 스님이 더러 있었으나 오래 버틴 스님이 없었다. 8년째 주지를 맡고 있었지만, 절은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신도들만 절에 남겨두고 ‘유복’한 금강암으로 떠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알았네. 그 원력 꼭 성취하게.”

대원사로 돌아와서는 주지 소임 직후부터 해 온 관음정진에 더 힘을 쏟아부었다. 신도들은 조용히 지켜만 보았는데 그 시선 속에는 ‘저 스님도 곧 다른 절로 갈 것’이라는 의심과 원망이 서려 있었다.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으나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대원사를 향한 신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청량한 목탁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5년 이어지니 정만 스님을 바라보는 신도들의 시선이 따듯해지기 시작했다. 

2000년 은사 벽파 스님의 ‘명’이 다시 떨어졌다. 

“이제 금강암을 맡아야 하지 않겠나!”
“예. 큰스님 말씀 따르겠습니다.” 

금강암 숲길이 청아하다.
금강암 숲길이 청아하다.

낙후 지역이었던 영도는 점차 큰 도심으로 변모한 해갔고 대원사는 그 궤적에 따라 그 도시의 중심사찰로 거듭났다. ‘이제 누가 맡아도 별 탈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에 떠날 수 있었음이다. 금강암 주지로서의 정만 스님 발길이 암자에 닿기 전 벽파 스님은 큰절로 내려갔다. 제자를 위한 은사의 배려였을 것이다. 

1980년대 초반 부산 영도는 생활환경 취약 지구였으니 절도 가난했을 터다.   

“처음 절에 들어서서 공양간을 살폈습니다. 쌀 석 되, 고추장·된장 단지가 절 살림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머무는 공간이고, 이 절을 지켜내려는 신도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곧기로 정평 났던 선지식 벽파 스님에 대한 회상을 청했다. 

“은사스님을 떠올릴 때마다 ‘법구경’의 한 구절이 스쳐 가곤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즐거운 일이 생기든 괴로운 일이 일어나든 연연하지 않는다. 큰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칭찬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저는 은사스님께서 화내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은사스님의 모든 모습을 닮고 싶었습니다. 은사스님의 가르침으로 급한 성격은 좀 누그러졌습니다.” 

벽파 스님이 주지 소임 보고 정만 스님이 재무국장을 맡았던 때다. 사찰 재정을 살피다 보니 요사채나 암자에서 기름·전기·전화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 

“쓰지 않는 방의 불은 가능한 꺼주세요. 꼭 필요한 일 아니면 전화 사용도 자제해 주셔야 합니다.”

사중 회의 때마다 불만에 찬 ‘큰 소리’가 나오곤 했는데 30대 후반의 정만 스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느 날, 은사스님께서 저를 조용히 부르시고는 한 마디 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왜 자네는 자기의 길만 고집하는가. 올라가는 길만 있는가? 내려가는 길도 있고, 둘러 가는 길도 있네. 본인이 고집한 길로만 가려 하니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 아닌가.’ 금세 고쳐진 건 아니지만 가슴에 새겨두고 잊지 않으려 하다 보니 변화가 있었습니다.” 

동산 스님의 좌우명이었던 ‘견디고 참고 기다려라’라는 ‘감인대(堪忍待)’를 올곧게 실천한 분이 벽파 스님이다. 정만 스님도 그 감인대를 새롭게 새겨가고 있다고 했다. 

“자비는 인욕에서 비롯됩니다. 참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참는 법을 익혀가야 합니다. 99번을 참았어도 100번째 참지 못하면 결국 참지 못한 것입니다. 그 한 번이 보살과 마구니. 성자와 살인자로 가름할 수 있습니다.”

금강암 대자비전과 선혜당.
금강암 대자비전과 선혜당.

금강암은 자체적으로 조직된 신도단체가 여느 암자와는 달리 유독 많다. 마야회, 연등회, 세등회, 들국화회 등이 대표적이다. 저마다 특색 있는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마야회는 2019년 부산불교대상 우수상에 선정됐다.

“금강암 마야회는 1985년 오륜직업학교 청소년법회를 시작하며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부산교도소 정기법회와 무기수 환갑 잔치상과 서동 무료급식소 봉사는 물론이고 통도사 자비원 어르신 목욕봉사에도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험한 여행길에서 자기보다 남을 위하고, 조금이라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성자요 보살’이라 했습니다. 마야회를 비롯한 금강암 신행단체들이 올곧게 그 길을 걷고 있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올해 5월에는 금강암 장학회가 부산불교대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장학회는 정만 스님과 신도들의 원력으로 2010년 3월 설립됐다. 부처님오신날 봉축 연등공양금과 금강암 장학회·천호식품 창업자 부부의 보시금 등으로 조성한 5000만원을 해마다 저소득계층의 청소년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한 암자의 장학기금 규모로는 매우 큰데 조계종 공익기부법인 아름다운동행을 통해 전달하며 공정성을 더했다. 종교나 학업성적과는 무관한 장학금 수여 기준도 이채롭다.

“점심을 굶는 초등학생이 있습니다. 성장기 아이 때 입은 상처는 작아도 깊습니다. 당장 100만원이 없어 대학 공부를 중단하거나 포기하는 청년도 있습니다. 장학금 전달할 때 당부하곤 합니다. ‘사회로 나아가 직장을 얻으면 적은 액수라도 장학단체에 기부하시라!’ 이제 사찰 짓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살펴가며 힘들어하는 사람과 직접 마주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전언에 따르면 정기·특별법회 즈음이 아니면 금강암 주지 스님을 금강암에서 뵙기는 어렵다고 한다. 주로 은해사 서운암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3년 전 화엄사 회주 종열, 은해사 전 주지 돈관, 도선사 주지 도서 스님과 정만 스님이 힘을 합해 허물어져 가는 서운암을 새로 세웠다. 그 후부터 바랑은 금강암보다 서운암에 내려지는 일이 많아졌다. 

“사찰 살림을 전담해 살피는 단체부터 봉사와 법회를 이끌어가는 단체까지 포진해 있는 암자입니다. 불심 깊은 신도님들이 주축이 되어 모든 불사들을 능동적으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한 치의 욕심도 서려 있지 않은 도량입니다. 제 역할은 어딘가 막혔을 때 뚫어주는 정도입니다.”

오랫동안 다져온 사찰재정 투명화가 다져진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주지 스님이 사찰을 비운다는 게 예사롭지는 않다.  

“서운암에 머무르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제가 손수 빨래하고, 풀 뽑고, 마당 쓸 수 있다는 겁니다. 공양은 큰절에 하니 대중생활 하는 맛도 있습니다. 저는 그게 참 좋습니다. 그래서 서운암으로 자주 가는 가 봅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고 싶은 것이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관음사를 찾은 연유이기도 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정만 스님은
1975년 제주 관음사로 출가해 1979년 구족계를 받았다. 1981년 불국사승가대학을 졸업했으며 범어사 부주지와 조계종 총무원 총무·재무·호법부장과 기획실장,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 등을 역임했다. 부산 영도 대원사를 중창한 후 2000년 금강암 주지 소임을 맡았다.

 

[1591호 / 2021년 6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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