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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룡사 회주 정우 스님

수행은 죽음의 가치를 진정한 삶의 가치로 전환하는 노력입니다

수행자가 되는 것은 생사의 괴로움과 번뇌속박 끊으려는 것
부처이며 법이며 법신이 상락아정에서 말하는 열반 속의 나
우리는 업력중생이지만 원력을 가지고 보살의 삶을 살아야

오늘은 백중 6재 법회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백중은 하루 기도로 끝내는 것이 보통이었고 오래 하면 일주일 동안 기도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찰에서 49일간 기도를 하게 됐고, 또 100일간 기도하는 사찰도 종종 있습니다. 49일간 혹은 100일간 기간을 정해 지장기도를 하면서 돌아가신 분들을 축원하며 스스로 정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서산 스님의 ‘선가귀감’에는 “출가해서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하는 것도 아니요,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기 위해서도 아니다. 명예나 재산을 구해서도 아니다, 오로지 나고 죽는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며 번뇌의 속박을 끊으려는 것이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곧 출가해서 수행자가 되는 것은 부처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고, 고통과 괴로움을 가진 모든 중생을 건지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저는 열다섯에 출가를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몇 년간 이 절 저 절 부평초처럼 안착하지 못하고 다니다가 서울에서 통도사 강원을 나온 한 스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만난 스님이 저의 은사이신 운조당 홍법 스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은사스님은 49세에 세상 인연을 마치고 1978년 열반에 드셨습니다. 제가 은사스님을 찾아간 해가 1968년입니다. 서울에서 은사스님을 소개해 주신 그 스님은 편지를 하나 써 주고 그때 돈으로 500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경부선 완행열차를 타고 물금역에 내려서 기다리고 있으면 양산 가는 미니버스가 있으니 그것을 타고 양산포교당으로 가라, 거기에서 아침 공양 먹고 통도사에서 오는 버스를 타고 가면 될 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때 용산역에서 물금역까지 열차 비용이 190원이었습니다. 집에 “이제 나를 찾지 마세요”라는 편지를 부쳤는데 우표 비용이 10원 들었고 나머지 돈으로 치약, 칫솔 등을 샀습니다. 대전역에서는 우동도 한 그릇 사 먹었습니다. 통도사에 도착해서 보니 제 손에는 100원이 남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출가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는데, 벌써 어느덧 인생 7학년이 된 겁니다. 이렇게 세상은 자기 혼자 되는 일이 없습니다. 지금도 그때 통도사를 찾아가던 그 마음으로 출가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지 백중이 다가올 때면 자문하게 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수행이라는 것은 곧 깨달음의 완성으로 나가는 과정입니다. 깨달음의 완성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죽음의 가치를 진정한 삶의 가치로 전환하는 노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분은 참선 한 가지만 수행인 줄 압니다. 그러나 수행에는 팔만사천 가지의 방편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계실 때, 부처님에게 쏟아진 다양한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물음에 하나하나 답을 하신 내용이 모여서 경전이 됐습니다. 그중에서 ‘능엄경’을 보면 “맑고 깨끗한 마음이 어둡고 침침한 허공과 만나서 부딪히고 요동치고 흔들리다가 바람 기운 생기고 마찰력에 불기운 생기고 녹은 것은 물기운이 되고 굳은 것은 흙 기운이 됐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맑고 깨끗한 마음이 어둡고 침침한 허공과 만나서 부딪히고 요동치고 흔들리다가 우리가 생겼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이 곧 지수화풍인데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여러분께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20년쯤 지나서 55세쯤 되셨을 때,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나를 보필하면서도 이익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가 있는가?” 그랬더니 부처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제자까지 부처님을 보좌하겠다고 나섭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제자들이 보좌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야기하십니다. “제자들은 지금 나이가 많아서 오히려 보살펴 주는 이가 있어야 하는데 어찌 나를 보좌하겠다고 그러는가.” 

그때 지혜제일 사리불 존자가 관을 해보니 부처님 마음속에는 사촌 동생인 아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난을 찾아가 “부처님께서 아무래도 시자가 필요한데 스님이 가서 부처님을 시봉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난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며 시자를 맡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부처님 처소에 시도 때도 없이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달라, 부처님께서 별도의 공양을 받기 위해 가실 때는 같이 가지 않겠다 등 여덟 가지 조건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여덟 가지 아난의 제안을 모두 허락하시고 함께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열반하실 무렵에는 부처님께서 아난을 칭찬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난은 시도 때도 없이 내 방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나 한 번도 때가 아닌 때 내 방에 온 적이 없다.” 그 무렵 바라문의 승려 500명이 새로운 교설을 갖고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이웃 종교가 찾아온 겁니다. 

바라문 승려들은 이런 말, 저런 말로 부처님께 여쭈어봅니다. “천하에 모든 작용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요즘 식으로 하면 창조설을 묻는 겁니다. 바라문 승려들은 창조신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누구는 있고, 누구는 없다고 합니까?” 바라문 승려들이 반문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살아있는 이는 있다고 하고 수명이 다한 이는 없다고 하기 때문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 바라문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어. 그중에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어떻게 해서 생겼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곡식에 의해서 생겨나고 또 곡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니까 바라문은 또 부처님께 묻습니다. “그렇다면 곡식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곡식은 네 가지 큰 것, 지수화풍에서 생겼다.” 곧 산하대지에서 생겼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수화풍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지수화풍은 허공에서 생겼다.” “허공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허공은 존재와 가지고 있는 바가 없는 데서 생겼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그것은 자연에서 생겼다.” 이때 자연은 광대무변한 우주를 뜻합니다. “자연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열반(涅槃)에서 생겼다.” “열반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열반이라는 것은 교리적으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열반에서 생겼다고 하니까 또 열반은 어디에서 생겼는지를 묻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구나, 바라문이여. 열반은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일이 없는 법이니라.”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하고 정진하고 수행하고 공부합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처음에는 주로 삼법인을 이야기합니다. 삼법인은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입니다. 그런데 성불이라는 대목에 가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이야기합니다. 상락아정은 항상된 나, 즐거운 나, 참 나, 깨끗한 나입니다. 

사바세계, 오탁악세에 있는 우리는 무상한 나, 괴로운 나가 끊임없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닌데도 그것을 나라고 합니다. 현상계는 괴로운 것이고 부정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을 상락아정에 비추어 보면 항상된 나, 즐거운 나, 참 나, 깨끗한 나를 드러내고 발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수행하고 수많은 영가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상한 나, 괴로운 나, 자아, 부정한 내가 아닌 항상된 나는 무엇일까요. 즐거운 나는 열반이고 참 나는 부처입니다. 깨끗한 나는 법(法)입니다. 그리고 항상된 나는 바로 법신입니다. 우리는 항상된 법신불과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열반락과 자아가 아니라 부처인 참 나를 발현해서, 생멸이 없고 증감이 없고 대소가 없는 부처 성품을 발현할 수 있는 내가 되고 함께하기 위해 지금 이와 같이 살아간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반대로 바라문에게 묻습니다. “바라문이여. 중생의 삶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바라문은 이렇게 답을 합니다. “삶은 괴롭습니다. 생로병사 속에 괴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괴로운 줄 아는데 죽음의 괴로움을 어떻게 아는가?” “다른 사람들이 죽으면서 무척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죽음이 괴로움인 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죽지 않고도 죽음이 괴로움인 줄 알 듯 네가 모든 부처님이 나고 죽음이 없는 열반의 경지를 체득해서 영원히 청정하며 항상 즐거움에 머무는 이치를 알았으면 좋겠구나.”

업력 중생인 우리의 현주소가 원력 보살이 되어서 지장보살이 지옥에 가신 것처럼, 관세음보살이 사바세계에 오신 것처럼, 미륵보살이 훗날 이 땅에 오실 것처럼, 문수의 지혜와 보현의 행원처럼 우리도 보살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여러 불자님께 전하고 싶습니다.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인데 하물며 천생연분으로 맺었던 혈육의 정과 이웃의 인연을 저버리지 마시고 늘 함께 기도하면서 회향할 수 있는 불퇴전의 정진을 여러분께 권합니다. 성불하십시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8월15일 부산 홍법사(주지 심산 스님) 대광명전에서 봉행된 ‘불기 2565년 홍법사 우란분절 백중 6재 법회’에서 구룡사 회주 정우 스님이 초청법사로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98호 / 2021년 8월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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