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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불지사 주지 정인 스님

“절로 오는 길은 행복을 찾아 떠난 위대한 여정입니다!”

고등학교 입시서 ‘낙방’ 공부하려 해인사로 출가
초봄 낙숫물 소리에 ‘절에 잘 왔다’ 환희
성철·고산·보광 스님이 “오늘의 정인 서게 해”
‘부처님 삶’ 마주하려 일본서 원시불교 전공
한 달 세 번 45년 설법 부처님 삶에 ‘큰 감동’
일본유학 9년 기간에도 조동종 사찰서 8년 정진
“경전, 법당서 읽어보면 새로운 환희 경험할 것”

불지사 주지 정인 스님은 “기도하러 갈 때도 경전을 지참하기를 권한다”며 “법당에서 소리 내어 읽어가며 음미하다 보면 전에는 그냥 지나친 구절이 가슴에 ‘팍’ 꽂히며 ‘아 그렇구나!’하는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불지사 주지 정인 스님은 “기도하러 갈 때도 경전을 지참하기를 권한다”며 “법당에서 소리 내어 읽어가며 음미하다 보면 전에는 그냥 지나친 구절이 가슴에 ‘팍’ 꽂히며 ‘아 그렇구나!’하는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두 손 모아 귀의, 마음 모아 정진, 지혜 모아 성불’

창원의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불지사 일주문 앞 돌에 새겨진 글이다. 성심과 간절함이 농축돼 있다. 그래서일까? 한 자 한 자 천천히 읽다 보면 세파에 출렁거린 마음도 가지런히 다독여진다. 

‘두 손 모아 귀의, 마음 모아 정진, 지혜 모아 성불’이 세파에 흐트러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두 손 모아 귀의, 마음 모아 정진, 지혜 모아 성불’이 세파에 흐트러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불지사 건물의 이채로운 외관도 눈길을 끈다. 두 날개를 활짝 편 형상으로 마감한 지붕은 시원스럽게 창공을 가르는 극락조다. 법당 내부로는 자연광이 들어찬다. 천장 한가운데를 길게 가르는 천창(天窓)이 품었다가 내려놓은 빛은 불보살님의 숨결과 만나 성스러움을 더하며 곳곳으로 스며든다. 한밤중에 누우면 달도 볼 수 있을 저 천장과 극락조 형상의 지붕을 통째로 뒤집어 보면 한 척의 배, 반야용선이다. 건축주와 설계사의 철학과 감성이 빚어낸 작품이다. 건축주는 이 절을 창건한 정인 스님이다.

불지사 건물 지붕과 천장은 극락조와 반야용선을 형상화해 이채롭다.
불지사 건물 지붕과 천장은 극락조와 반야용선을 형상화해 이채롭다.

경주에 살던 청년은 대학에 가고 싶어 인문계 고등학교 입시에 응시했지만 떨어졌다. 방과 후에나 도왔던 농사가 자칫 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니 큰 바윗덩어리 하나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나름의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경주 남산으로 소풍 갔을 때 작은 절에서 들었던 독경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스님들은 한문을 잘 아시지. 절에 가면 공부할 수 있겠구나!’

‘한문’이 곧 ‘지식’으로 통했던 시대다. 중학교 졸업 직후인 1968년 3월12일 해인사 산문을 열었다. 은사는 보광 성주 스님과 맺어졌다. 불국사, 분황사 등의 유수 사찰을 두고도 합천으로 걸음했던 건 교과서에서 얼핏 보았던 팔만대장경이 떠올라서다. 그 경판에도 한문이 가득하지 않은가.

한 스님의 안내로 처음 들어선 곳은 백련암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50대 중반의 해인총림 방장 퇴옹 성철 스님을 친견했다. 행자와 방장은 함께 앉아 쌀과 돌을 가려냈다. 솥 안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만 듣고도 밥 되어가는 정도를 알아내는 법, “눈 속에서 나온 풀들은 다 나물”이라는 생활지혜도 성철 스님으로부터 배웠다. 

성철 스님을 1년 시봉한 정인 스님은 범어사 강원에 입방했다. 1학년 때 배우는 치문(緇門)을 새기기도 벅찼는데 경율론을 훤히 꿰뚫고 있는 강주(講主) 고산 혜원 스님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어찌하면 천재가 될 수 있습니까?”
“산령각서 1주일 용맹정진 기도를 해보거라. 도인이 나와서 머리 쓰다듬으면 천재된다.”

도반이 가져다주는 공양으로 힘을 비축해가며 정진했는데 3일 만에 회의감이 밀려왔다. 잠을 못 자니 머리가 무겁고 온몸이 뻐근했다. 

‘몸만 망가지는 거 아닌가? 그래도 천재만 된다면…!’

강원을 졸업한 후 부산 영도의 해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범어사에서 해동고등학교까지는 총 네 번의 차를 갈아타야만 닿을 수 있었다. 새벽기도 마치고 서둘러 떠나야 등교시간을 간신히 맞췄다. 등교 첫날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일렀다.

“스님이다. 나이도 너희들보다 더 많다. 함부로 하지 마라!”

학생들보다 정인 스님 스스로가 언행에 더 조심했다. 

동국대를 졸업한 정인 스님은 1981년 4월 아이치학원대학(愛知學院大學) 대학원 종교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1988년 동 대학원 종교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한 후 1989년 3월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에 임용됐다. 중앙승가대에서 30년 동안 후학을 양성한 정인 스님은 2018년 2월 정년퇴임 했다. 현재 중앙승가대 명예교수인 정인 스님은 1991년 창건한 불지사에서 포교에 매진하고 있다. 

16살 나이에 홀로 가야산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첫 느낌이 어땠을까? 

“‘반야심경’은커녕 삼귀의(三歸依)도 몰랐습니다. 반은 일하기 싫고, 반은 공부하고 싶어 택한 길이었습니다. 절에 들자마자 툇마루에 걸터앉았습니다. 낙숫물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습니다. 응달쪽의 지붕에 쌓였던 눈이 봄기운에 녹기 시작한 겁니다. 잠시 후에는 온 전각의 처마에서 물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요한 산사에 울리는 해인사의 ‘낙숫물 전주곡’은 제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음악회였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절은 참 좋구나! 내가 살 곳이다. 잘 왔다.’”

삼천배와 아비라기도에 여념이 없을 터임에도 공양소임까지 보며 1년이나 성철 스님을 시봉했다. 일화가 있을 법했다.

“밥 잘하면 밀감 하나 ‘쓱’ 건네곤 하셨습니다. 밀감이 뭐 대수냐 하겠지만 좀 산다는 시골 마을에서도 라면 한 봉지가 귀한 때였습니다. 신문이나 ‘타임(TIME)’지 등을 찾으러 큰절로 내려갈 때 성철 스님께서 자주 동행하셨습니다. 우편물 품에 안고 백련암 비탈길 오를 때면 앞서가시던 큰스님께서 ‘좀 밀어봐라’ 하셨습니다. 한 손으로 등을 밀어 올리면 오히려 힘을 더 주며 버티니 제가 밀리곤 했습니다. ‘야, 그리 힘이 없나. 중은 말이제, 힘이 있어야 하는 기라 힘이. 알았제?’ 일상에서 전해주신 그 소소한 가르침이 때로는 ‘백일법문’보다 더 귀히 다가오곤 합니다.”

성철 스님이 유독 마음을 두고 지켜보고 있던 스님이 있었는데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가야산 산중에 호랑이 새끼 한 마리 크고 있어!”

고산 스님의 강맥과 율맥을 이은 보광 성주 스님이다. 2020년 조계종 대종사로 추대됐다. 정인 스님은 성주 스님으로부터 전강傳講)·전계(傳戒)를 받았다.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키시는 은사스님이십니다. 통도사와 해인사에서 강주 8년 하시고는 인천 용화사, 칠불선원, 해인사 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일로 하셨습니다. 산중회의 추대로 해인사 주지 딱 한 만기 하시고는 선방으로 곧장 돌아가신 은사스님이십니다.”

고산 스님의 ‘제자 사랑’은 교계에서 정평 났다. 어느 정도였을까?

“제자가 아프면 약을 챙겨주시는 건 물론이고 거동하지 못할 정도면 빨래도 손수 해주셨습니다. 공부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학비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동국대 재학시절. 의자에 앉은 스님이 보광 성주 스님이다. 정인 스님은 왼쪽에서 두 번째.
동국대 재학시절. 의자에 앉은 스님이 보광 성주 스님이다. 정인 스님은 왼쪽에서 두 번째.

동국대 재학 때 민주화운동 대열에 합류했던 정인 스님은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이틀 동안 고초를 겪은 적이 있다. 그때 허리에 무리가 와 디스크가 발생했다.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한 달이 지나도 회복이 안 됐다.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1년이 다 되어가도 나을 기미조차 안 보였다. 고산 스님이 지켜보고는 일렀다.

“쌍계사 가서 기도해라!”

범어사 산령각에서 일주일 용맹정진할 때도 머리 쓰다듬어 줄 도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또 한 번 고산 스님의 말씀을 믿어야 했다. 대웅전 기둥에 등과 허리를 밀착하고는 아주 조금씩 조심스럽게 몸을 낮춰가며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렇게 일배, 이배를 하고 삼배를 올리며 ‘관세음정근’에 전념했다. 100일 정진을 넘어서며 허리 회복에 속도가 붙었다. 1년 만에 천배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염불신앙은 하근기 수행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피는 분명히 내려집니다. 제가 경험한 가피만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희유합니다. 한국 전통 불교문화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외연을 갖고 있고, 가장 파급력이 큰 게 신앙체험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정인 스님은 한국정토학회 회장도 맡은 바 있다.

일본 유학 9년 중 첫해만 오사카 소재의 한국 절 보현사에 머문 이후 8년 동안 아이치현 세토 소재의 일본 조동종 사찰 호우센지(寶泉寺)에서 대중과 함께 생활하며 대학원을 다녔다. 1년에 한 번은 조동종 총본산인 에이헤이지(永平寺)에서 20일 특별정진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일본 전통 수행의 한 갈래를 체득하고자 하는 원력도 있었겠지만, 유학 중 흐트러질 수도 있는 수행자로서의 위의를 지켜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을 터다. 일본 대학원에서는 ‘원시불교’를 전공했다. 

“한국에서 공부할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교주보다는 위인전의 한 인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왜 그럴까? 부처님의 일대기를 소홀히 하는 건 아닐까? 우리나라를 ‘북방불교’ ‘대승불교’라고 한다면, 불교의 출발점인 인도는 어떤 불교가 있으며, ‘소승불교’는 어떤 의미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일본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학계에서는 부처님 탄생에서부터 열반, 그리고 그 후로의 100~150년까지를 원시불교의 시기로 본다. 부처님의 역사적 일대기는 물론 1세대 직계제자들의 활동, 교단성립시의 상황, 경율의 순수한 내용 등이 주된 연구 대상이라고 한다. 기존의 인식이 전환될 만큼의 새로운 사실이나 진리를 마주했을 법하다. 

“2700년 전에 시작된 부처님 일대기에 대한 기록이 오늘날 인도 지명과 대조한 결과 현실로 입증되었다는 부분에서 저는 깊은 감명과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예로서, 부처님이 45년 동안 전법하시면서 안거한 장소와 설법 횟수까지 확인할 수 있는데, 45년 동안 1346회 이상의 설법을 하셨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특별 추가 법회를 연 셈인데, 이는 부처님이 팔순이 넘을 때까지 중생제도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길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길에서 법을 전하며, 길에서 적멸에 이른 그 위대한 여정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중앙승가대 이전 문제가 교계에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한 1990년대 중반 정인 스님은 총무처장을 맡았었다. 총무원과 중앙종회, 중앙승가대의 소통창구는 물론 중재 역할까지 담당해야 했으니 그 고초는 실로 형언하기 어려울 터다. 

“이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갈등의 골이 깊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앙승가대가 한국의 나란다대학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열망은 사부대중 가슴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모여 김포학사에서 현대적 승려전문교육기관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사부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청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어렵고(人身難得) 부처님 법 만나기 더 어렵다(佛法難逢)고 했습니다. 자주 들어 아는 구절이겠지만 자신의 삶을 반추해 가며 사유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깊이를 새삼 절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러 가실 때도 경전을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법당에서 소리 내어 읽어가며 음미하다 보면 전에는 그냥 지나친 구절이 가슴에 ‘팍’ 꽂히며 ‘아 그렇구나!’ 하는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차오르는 환희는 엄청납니다. 절로 오는 길은 행복을 찾아 떠난 위대한 여정입니다. 부처님께서 걸으신 그 길입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정인 스님은
1968년 해인사에서 보광 성주 스님을 은사로 출가. 현재 중앙승가대 명예교수이자 창원 불지사 주지이다.

 

[1598호 / 2021년 8월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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