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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고대불교 - 삼국통일과불교 (16) (6) 불교대중화운동과 일반서민의 교화 - 중

왕실 부름 거부하고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대중교화 시대 열어

혜공은 천민신분임에도 신라 10성에 포함된 대중불교운동의 주역
작은 절에 살며 삼태기 짊어지고 골목에서 포교방편으로 춤을 춰
대안과 원효 거치며 완성…경론 뛰어났으며 신비로운 설화도 전해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됐다. 1964년 오어사 자리에 저수지가 생기면서 저수지 옆으로 옮겨와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됐다. 1964년 오어사 자리에 저수지가 생기면서 저수지 옆으로 옮겨와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라는 27대 선덕여왕대(632~647)에 이르러 국가의 총체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바로 앞선 진평왕대(579~632)는 대내적으로 왕권의 강화와 지배체제의 정비를 서두르는 한편, 대외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성공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평왕은 54년간의 장기집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서 왕위계승 문제로 정치적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왕실과 귀족세력의 타협으로 가까스로 맏딸인 덕만이 즉위하여 선덕여왕이 되었으나, 실제 국정은 여왕을 대신하여 종실의 원로대신 을제(乙祭)가 담당하였고,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 수품(水品)과 대궁・양궁・사량궁 3궁의 관리책임을 맡은 내성사신 용수(龍樹) 등 2인이 권력의 중심세력을 이루었다. 이로써 국정은 귀족공동지배체제인 일종의 과두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앞선 진평왕대 활발하게 추진되던 왕권강화와 중앙행정관서의 정비 같은 지배체제 정비는 전면적으로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사기’ 선덕여왕조에서 재위 16년 동안 단 한건의 왕권강화 조치나 중앙행정관서 정비 같은 정치개혁적인 사실이 단 한 건도 기록되지 않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선덕여왕을 뒤이은 28대 진덕여왕대(647~654)에 군사력과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와 김유신의 연합세력에 의해 활발하게 정치・문화 양면의 개혁이 추진되었던 사실과도 극히 대조되는 것이었다. 이제 선덕여왕은 고대제왕 권위의 두 요소 가운데서 정치적 권력은 상실하고 종교적 신성에만 의지하는 상태였으며, 정치적인 무능에 대한 비난과 노년의 병약으로 시달리던 모습을 전해줄 뿐이었다.

그런데 선덕여왕대의 국가적인 어려움은 정치혼란이라는 대내적인 문제만이 아니었다. 앞서 진평왕대 북쪽의 고구려는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와 국력을 기울인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고, 서쪽의 백제는 성왕이 살해된 이후의 후유증을 수습하는데 급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국경은 소규모의 전투 외에는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덕여왕대는 고구려에서 권신 연개소문이 집권하여 무단통치를 행하면서 신라에 대한 압력을 가중하여 오고, 백제에서 호전적인 의자왕이 즉위하여 신라에 대한 침공을 가열하여 왔는데, 더욱 두 강적이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되자 신라는 국가존망의 대외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죽령 서북의 땅을 요구받았고,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신라왕이 위엄이 없다고 교체를 제의받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귀족들에게 정치를 잘못한다는 비난을 받아오던 나머지 마침내 말년(647)에는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 비담(毘曇)의 반란이 일어나기에 이르렀고, 선덕여왕이 반란 중에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맞고 말았다.

선덕여왕대 대내외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데 불교의 역할에 대한 기대는 컸다. 특히 실추된 여왕의 권위를 회복하고 국가의식을 고취하는데 불교승려들의 활약은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덕여왕대 불교계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은 안함(安含)과 자장(慈藏)이었다. 안함(579~640)과 자장(생몰년 미상) 2인은 신라 10성에 포함된 인물로 진골귀족 출신이었다. 안함의 할아버지는 시부(詩賦) 이찬(제2위 관등), 자장의 아버지는 무림(武林) 소판(제3위 관등)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중국에 유학하여 선진적인 불교를 받아들여 신라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가운데 안함은 안홍(安弘)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데, 진평왕 23~27년(601~605)의 유학을 통하여 남북조를 통일한 수문제의 불교치국책을 받아들여 선덕여왕 전반기에 여왕의 예지능력을 강조하거나(知機三事의 설화), 국가의식을 고취하는 (이웃나라 재앙 진압의 참설) 등의 종교적 신성화에 기여했다. 그리고 자장은 선덕여왕 7~12년(638~643) 당에 유학하여 불교경전과 불교의식 용구를 전래하여 불교교학의 발전과 불교의식의 정비에 기여했으며, 특히 계율의 정비와 교단의 체계적인 관리를 통하여 교단의 커다란 발전을 이룩함으로서 “나라 사람으로서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열 집에 여덟, 아홉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왕실과 귀족사회에 미친 영향이 컸다. 더욱이 당에서 부처사리를 가져와서 왕실불교의 상징물로서 황룡사에 9층목탑을 건립케 하고 “신라국왕은 천축(인도)의 찰제리종족(刹帝利宗族, Kśatriya)의 왕”이라는 진종설화를 유포시킨 것은 선덕여왕의 종교적 신성을 극대화시키는 의의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이 죽은 뒤에 김춘추가 집권하고, 마침내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여 유교정치이념을 채택하게 되면서 불교치국책을 모색하던 자장은 지방으로 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왕실불교의 한계이자 ‘중고불교’의 마감을 상징하는 의미로 평가된다.

왕실불교를 대표하는 안함과 자장 같은 귀족 출신 승려들과 대조되는 인물이 혜숙(惠宿)과 혜공(惠空) 같은 대중불교화운동의 주역들로서 역시 10성 가운데 포함되었다. 진평왕대에 활약한 혜숙은 전호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젊은 시절 호세랑(好世郞)의 화랑도에 속했으며, 한때 안함과 함께 중국 유학을 기도할 정도로 상호 교류할 수 있는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혜공은 천진공(天眞公)이라는 귀족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던 노파의 아들로 태어난 천인 신분이면서 혜숙을 계승하여 대중불교운동을 크게 발전시켰다. 혜공의 아명은 우조(憂助)였는데, 어릴 때부터 영이한 일이 많았고, 자라서도 신이한 행적을 보여 주인 천진공으로부터 성인(聖人)으로 우대받았다고 한다. 그는 뒤에 출가하여 법명을 혜공이라 하고, 한 조그만 절에 살았다. 그는 항상 미치광이처럼 술에 대취해서 삼태기를 등에 지고 길거리(街巷)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부궤(負簣)화상으로 불렸고, 그가 사는 절은 부개사(夫蓋寺)로 불렸다고 한다. 선배격인 혜숙이 시골의 조그만 사찰에 숨어 지냈으며, 진평왕의 부름에 여자의 침상에 누어 자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불응하였던 소극적인 모습에 비하면, 혜공은 직접 길거리로 뛰쳐나가 일반 서민을 대상으로 포교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바뀌어 발전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혜공의 대중화 불교는 일종의 ‘가항불교’로서 왕궁이나 대찰을 중심으로 포교하는 ‘왕실불교’와 대조되었다. 대찰이나 왕궁을 벗어나서 조그만 절에 살고, 미치광이처럼 술에 취하여 삼태기를 지고 골목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는 것은 서민사회 속에 들어가 일반 서민이나 노비들과의 접촉을 위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전도행위는 불교대중화의 용감한 모험이며, 선구적인 불교의 실천운동이었는데, 이러한 보살행의 방편은 다음의 대안(大安)을 거쳐 원효의 행적을 통해 대성되기에 이르렀다.

혜공은 절의 우물에 들어가서 몇 달씩 나오지 않았는데 옷이 젖지 않았다는 기적을 보이기도 하였고, 지귀(志鬼)의 심화(心火)로 발생한 영묘사의 화재를 미리 예방했다고 한다. 또한 당대의 고승 신인종(神印宗)의 조사 명랑(明朗)의 금강사 낙성법회에서는 당시 대덕스님으로 초청받아 비 속을 왔으나 옷이 젖지 않았으며, 열반 때에는 산 중에 죽어 넘어진 모습을 보였는가 하면, 동시에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이기도 했으며, 죽을 때는 공중에 떠서 입적했는데 사리가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았다는 등의 다양한 설화들을 남겨주었는데, 혜공의 이렇게 신이한 행적은 일반 서민들에게는 친근하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신승(神僧)으로 비춰진 모습이었다고 본다. 혜공은 말년에 항사사(恒沙寺, 迎日의 吾魚寺)에 옮겨 살았는데, 그때 원효가 여러 경전의 주석서를 찬술하면서 매번 혜공에게 가서 의심나는 것을 묻고 혹은 서로 농담을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이혜동진조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나눈 농담의 한 예를 전해주고 있다. “어느날 두 분이 시냇가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바닥 위에 대변을 보았다. 혜공이 이것을 가리켜 장난말로 ‘그대가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이다’고 하였으므로 오어사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효 스님의 말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오어사라는 절의 이름에 얽힌 연기설화를 통해 혜공은 대중불교운동의 선구자였을 뿐만 아니라 원효의 선배나 스승으로서 불교경전에 대한 이해수준이 대단히 높은 학승이기도 하였으며, 원효의 불교대중화운동과 함께 불교사상체계의 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혜공은 일찍이 ‘조론(肇論)’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옛날에 찬술한 것이다”고 하여 승조(僧肇)의 후신으로 알려졌다는 전승을 보아 혜공은 특히 인도 중관불교 계통인 삼론종(三論宗)의 사상에 일가견을 가진 불교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원효의 대중불교화운동의 선배로서는 혜공 이외에도 대안(大安)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대안에 관한 자료로서는 ‘송고승전’ 권4 신라국황룡사원효전과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조 2종을 들 수 있는데, ‘삼국유사’의 내용은 서해 용왕이 보내줬다는 ‘금강삼매경’의 배열 순서를 바로 잡아주었다는 사실뿐이어서 행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송고승전’의 원효전이 비록 단편적이지만 행적의 일부나마 전해주는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원효전의 전체 내용 가운데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찬술의 연기설화 부분이 80% 이상를 차지하고 있으며, 찬술 과정에서 대안이 담당한 역할과 행적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금강삼매경론’의 찬술과정과 저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뒤에 원효의 불교사상을 검토할 때에 구체적으로 살펴볼 예정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대안의 불교대중화운동의 행적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송고승전’ 원효전에는 대안이 새로 전해온 ‘금강삼매경’의 순서를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는 내력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서 형상이 특이하고 항상 장터거리에 있었다. 그는 구리로 만든 바루(銅鉢)를 두드리며 “대안”, “대안”이라고 외쳤기 때문에 대안(大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그때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금강삼매경’의 헝클어진 순서를 바로잡아 정리하라는 왕명을 받고, 대안은 궁궐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그 경전을 장바닥으로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경전을 받아 배열하여 8품으로 만들어 돌려주면서 강의자로 원효를 추천하였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다. 비록 단편적인 내용이지만 이 자료를 통하여 대안은 새로 전래한 경전의 순서를 바로 잡아줄 수 있는 뛰어난 학식을 가졌으면서도 장엄한 대찰이나 왕궁을 무대로 하는 화려한 귀족생활을 외면하고 장터거리에서 살았다는 것을 보아 원효가 경소를 저술하면서 종종 자문을 구했다는 혜공과 같은 부류의 원효의 선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형상이 특이했다는 것도 위의를 갖춘 귀족승려들과는 다른 차림이었고, 구리로 만든 바루를 두드리며 “대안”, “대안”하고 외치며 다녔다는 것은 삼태기를 등에 지고 골목거리를 누볐다는 혜공에 견주어지는 파격적인 행위로서 장터거리에서 일반 서민을 대상으로 한 불교대중화의 방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01호 / 2021년 9월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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