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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과 글은 국민 정서의 뿌리다

아침에 조간신문을 읽던 안사람이 묻는다. “여보, 슈퍼 위크가 뭐예요?” “나도 몰라요. 인터넷에서 찾아볼까?” 그래서 결국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매우 좋은 한 주’ ‘정점을 찍는 한 주’를 뜻한다고 나온다. 그래서 신문 기사 내용과 슈퍼 위크의 뜻을 대조해보고 나서 “음, 그런 의미로 이 말을 썼구나” 하고 끄덕거린다. 그렇게 끄덕거리다 보니 갑자기 짜증이 밀려온다. “아니, 나 정도의 사람이 이렇게 뜻을 찾아봐야 할 정도면 누가 쉽게 알 수 있을까? 이런 기사는 누구 읽으라고 쓰는 거야!” 이런 짜증이 일어나는 까닭은 몇 번 이런 일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스터 샷’ ‘팬데믹’ 등 최근 코로나 사태와 관련된 것들만 해도 많다. 그때마다 인터넷을 검색해 뜻을 확인해야 하는 일을 겪었다.

참으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아니 생각해 보니 알겠다. 필자는 우리 국가원수가 외국에 나가서 영어나 중국어로 연설하는 것을 보곤 국가적 자존심을 팽개친 것이라는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우리말과 글이 버젓이 있는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왜 그러는 것일까? 인사말 정도 그 나라의 말로 하면 충분히 예의를 갖춘 것이 아닐까? 국가 원수가 나라말을 팽개치는 것은 우리 전체를 낮추는 사대주의적 태도가 아닐까?

지나친 외국어 남용의 배경에는 이런 사대주의적 발상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도 모르고 남도 잘 모르는 말을 쓰면서 우쭐함을 느끼는 허위의식, 허영의식이 근본에 놓여있다. 그런 잘못된 의식이 결국 언어사용으로 말미암은 소외사태, 힘의 낭비를 불러일으킨다. 필자나 안사람이나 대한민국 평균 수준은 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용어가 횡행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소외시킨다. 바로 전달될 수 있는 뜻을 찾아보아야 하는 시간적 낭비, 힘의 낭비를 낳는다.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정서적 뿌리를 잃게 만든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말 생소하기 짝이 없는 아파트 이름 같은 것들이다. 동네 이름이나 건물의 이름 같은 것들은 내 정체성의 뿌리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자신이 사는 곳의 의미를 알고, 자연스럽게 거기에 동화되면서 사람들의 정서적 뿌리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곳에 함께 사는 이들과의 유대가 튼튼해진다. 그런데 정말로 뜻도 잘 모르겠고 어색하기만 한 외국어 이름은 정서적인 동화를 가로막는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도 소외되어 뿌리 없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경계들이 수없이 있었음에도 왜 이런 사태가 계속되는가? 무책임한 정부, 의식 없는 언론인들에게 일단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든 것과 같은 부작용과 손해를 부정할 수 없다면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 정책적 방향 제시만 있어도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되지는 않는다. 눈 막고 귀 가린 언론의 책임이야 말할 것도 없다. 

완전히 우리말만 써야 한다는 국수주의적인 입장에 서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말이라는 것은 그렇게 억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이렇게 두어서는 안 되는 것 또한 분명하다. 우리의 소통 통로인 말이 어지럽게 되는 것은 참으로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 옛날 공자가 ‘이름을 바로잡는 것(正名)'이 올바른 정치의 출발점이라고 했겠는가? 이름이 바로 서지 않는 결과는 말이 순조롭게 않게 되어 결국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라고 극언했겠는가? 그런데 공자의 뛰어난 제자인 자로(子路)까지도 그런 주장을 하는 공자를 “물정에 어둡다”라는 식으로 평하였으니 말살이의 중요성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금방 그 폐해가 드러나지 않기에 소홀히 하고 적당히 넘어가기 쉬운 문제, 그것이 우리 말살이의 문제이다. 그 때문에 오늘내일 미루다 보면 결국 우리가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지는 상황에 놓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더 늦기 전에 말살이에 대한 올바른 정책적 방향 제시가 있어야 하고, 말살이의 영역과 깊은 관계가 있는 언론이 올바른 외국어 사용의 방향을 정립해야 한다.

성태용 건국대 명예교수 tysung@hanmail.net

[1602호 / 2021년 9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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