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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승가대 전 총장 종범 스님

“부처 종자도 범부 종자도 모두 인연으로 생깁니다”

인연은 무생‧무아‧무법이며 이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깨달음
설법 대요는 ‘인연’ ‘마음’…마음이 깨닫기도 집착하기도 해
부처 종자 심는데 마음 쓰면 온갖 수행공덕 여기서 나올 것

오늘 법문은 ‘부처님의 가르침’,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을 교학이라고 합니다. 교학에서는 부처님 설법의 가르침을 종류별로 나누는데 상당한 노력을 했습니다. 그것을 교상(敎相)이라고 합니다. 그 교상을 판단하고 해석한다고 해서 판석(判釋)이라고 하며 합쳐서 ‘교상판석’이라고 했습니다.

교상판석의 대체적인 내용을 ‘오승차별(五乘差別)’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교상을 종합적으로 판단해보니 다섯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섯이 무엇인가. 인천승(人天乘), 인간과 천상에 태어날 사람에게 하신 법문, 성문승(聲聞乘), 출가 수도자에게 하신 법문, 연각승(緣覺乘), 인연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에게 한 법문, 보살승(菩薩乘), 보살도를 닦는 분에게 한 법문, 불승(佛乘), 부처님의 깨달은 내용을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설법을 하셨는가, 이것을 설법의식이라고 합니다. 설법하는 방식, 설법을 진행하는 차례 등이 설법의식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방식에는 ‘삼전십이항(三轉十二行)’ 법문이 있습니다. 여기서 ‘행(行)’은 순서라는 뜻이기에 ‘항’이라고 읽습니다. 또 ‘법화경’에 보면 ‘삼변설법(三徧說法)’ 의식이 있다고 나옵니다. 이런 것이 설법의 방식입니다. 

‘삼전십이항’은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차처녹야원(此處鹿野苑, 이곳은 녹야원이다.)’ ‘여래전법륜(如來轉法輪, 부처님께서 법의 수레를 운전하셨다.)’ ‘삼전십이항 오인득도적(三轉十二行 五人得道跡, 세 번 굴려서 열두 번으로 하셨으니 다섯 사람이 도의 세계를 얻었다.)’ 이렇게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 법문을 하실 때 세 번씩 하셨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는 시전(示轉), 딱 보이는 말씀을 하십니다. ‘중생에게 괴로움이 있다.’ 이것이 시전입니다. 괴로움에 대해서 생로병사, 우비고뇌 같은 설명이 없어도 상근기는 ‘아, 인생에 괴로움이 있구나’ 하고 즉각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근기는 ‘고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권해야 합니다. 이것이 권전(勸轉)입니다. 하근기는 ‘나는 고통을 알았다.’ 이렇게 아는 사람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증전(證轉)’입니다. 이렇게 고(苦)를 보이고, 고를 알기를 권하고, 고를 알았다는 것을 자신으로 증명하는 방식을 시전, 권전, 증전이라고 해서 ‘삼전’이라고 합니다. 집(集)성제도 ‘번뇌라는 게 있다’는 것을 보이고, ‘번뇌는 끊어야 한다’고 권하고, ‘나는 번뇌를 끊었다’고 증합니다. 멸(滅)도 마찬가지입니다. ‘멸이 있다’고 시전을 하고, ‘멸은 얻어야 한다’고 권전을 하고, ‘나는 열반 적멸을 얻었다’고 증전을 해야 법을 받아들입니다. 도(道)성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닦는 길이 있다’고 보이는 것이고, ‘도는 닦아야 한다’고 권하는 것이고, ‘나는 도를 닦았다’고 증전을 합니다. 이렇게 사성제를 시전, 권전, 증전, 삼전을 해서 열두 번이 되는 것입니다. 

‘삼변설법’은 ‘법화경’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방편품(方便品)에서는 법 자체를 설합니다. 비유품(譬喩品) 이하로는 비유를 설합니다. 그리고 화성유품(化城喩品)에 가면 인연을 설합니다. 인연은 사례입니다. 법으로 설법하고 비유로 설법하고 사례로 설법한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대요(大要), 큰 요점은 무엇일까요? 설법을 연구해보면, 증득한 지혜라고 하는 ‘증지(證智)’가 있습니다.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 ‘증지로 알 바이며 다른 일로는 알 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깨달으면 지혜가 생깁니다. 이것이 증득한 지혜입니다. 그 증득한 세계의 부분을 증분(證分)이라고 합니다. 증지가 이루어지면 가르쳐서 말씀하십니다. 그 교설 부분을 교분(敎分)이라고 합니다. 교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공상(空相), 제법이 공(空)한 모양을 말했습니다. 둘째는 유심소현(唯心所現), 오직 마음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공상’과 ‘유심’, 이것이 교분의 큰 세계입니다. 

여기에서 ‘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보통 사람이 느끼는 공간은 허공밖에 없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간은 허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因緣)을 말합니다. 인연을 공이라고 합니다. 인연이라는 건 인연소생(因緣所生)입니다. 인연으로 난 바입니다. 인연은 ‘말미암는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고, 저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생긴다.’ 그래서 이것, 저것이 다 인연소생입니다.

소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없어지고 인연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어진다. 그래서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인연뿐이다.’ 이것이 인연 공입니다. ‘생기는 자체가 없다. 사라지는 자체가 없다. 죽음이라는 것은 없고 그 죽음을 이루는 인연이 있을 뿐이다. 태어남이라는 것은 없고 태어남을 이루는 인연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인연으로 태어났고 머무는 것도 인연으로 머물고 죽는 것도 인연으로 죽으니까 ‘나’는 없는 것입니다. ‘인연’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연 ‘공’입니다. 

우리가 두루 독송하는 게송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제법종인생 제법종인멸 여시멸여생 사문설여시(諸法從因生 諸法從因滅 如是滅與生 沙門說如是, 모든 법이 인연으로부터 나고 모든 법이 인연으로부터 사라진다. 이같이 사라지고 생기는 것을 사문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모든 부처가 성불하는 것도 법이고, 범부(凡夫)가 윤회하는 것도 법입니다. 부처 종자도 인연으로 생기고 범부 종자도 인연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한 시간 동안 기도하면 그 순간에는 범부 종자가 심어지지 않습니다. 그때는 복덕이 이루어지고 지혜가 이루어져서 부처 종자가 생깁니다. 범종(凡種)과 불종(佛種)이 전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기에 범부도 없고 제불도 없고 다만 인연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제법입니다. 

이 게송의 배경은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부처님을 ‘사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릴 때 외운 게송은 조금 내용이 다릅니다. ‘제법종연생 제법종연멸 아불대사문 상작여시설(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 我佛大沙門 常作如是說, 제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제법이 인연으로부터 사라지니 우리 부처님 대사문께서는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렇게 외웠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게송이 더 외우기 편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외우는 방식입니다. 

결국 모두 인연법(因緣法)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인연법은 무엇인가. ‘공’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생겨도 생긴 것이 없으니까 불생(不生)이고 사라져도 사라진 것이 없으니까 불멸(不滅)입니다. 불생불멸이 공이고 공이 인연입니다. 이것을 알면 바로 해탈(解脫)입니다. 인연을 몰라서 미혹한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인연은 무생(無生)’이라, 생긴 것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또 ‘인연은 무아(無我)’라, 내가 없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인연은 무법(無法)’이라, 법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인연이 형성되어서 일체법이지 인연이 사라지면 일체법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무생법, 무아법, 무법법입니다. 모든 것이 전부 인연뿐이지 무생, 무아, 무법을 통달하면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 무생, 무아, 무법이 인연이라는 것을 누가 아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법이 있는 곳에는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는 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깨닫기도 하고 집착하기도 합니다. 집착하는 것은 범부 종자이고 깨닫는 것은 부처 종자입니다. 집착하는 것도 마음이고 깨닫는 것도 마음입니다. 

마음은 일체중생도 만들고 삼세제불도 만들고 산하대지도 만듭니다. 못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설법 대요는 ‘인연’과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마음을 미혹하고 집착해서 쓰면 범부 종자가 계속 끊어지지 않고, 마음을 관찰하고 공덕으로 쓰면 부처 종자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현상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 현상이 있는 그대로 전체가 마음입니다. 형상과 마음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범부이고, 형상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형상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면 깨달음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형상 없는 곳이 없고 형상이 있는 곳에 마음 없는 곳이 없습니다.

하늘이 있을 때 그 하늘을 보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하늘이 있습니까. 죽음이 있을 때 죽음을 아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죽음이 있습니까. 또 좋아할 때 좋아할 줄 아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좋아할 수 있습니까. 좋아하고 싫어하고, 있고 없고가 전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부처 종자가 점점 성장해서 열매를 맺으면 그것이 구경각(究竟覺)입니다. 모르는 것 없이 통달했다고 하면 마음이 물질이요 물질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이라는 구분도 없고, 물질이라는 구분도 없고, 과거 현재 미래도 없고, 그냥 자재(自在)할 뿐입니다. 갈 때는 가는 것으로 온전하고, 올 때는 오는 것으로 온전하고, 앉을 때는 앉는 것으로 온전해서 자재하고 자재할 뿐이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부처님 법은 ‘공상’과 ‘유심’입니다. 여기서 모든 수행이 나옵니다. 부처 종자를 심는 데 마음을 쓰면 온갖 수행 공덕이 여기에서 다 나오는 것입니다. 또 일체법이 전부 인연 공상이라는 것을 알면 거기에 범부 종자는 심어지지 않습니다. 범부 종자가 심어지려면 경계를 분별하고 집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계를 볼 때 분별하는 마음을 그치고, 경계를 볼 때 경계가 공함을 관찰하면 범부 종자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경계는 없고 마음뿐인 것이 처음 깨달음입니다. 나중에는 경계도 마음도 다 구분 없이 그냥 자재하는 것이 구경각입니다. 

오늘 법문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9월7일 서울 진관사(주지 계호 스님)에서 봉행된 ‘신축년 음력 8월 초하루 신중기도 입재 법회’에서 종범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602호 / 2021년 9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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