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08. 고대불교 - 삼국통일과불교 (17) (6) 불교대중화운동과 일반서민의 교화 - 하

원효, 불교대중화‧불교사상체계 수립 통해 ‘중대불교’ 완성

신분 구분 않고 불법 교화로 생사고통 해결이 대중화운동 취지  
7세기 신라불교 대중불교화운동은 인도 대승불교운동 견줄 사건
염불 실천으로 서방정토 왕생 가능하다는 아미타정토신앙도 확립

원효 스님이 전파한 “염불 실천만으로 극락에 갈수 있다”는 아미타신앙은 대중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섰다. 경주 감산사 아미타불입상.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원효 스님이 전파한 “염불 실천만으로 극락에 갈수 있다”는 아미타신앙은 대중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섰다. 경주 감산사 아미타불입상.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신라는 26대 진평왕(579∼632)과 27대 선덕여왕(632∼647) 때에 국왕의 권위 강화에 기여하는 왕실불교가 완성되어 가는 한편 그러한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성격의 대중화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왕실불교‧대찰불교의 한계와 모순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대중불교‧가항(街巷)불교가 새로 대두된 것이었다. 불교대중화의 선구자로서 혜숙은 시골의 농촌에서, 혜공은 골목 거리에서, 그리고 대안은 시장 장터를 무대로 하여 각각 일반 서민들을 대상으로 불교를 포교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들은 단순한 불교의 포교사‧전도사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 경전의 이해 수준에서도 당시의 일류 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혜숙은 일찍이 왕실불교의 성립에 기여한 안함과 함께 수나라에 유학을 추진하였을 정도로 중국의 선진불교에 관심이 높았으며, 혜공은 일찍이 구마라지바(鳩摩羅什)의 제자로서 중국의 삼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승조(僧肇)의 후신으로 자처할 정도의 교학의 대가였으며, 원효가 여러 경전을 주석하면서 의심나는 것을 묻고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스승이나 선배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대안은 새로 전해진 ‘금강삼매경’의 순서를 배열하여 8품으로 만들어 주면서 강의할 사람으로 원효를 천거할 정도의 경전에 대한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원효의 선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원효가 한 면에 대중포교사‧대중전도사이면서 다른 면에 철학자‧사상가로서의 두 얼굴을 가진 인물로서 불교대중화와 불교사상체계의 수립을 통하여 ‘중대불교’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이들 선구적인 인물들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고, 그들을 계승하여 집대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효의 두 얼굴, 즉 대중포교사와 사상가의 모습이 겹쳐진 걸림이 없는 행동은 ‘송고승전’ 원효전에서 간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일찍이 의상법사와 당에 들어가 현장삼장과 자은의 문하에 들 것을 생각하였으나, 인연이 어그러져 마음을 접고 돌아갔다. 내뱉는 말이 거칠고, 보이는 행적이 괴이하였으니, 어찌하겠는가? 거사처럼 술집이나 창가(倡家)에 들어갔고, 지공(誌公)처럼 칼을 매단 쇠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때로는 소(疏)를 지어 ‘화엄경’을 강의하고, 때로는 금(琴)을 연주하며 사우(祠宇)에서 즐겼다. 때로는 민가에서 자고, 때로는 산수에서 좌선하였다. 마음 가는 대로 근기에 따를 뿐 아무런 정해진 법칙이 없었다.” 또한 원효의 걸림이 없는 무애한 행위 가운데 특히 대중포교사의 모습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서 전해주고 있다. “원효가 이미 계율을 어겨 설총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였다.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無㝵人)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문귀에서 따서) 이름을 무애호(無㝵瓠)라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가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無)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컸던 것이다.” 원효가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고 환속하여 거사가 된 이후 무애호를 쥐고 전국 방방곡곡을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돌아다녀 널리 불법을 알렸으며, 그 결과 가난뱅이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모두 불교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서민 대중교화의 완성을 의미한다. ‘속고승전’ 자장전에서 자장의 교화가 컸음을 서술하는 가운데, 만년 자장이 황룡사 법석에서 ‘보살계본’의 강의를 끝마치자 자장에게 계를 받은 자들이 구름과 같이 많았으며, 이를 계기로 변화하고 분발하는 이들이 열 집에 아홉이었다는 사실과 대조된다. 자장의 교화 대상은 황룡사 같은 대찰의 법회에 참석할 수 있는 귀족들이었음에 비해 원효의 교화대상은 왕궁이나 대찰의 법회에 참석할 수 없는 길거리의 일반 서민들이었다. 7세기 신라 불교계에서의 혜숙‧혜공‧대안‧원효로 이어지는 대중불교화운동은 인도의 고대불교사에서의 재가보살들에 의한 대승불교운동에 견주어질 수 있는 사상사적 의의를 가진 사건으로 평가된다.

한편 원효는 중급 귀족인 6두품 출신으로서 그와 교류한 인물들은 위로는 왕실과 진골귀족, 그리고 아래로는 평민이나 노비에 이르기까지 실로 모든 계층의 출신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리고 출가와 재가의 구분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선 왕실 출신으로는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부자, 그리고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인 요석공주(남편인 金歆運은 태종무열왕 2년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그의 딸은 뒷날 신문왕의 부인이 됨) 등이 있었으며, 삼국통일의 원훈인 김유신과도 교류하여 당의 장수 소정방이 김유신에게 보낸 암호를 해독하여 주었다고 한다. 승려로서는 평생의 도반 관계였던 화엄종의 의상을 비롯하여 열반종의 보덕(普德)‧은사형의 낭지(朗智)‧불교대중화운동의 선배인 혜공과 대안 등의 다양한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런데 원효의 대중화운동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사복(蛇福, 또는 蛇巴) 같은 불운한 사람이나 엄장(嚴莊) 같은 평민 출신의 재가불자들이었다. 그 가운데 사복은 원효의 제자로서 원효와 함께 신라 10성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으며, ‘삼국유사’에서도 ‘사복이 말하지 않다(蛇福不言)’라는 조목으로 입전된 인물이었다. 그는 서울 만선리 북쪽 마을에서 과부의 사생아로 태어났는데, 나이가 12살이 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여 사동(蛇童)으로 불려졌던 장애인이었다. 그러나 뒷날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자, 고선사에 머물고 있던 원효를 찾아 갔는데, 원효가 예를 갖춰 맞이할 정도의 인물로 성장하였다.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시켜 계를 주고, 시체 앞에서 “나지 말지니, 그 죽음이 괴롭도다. 죽지 말지니, 그 남이 괴롭도다”라 고축하는 원효에게 “말이 번거롭다”고 핀잔을 주고, “죽고 나는 것이 괴롭다”고 고쳐 말하게 하였다는 설화를 보아 고승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사복은 어머니의 시체를 업고 지하의 연화장세계로 들어갔다는 전설을 남겼으며, 뒷날 그를 위해서 경주 북쪽의 금강산 동남쪽에 도량사(道場寺)를 짓고 해마다 3월14일이면 점찰법회를 여는 것을 항례로 삼았을 정도의 성인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다음 엄장은 문무왕 때 도반인 광덕(廣德)과 함께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을 염원하던 재가불자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 숨어 살면서 처자를 데리고 신 삼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며, 엄장은 남산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씨 뿌려 힘들여 경작해 생활했다는 것을 보아 계를 받은 승려 신분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뒷날 광덕이 먼저 열반에 들어 서방으로 떠나고, 엄장은 광덕의 처와 동거하게 되었는데, 그녀로부터 육체적 관계를 거절당한 엄장이 번민하던 나머지 원효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에 원효는 쟁관법(錚觀法)을 만들어 이끌어 주어 마침내 서방정토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이 쟁관법은 ‘효사본전(元曉師本傳)’과 ‘해동승전(海東僧傳)’에 실려 있다고 하는데, 정관법(淨觀法)의 오기라는 학계 일각의 견해도 있으나, 원효의 전기에 수록될 정도로 원효가 창안한 독특한 수행방법으로서 쟁(錚) 같은 악기를 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쟁관법의 구체적인 수행방법은 알 수 없으나, 그 근본 목적은 육체의 부정을 관하여 탐심(貪心)을 다스리는 부정관(不淨觀)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상의 사례들은 원효가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평민이나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구분하지 않고, 또한 출가와 재가를 가리지 않고 실로 다양한 인물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특히 사복이나 엄장 같은 불우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전개하던 교화활동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것들이다. 신분을 구분하지 않고 다함께 불법으로 교화하여 생사의 괴로움을 해결해 주려는 것이 그의 대중화운동의 취지였던 것이며, 대승불교 정신을 구현하려는 의지였던 것이다.

한편 원효는 사상가‧철학자로서 대소승의 모든 경전을 섭렵하고 다양한 이설들을 화쟁시켜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하는 한편 전도사‧포교사로서 평민과 노비를 포함하는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교화활동에서는 서방 극락정토에의 왕생을 염원하는 아미타정토신앙을 위주로 하였다. 아미타신앙은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염송하면 아미타불의 중생구제 원력에 의해 죽은 뒤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는 내세신앙이다. 신라에서 이러한 내세신앙은 특히 일반 평민이나 노비 같은 불우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 절을 짓거나 탑을 세우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없었고, 또한 불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도 없었던 이들에게 염불의 실천만으로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아미타신앙은 큰 매력을 갖게 하였다. 특히 끊임없는 전쟁으로 고통 받고 계층의 분화로 소외된 이들과 직접 어울리며 포교하던 교화승, 곧 대중화운동을 전개한 혜숙‧혜공‧대안을 이은 원효의 활약은 7세기 중반 이후 보편적인 신앙으로 아미타신앙을 널리 퍼지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아미타신앙에는 치밀한 불교사상과 교학이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은 더욱 컸다. 

‘삼국유사’에서는 아미타신앙의 사례들을 많이 전해주고 있다. 경덕왕대 삽량주(양산) 근처 포천산(布川山)의 다섯 비구들은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서방 정토를 구한 지 몇십 년 만에 모두 현재의 몸을 버리고 연화대좌에 앉아 서방으로 왕생하였다고 하며, 남산 동쪽 기슭의 피리사(避里寺)의 한 승려는 온 성안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미타불을 크게 염불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염불사로 불렸다고 한다. 또한 포산(包山, 현풍 琵瑟山)의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라는 두 수도자는 서로 격려하면서 각각 암자와 토굴에서 수행하다가 왕생하였다고 하며, 경덕왕대의 월명(月明)은 누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누이와 자신의 왕생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긴 향가인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신라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던 아미타신앙은 염세적인 내세적인 기원보다 현세 긍정적인 경향이 강해 죽은 뒤의 극락왕생보다 현실에서 극락정토를 구현하겠다는 신앙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앞서 든 사례처럼 염불하다가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왕생했다는 설화가 그러한 경우인데. 가장 극적인 사례는 여종인 욱면(郁面)의 왕생설화이다. 경덕왕대 강주(康州, 晉州) 지역의 선사(善士) 수십 명이 미타사에서 1만 일을 기약하여 염불결사를 맺었는데, 아간 귀진의 노비인 욱면이 처음에 참여하지 못하였다가 뒤늦게 가까스로 참가를 허락받아 염불하던 가운데 육신 그대로 법당 천장을 뚫고 왕생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해동고승전’에서는 미타사가 진평왕대의 혜숙이 세운 사찰이었다는 다른 전승이 있었던 것을 보면 욱면의 왕생설화가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아미타신앙의 보편적인 수용은 계층과 지역 사이의 화합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게 하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03호 / 2021년 10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