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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기러기-하 

연기 도리 실천하는 아라한에 비유

법구경에선 세속 꿰뚫는 지혜를
기러기 비상의 날갯짓으로 설명
비구가 돌 던져 비둘기 죽게 해
그가 상해한 건 자기 참된 본질

기러기는 하늘을 높이 나는 자유로운 철새로, 불교에서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무애(無碍)의 동물을 대표한다. 특히 ‘법구경(法句經)’에서 아라한의 지혜가 기러기에 자주 비유된다. 아라한의 품성을 밝히는 ‘나한품(羅漢品)’에서 “마음이 깨끗하고 깊이 생각하며 욕심낼만한 것을 즐기지 않으니 기러기가 제 놀던 연못을 훌쩍 떠나는 것처럼 어리석음의 깊은 수렁을 이미 건넜네”라고 하였다. 철새인 기러기는 연못에 살다가 떠나야 할 때 자유롭게 날아간다. 인연이 있으면 연못에서 노닐고, 인연이 없으면 떠날 뿐이다. 이러한 연기의 도리를 알아서 그대로 실천하는 아라한은 세속에 대해 어떠한 집착도 갖지 않는 불지(佛智)를 구비한 성자를 일컫는다.

아라한을 기러기에 비유한 구절은 ‘법구경’의 ‘세속품(世俗品)’에도 있다. 제175게송에서 “그물을 벗어난 기러기 떼가 하늘을 높이 날아오르듯이, 어진 사람은 악마와 그 무리들을 물리치고 세상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다. 암흑과 같은 세속을 통찰의 눈으로 꿰뚫는 지혜를 기러기 비상(飛上)의 날갯짓에 비유한 것으로, 지혜로운 아라한을 자유롭게 나는 기러기와 동일시하고 있다. 반면 같은 게송의 빨리어 번역은 기러기를 백조로 해석한다. “백조들이 태양의 길을 따라서 초월적인 힘으로 허공을 날듯이, 악마와 그 군대를 물리치고 현명한 이들은 세상에서 벗어난다”라고 하였다. 기러기와 백조는 둘 다 기러기목에 속하지만 엄연히 다른 새이다. 백조(白鳥)의 순우리말은 고니[鵠]이며, 오릿과에 속하는 기러기에 비해 몸이 길고 크다. 고상한 움직임에 순백의 흰 깃털 때문에 행운을 주는 길조로 여겨졌다.

기러기는 한문으로 안(雁)이라고 쓰고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로는 이를 함사(haṃsa)라 한다. 문제는 함사가 기러기뿐 아니라 백조나 거위라는 뜻도 있다는 점이다. 특히 힌두교에서 함사는 백조라는 상서로운 새를 대표한다. 창조신 브라흐마(Brahmā)와 지혜의 여신 사라스와띠(Sarasvatī)가 타고 다니는 바하나(vāhana)로도 유명하다. 인도철학에서 보편아(普遍我)나 최고아(最高我)가 ‘흰 빛’[白光]으로 상징되는데, 백조(白鳥)는 말 그대로 ‘흰 새’이므로 지고한 영혼을 대변한다. 인도인들은 백조가 물 위에 떠 있지만 그 깃털은 젖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초월한 새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유와 물을 구분할 줄 알고 우유만 마신다고 여겨 선과 악, 상(常)과 무상(無常)을 구분하는 영적인 ‘분별력(viveka)’을 갖는 신묘한 새라고 보았다.

그러나 인도에서 백조는 기러기에 비해 흔히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다수의 조류학자들이 함사는 기러기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에서도 ‘백조(白鳥)’를 공물로 바친 기록이 나타나는데, 당시에 ‘백조’는 지금의 고니(swan)처럼 구분된 종이 아닌 단어 그대로 ‘하얀 새(white bird)’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경전에 등장하는 기러기와 백조의 경우도 이를 종의 차원으로 구분 짓기보다는 하얗고 고귀한 새로 보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

‘법구경’은 짧은 함축적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게송들이 설해진 배경과 인연 이야기들이 나타난 경전이 바로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이다. 이 경전에도 기러기 이야기가 등장한다.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머무실 때의 일이다. 평소 돌멩이로 표적을 잘 맞추던 한 비구가 동료 비구들과 목욕을 마치고 날아가는 기러기 한 쌍을 보고 이를 맞출 수 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을 의심하자 돌을 던져 기러기 한 마리를 맞추어 고통스럽게 죽인다. 비구들이 이 사건을 부처님께 고하니 부처님께서는 “손을 다스리고 발을 다스리고 말을 다스리는 최상의 제어자, 삼매에 들어 안으로 기뻐하고 홀로 지내며 만족하는 이, 그를 일러 비구(比丘, bhikkhu)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모든 생명에 대한 한량없는 자비를 베풀어야할 출가수행자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인 잘못을 꾸짖는 내용이지만, 불교에서 기러기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출가자가 상해한 것은 미물이 아니라 자신의 참된 본질일 것이다.

김진영 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purohita@naver.com

[1605호 / 2021년 10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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