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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그냥 가을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벌써 겨울인 듯 기온이 뚝 떨어졌다. 거의 영하권이다. 무엇이든 처음이 더 아픈 것처럼 추위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서둘러 외투를 꺼내 입고 내친김에 목도리까지 걸치고 집을 나선다. 10월에 굳이 추울 것까지 뭐 있느냐고 투덜대면서 출근길을 재촉했다. 때마침 어느 스님이 ‘가을 그냥 가을’이라는 카톡 문자를 보내왔다. 가을은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라도 짧은 편지를 쓰고 싶은 계절인가 보다.

일주일에 두세 번 광화문 사거리에서 남산 한옥마을까지 자자와 포살의 길을 걷는다. 가능하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는 나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도심재개발이란 이름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거리풍경을 보고 놀라면서도 애써 무심한 척 지나친다. 따닥따닥 정겹게 붙어있던 을지로의 공구상가도 어디론가 옮겨 갈 모양인지 가림막을 치고 공사 중인 곳이 많다. 직장인들의 애환이 깃든 추억의 을지로 골뱅이 골목조차 머지않아 사라질 것 같은 분위기다. 

헌것은 새것으로 바뀌고 새것은 다시 헌것이 된다. 무상의 가르침이다. 어쩌면 ‘전통의 보존’이란 그럴싸한 명제는 일종의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편안한 것에 안주하려는 기성세대의 자기-합리화 내지는 자기-정당화를 ‘좋았던 옛날’ 타령으로 포장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막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익숙했던 사물들이 낯설게 보이는 순간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이 오래되었음을 자각한다. 

을지로가 끝나고 충무로가 시작되는 길 언저리에 한때 개봉관으로 이름을 날리던 명보극장이 여전히 터줏대감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외관과 건물의 용도는 크게 바뀐 듯 눈을 어지럽히는 간판들로 어수선하다. 오래전인 1978년의 늦가을 혹은 초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종로 경찰서 부근에 있던 재수학원을 오가며 후암동 삼거리 부근의 독서실에서 숙식하고 있을 때였다. 학원 친구들과 ‘내가 버린 여자’라는 영화를 보러 갔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내가 버린 여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페미니즘적인 제목이다. 한동안 그와 유사한 영화제목이 유행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전언에 따르면 관객의 대부분은 지방에서 올라와 이런저런 사연을 품고 공장이나 술집에서 일하던 젊은 여성들이었다. 극장 안의 숨죽인 흐느낌은 고향에 있는 남동생들에게 학비를 보내야 했던 우리 세대 누나들의 억울한 서러움이기도 했다. 

남자 주인공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이영옥이라는 여배우 이름은 내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갓 20살이었던 나는 멋대로 감정이입을 하면서 온갖 장밋빛 미래를 상상했다. 당연히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과 같은 성공한 인생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다. 그날 명보극장 주변의 골목은 표를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관객들로 인산인해였다. 꾸불꾸불 이어지는 긴 뱀의 형상을 닮은 줄서기가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지고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같은 해 연말 즈음 대학가요제에서 심민경이란 앳된 여학생이 피아노를 치며 뜬금없이 ‘그때 그 사람’을 부르던 모습도 아련한 청춘의 한 장면으로 소환된다. 그해 겨울 서울 시내 음악다방의 DJ들은 김만준의 ‘모모’와 심민경의 ‘그때 그 사람’을 번갈아 가며 잠시도 쉬지 않고 틀어 주었다. 

지난 금요일에 나이 든 대학원생 두 명과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를 다녀왔다. 추적이는 가을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던 산사는 더없이 고즈넉하고 조용했다. 법당에서 무릎을 꿇고 삼배를 올리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했다. 늦은 밤 다시 빗소리가 창밖을 두드린다. 언젠가 청명한 가을 햇살 아래 마라톤 선수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 있던 청하 보경사의 늙은 감나무가 보고 싶어진다. 갑자기 추워졌다고 나뭇잎이 한꺼번에 다 떨어지지는 않는다. 아직은 가을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 않은가. 가을 그냥 가을이란 말이 무작정 좋았던 하루였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06호 / 2021년 10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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