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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불교의 역사를 지운 현장, 天眞菴을 다녀오다

기자명 수경 스님
  • 기고
  • 입력 2021.10.25 13:13
  • 수정 2021.10.27 07:56
  • 호수 1606
  • 댓글 4

[특별기고]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장 수경 스님

전국비구니회 산하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장 수경 스님이 지난 10월19일 경기도 광주시의 가톨릭 성지 순례길 조성 추진으로 논란의 중심이 된 천진암을 답사했다.  스님은 천진암의 한문 표기법이 왜곡된 사실을 직접 확인하며 이에 대한 문제점 지적하는 글을 본지에 기고했다.  편집자

최근 경기도 광주시가 천진암과 남한산성을 잇는 가톨릭 성지 순례길 조성을 추진하겠다는 발표를 하였고, 이에 불교계가 강력히 반발하면서 광주시에 항의 공문을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일이 있었다. 전국비구니회에서도 지난 10월 14일 대책회의를 열어 불교역사가 숨 쉬고 있는 장소들이 가톨릭 성지로 둔갑하는 상황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특히 천진암은 스님들이 이곳을 천주교인들에게 강학장소로 제공하였고, 오늘날 천주교는 이런 사실을 부각시켜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로 추앙하는 새로운 역사를 조성하고 있다.

나는 대책회의를 준비하면서 조만간 천진암 현장답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천진암과 주어사의 가톨릭 성지화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에 대한 불교계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아리담문화원장 송탁 스님의 안내로 10월 19일 몇몇 스님들과 함께 천진암을 방문, 천진암 건설본부장 요셉신부님을 뵙고 그동안 성지화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요셉 신부님은 부드러운 인성을 가진 분이었으며 불교에 대해서도 열린 사고를 갖고 계셨다. 우린 ‘종교인’이라는 공감대 속에서 모두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신부님은 “천진암이 한국가톨릭 발상지로 정비되고 있지만, 가톨릭만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누구라도 편안하게 오갈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특히 “불교 사찰에서 시작된 가톨릭의 역사를 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신의 생각”이라고 했다. 그 말씀을 듣고 궁금해 질문했다. “신부님의 그런 열린 생각이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두 종교가 만난 공존의 장소로 부각시키기 위해 불교계에 기대하는 역할이나 또는 불교계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생각해보신 점이 있을까요?” 그러자 신부님은 머슥하게 웃으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신부님과의 긴 이야기를 끝내고 안내를 받아 천진암 강학터를 답사했다. 계곡을 끼고 우거진 숲길을 한참 올라가니 ‘창립사연구소’ ‘가르멜수녀원’이라는 안내 푯말이 보였고, 우린 창립선조 5위 묘역이라고 안내되어 있는 쪽으로 올라갔다. 길 곳곳에는 이벽,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권일신의 ‘창립선조 5위’의 초상화가 크게 그려져 있었으며, 요사채 자리였던 강학터에는 이들의 강학모습도 그려져 있었다. 이들은 1779~1784년 이 곳에서 강학을 했는데 처음 강학을 위해 찾아간 장소는 천진암이 아닌 주어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장소가 협소해 주어사 스님이 직접 앵자봉을 넘어 천진암으로 안내를 해주었으며, 당시 천진암에는 매우 큰 요사채가 남아 있었으나 1/3 정도가 훼손된 상태였고, 스님들도 없었다는 것이 요셉신부님의 설명이었다.

천진암에서 가장 놀라운 장소는 대성당 건설 예정터였다. 대성당 자리는 반반하게 잘 닦여 있었으며,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당을 계획하고 있는 듯 했다. 이곳에 6개의 큰 돌에는 ‘천진암 대성당’이라는 한문을 한자 한자 새겨놓았다. 그런데 절을 나타내는 ‘암자 암(庵)자’를 ‘풀이름 암(菴)자’로 바꾸어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순간 ‘이것이 역사왜곡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주교는 지난 40여 년 동안 천진암 주변의 땅 38만평을 매입해 가톨릭 성지 조성을 진행해왔다. 이로 인해 천진암이 가톨릭계의 사유지임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천진암 터를 죽 둘러보면서 이제 와서 불교계가 천짐암에 대한 가톨릭 성지화를 막을 길은 없어 보여 참으로 착잡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절을 상징하는 ‘암자 암’자를 ‘풀이름 암’자로 슬쩍 바꾸어 의미 없는 이름으로 만들어버린 이것은 이곳이 절터였음을 숨기는 불교역사지우기이며, 역사왜곡이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천진암의 한문표기를 바꾼 것이 수원교구의 자의적인 결정인지, 아니면 경기도 광주시가 이를 수락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역사란 글자 한 자를 대체한다고 해서 있는 역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닐테지만, 혹시 바꾸어진 한 글자 때문에 장구한 역사를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훗날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었다는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종교인이 할 일도, 행정기구가 마음대로 해서도 안 될 일이다. 불교계 또한 이를 묵과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수경 스님
수경 스님

요셉신부님의 친절함에 감사했던 마음과 달리 천진암을 다녀온 그 날 밤새 자리를 뒤척이며, 庵자가 菴자로 바뀐 것을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1606호 / 2021년 10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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