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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함의 미덕

K-팝, K-푸드, 오징어게임 등의 인기로 인해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릴 적 향수에 젖기도 하고, ‘그때가 좋았지’라고 추억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구슬치기·비석치기·자치기·연날리기 등 어린 시절 놀이문화에 대한 추억도 남아 있지만, 어른들에 관한 추억도 많이 남아 있다.

나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많은 추억이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심부름에 관한 것이다. 물건을 가져오라고 하시거나, 시장에 나가 물건을 사 오라 하실 때마다 아버지는 ‘서너 개, 네댓 개, 대여섯 개’ 등 모호한 숫자를 제시하였다. 어릴 적 나는 그것이 큰 불만이었다. ‘세 개, 네 개’ 이렇게 분명하게 지시하면 정확히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왜 내가 항상 고민하도록 만드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몇 개요, 세 개요, 네 개요?’하고 되물어도 아버지는 다시 ‘서너 개’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나 경험하였거나 경험하고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서너 개, 네댓 개, 대여섯 개’ 등의 모호성이 사라져가고 ‘세 개, 네 개’ 등의 분명하고 명료한 것이 우리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분명하고 명료한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장자’에 나오는 혼돈이의 우화처럼 모호함이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더 잘 유지하게 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서너 개’라고 지시했지만 결국 상황을 판단하여 세 개 혹은 네 개를 결정하는 몫은 나의 것이 된다. 물건의 크기·상태·가격 등을 고려하여 지시한 자의 의도와 목적을 알아서 그 상황에 맞게 결정하고 판단하는 주체는 지시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또 어떠한 일에 대하여 지시한 자와 지시받은 자 사이에 세 개와 네 개 사이의 ‘여지’를 남겨 두게 되어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사들이 제자들을 교육할 때는 의심을 해결하고 해소하는 방식이 아닌, 오히려 의심을 확장하고 의심을 불어 넣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도하였다. 달마를 찾은 신광(혜가)이 “항상 마음이 괴로우니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달마에게 말하자, 달마는 ‘너의 괴로운 마음을 내게 가져오라’라고 되물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를 ‘반질(反質)’이라고 말한다. 질문을 하는 자에게 더 큰 의심을 불어넣어 그 의심을 스스로 해결하게 만드는 것은 선사들의 전형적인 교육방법이다. 또 해답이 없는 질문을 통해 궁극적인 의심-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지점-까지 내몰아서 본성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간화선사들의 전형적인 교육방법이었다.

‘객관적이고 명료한 언어를 통해 합리적인 기준과 원칙을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만들어 제시하고, 모두가 그것을 따르도록 강제해 내면 공정사회가 이루어진다’라는 우리 사회의 신념은 정말 정당한 것일까? 또 소위 ‘선진적’이라는 미명 하에 서구사회의 기준을 통해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소중한 가치들마저 바꾸고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온전한 일일까?

다른 분야는 고사하고서라도 교육의 영역에까지 갈수록 많은 소위 ‘지침’ ‘교육’ ‘법령’ 등이 쏟아지고 있고, 불필요한 증빙 자료의 요구로 행정적 부담이 커가고 있다. 또 교사(교수)와 학생 간의 자율적이고 친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영역에까지 교육부와 정치권의 간섭과 통제가 심해지고 있다. 정량화되고 수치화 된 ‘평가지표’를 통해 학교와 교사(교수)를 서열화하고 관리와 통제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또 매년 기준이 바뀌고 있어서 적응하기조차 힘이 든다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적어도 교육의 영역에서는 우리의 전통적 교육 방식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가치에 대하여 진지하게 되돌아볼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방룡 충남대 철학과 교수 brkim108@hanmail.net

[1609호 / 2021년 11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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