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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20)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3)

무덤 속 깨달음·요석공주와의 만남은 원효불교 읽는 핵심 키워드

원효 생애 극적 전기 마련 6개 중 유학 시도만 연대 추정 가능
무덤 속 체험과 요석공주는 불교대중화운동 전개 직접적 계기
불교적 의미만 강조하다가 지배세력 관련된 정치적 의미 소홀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보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보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신라 역사에서 원효가 출생한 26대 진평왕 39년(617)부터 입적한 31대 신문왕 6년(686)까지 70년간은 정치적으로 삼국통일이라는 공전절후의 격변기였으며 사상적으로 유교가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대두되고 다양한 불교사상들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모색되던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인 면에서 원효의 청소년기 43년간은 삼국항쟁과정에서, 장년기 16년간은 백제・고구려 멸망과 당나라 세력의 축출과정에서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노년기 11년간은 신라가 통일국가로서의 지배체제를 정비하고 전제적인 왕권을 강화하여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최후 승리자로서의 영광과 긍지 이면에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로 대부분의 주민들이 참혹한 희생과 고난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명암이 교차하는 격변기에 원효는 사회적・사상적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부응하면서 중생들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환희와 고통을 함께 나누는, 실로 걸림이 없는 일생을 보내었다.

원효 생애에 관한 자료는 대부분 설화 형태의 것이기 때문에 확실한 연대를 알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행적의 절대연대는 알 수 없지만, 선후 관계를 고려해 시기는 추정해 볼 수 있다. 원효의 생애 가운데서 극적인 전기를 이룬 중요한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출가와 수업, 둘째 2차의 당 유학 시도와 좌절, 셋째 무덤 속에서의 깨달음, 넷째 요석공주와의 만남과 파계, 다섯째 ‘대승기신론소’의 저술, 다섯째 ‘금강삼매경론’의 저술과 강의, 여섯째 ‘화엄경’의 주석과 절필 등의 사건이다. 이상 6가지의 행적 가운데 절대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650년과 661년 2차에 걸쳐 당 유학을 시도한 사건뿐인데, 그것도 원효 자료가 아닌 도반 관계인 의상의 전기 자료를 통한 추정일 뿐이다. 그 결과 원효는 의상과 다르게 1차의 시도로 그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그 밖의 행적은 절대연대를 알 수 없고, 오직 선후 추정을 통해 불교적 삶과 사상의 변화과정의 이해가 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원효의 행적에서 획기적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사건은 셋째 무덤 속에서의 깨달음, 넷째 요석공주와의 만남과 파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건은 원효불교의 두 축인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 수립과 불교대중화운동 전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효가 당 유학의 길에 무덤 속에서 깨달음을 체험하였다는 사실은 중국 측 자료인 찬영(988)의 ‘송고승전’ 연수(904~975)의 ‘종경록’ 혜홍(1071~1128)의 ‘임간록’ 등에 전하는데, 거의 같은 내용이다. 특히 ‘송고승전’에서는 원효전이 아닌 의상전에서 당시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의상은) 나이 약관에 이르러 당나라에 교종이 성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원효법사와 뜻을 같이하여 서쪽으로 유학하려고 길을 떠났다. 일행이 본국의 바닷가 당주(唐州) 경계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하여 바다를 건너려고 꾀하였다. 중도에서 심한 폭우를 만나서 길가의 토굴 속에 들어가 비바람을 피하였다. 이튿날 새벽녘에 바라보니 바로 옛무덤 속의 해골 옆이었다. 하늘에서는 궂은비가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또다시 무덤 속에서 머물렀는데, 밤이 깊기도 전에 갑자기 귀신들이 놀라게 했다. 원효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제 밤에는 토굴이라 여겨서 편안하였는데, 오늘밤에는 귀신 소굴에 의탁하니 저주가 많구나. 알겠도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닌 것을. 또한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임을. 마음 밖에 달리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리오.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는 바랑을 메고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의상은 홀로 남아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였다.”

원효 일행이 이틀 밤을 묵은 장소는 무너진 무덤 속이었다. 그런데 첫날은 토굴로 알았기에 편히 잠잘 수 있었으나, 다음 날 무덤 속임을 알고 나서는 밤새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종경록’과 ‘임간록’에서는 해골이 있는 무덤 속에 머물렀다는 내용을 시체가 썩은 물이나 해골에 고인 물을 마셨다고 하여 좀 더 극적인 이야기로 변형시켰으나, 근본 취지에서는 차이가 없다. 지난 밤에 달게 마신 물이 아침에 알고 보니 시체 썩은 물이나 해골에 고인 물이었음을 알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를 깨달았다는 일화는 원효불교의 핵심인 일심(一心)사상의 뿌리였다. 종종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다’라고 오독되는 일체유심조의 본래 뜻은 ‘마음이 모든 것을 지어낸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사물 자체에는 깨끗함과 더러움,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이 없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이다. 각자의 마음이 현상계를 만들어내고,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지는 것이다. 원효가 오도송으로 읊조렸다는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라는 표현은 ‘대승기신론’의 생멸인연을 해석한 구절을 변형시킨 것이다. 

“삼계는 거짓된 것이요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일체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잘못 생각하여 생긴 것이어서 일체의 분별은 곧 자기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여 상(相)을 얻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다 중생의 무명망심에 의하여 머물러 있게 되니, 이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가운데 형상과 같아서 실체를 얻을 만한 것이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以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故)”

원효는 당 유학을 시도하기에 앞서 진덕여왕 2년(648) 말에 새로 전해온 현장 번역의 ‘유가사지론’을 읽고 ‘대승기신론’연구노트인 ‘별기’에서, 일심(一心)사상을 바탕으로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인 중관사상과 유식사상 사이의 공(空)・유(有) 대립을 회통시킬 수 있음을 피력한 바 있었다. 그리고 원효는 직접 당에 가서 현장의 신역불교, 특히 신유식을 접해볼 생각으로 진덕여왕 4년(650) 육로를 통해 당 유학을 시도하였으나, 고구려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그 뒤에 백제를 멸망시켜 해로가 활짝 열리게 된 태종무열왕 8년(661)에 해로를 통해 재차 당 유학을 떠났으나, 이번에는 당성진 근처의 무덤 속에서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깨닫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원효의 장년기인 45세 때였다. 원효가 깨달음을 체험한 장소에 대해서는 890년 김영이 찬술한 ‘월광사원랑선사탑비’에 의거해서 당성진으로 가는 길목인 직산 근방 어딘가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 파계한 사건은 무덤 속에서의 깨달음을 체험한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의 불교대중화운동에 일대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무덤 속에서의 깨달음이 원효불교 핵심인 일심사상을 확립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여 준 사건이라면 요석공주와의 만남과 파계는 비구로서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음으로서 출가자 중심 교단에 맞서는 거사(재가보살) 중심 불교를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사건이었다.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서 환속하였다는 설화는 오직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 인용된 ‘향전(鄕傳)’에서만 전해지고 있다. 공주와 승려의 애정에 관한 이야기는 깨달은 성자로서의 면모보다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더 적합한 소재로서 흥미진진한 설화로 민간에 전승되어 온 결과이다. 그러나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출생한 설총(薛聰)이 ‘삼국사기’ 열전에 입전된 사실은 역사적 사실임을 의심치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무덤 속에서의 깨달음에 관한 설화가 ‘송고승전’을 비롯한 중국의 사료에만 기록된 것과 대조된다. 

“성자는 어느 날 일찍이 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련다.’ 사람들은 모두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때 태종무열왕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이 대사가 귀한 부인을 얻어서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로움이 막대할 것이다.’ 이때 요석궁에 홀로 사는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를 시켜 원효를 불러오게 하였다. 궁리가 왕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보니, 이미 남산을 거쳐 문천교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는 궁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고 머물다 가게 하였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을 낳았다.” 

이상의 설화에서 자루 없는 도끼는 과부를 빗댄 것이며, 하늘을 떠받칠 기둥은 임금을 보좌할 현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태종무열왕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만난 시기는 태종무열왕이 세상을 떠나는 즉위 8년(661) 6월 이전이었다. 그리고 원효가 당 유학의 길에서 깨달음을 체험하고 되돌아온 때도 같은 해였다. 이 두 사건을 종합해 볼 때 이전부터 불교대중화운동으로 일반 서민들에게 친숙해 있던 원효가 드디어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소문은 대중적인 환호를 불러일으켰고, 급기야는 태종무열왕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태종무열왕은 전해에 백제를 멸망시킨데 이어 고구려 정벌을 서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들의 지지와 협력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다. 더욱이 방계 귀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치개혁을 추진하던 국왕과 왕실의 입장에서, 거리낌 없는 행동으로 교단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물로서 원효를 주목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하여 신분의 높낮이가 다른 국왕의 딸과 6두품 출신의 승려 사이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세상을 한바탕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오늘날 불교계와 학계에서는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의 수립, 무애한 행위와 대중교화 활동의 불교적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국왕이나 지배세력과 관련된 정치적 의미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종무열왕의 주선으로 자신의 딸인 요석공주와 원효가 짝져졌고, 그 소생인 설총이 뒷날 문무왕과 신문왕에게 총애를 받았던 사실은 원효와 중대왕실과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하는 문제이다. 중대왕실을 연 태종무열왕에게는 김유신 누이와의 사이에 문무왕을 비롯한 7명의 적자, 그리고 3명의 서자와 5명의 딸들이 있었다. 특히 딸들 가운데 첫째 딸 고타소랑은 대야성 도독인 김품석과 결혼하였는데, 선덕여왕 11년(642) 백제군에 의해 대야성이 함락당할 때에 부부가 함께 살해당하였다. 다음 둘째 딸(이름 불명)은 나물왕 8세손인 김흠운과 결혼하였는데, 태종무열왕 2년(655) 김흠운이 양산의 조천성 전투에 낭당대감으로 출전하여 전사하였다. 그 다음 셋째 딸 지조는 태종무열왕 2년(655) 김유신과 결혼하여 삼광 등 5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밖에 넷째와 다섯째 딸의 행적은 불명이다. 5명의 딸들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둘째 딸인데, 김흠운과의 사이에 낳은 딸이 뒷날 신문왕 3년(683) 왕과 결혼하여 신목왕후가 되었다. 만약 요석공주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과 동일인이라면 과부가 된지 6년 만에 원효를 만난 것이었고, 설총과 신목왕후는 같은 어머니 소생의 남매 관계가 되는데,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10호 / 2021년 11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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