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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22)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5)

원효와 중대왕실 관계는 아들 설총 활약으로 더 특별해져

원효는 요석공주로 인해 통일주역 김춘추‧김유신 가문과 인척관계
설총은 유교 10현 중 1인 추앙…신문왕 및 상대등 개원 등과 인연
원효와 중대왕실과의 돈독한 관계, 손자 설중업 때까지 쭉 이어져

경주향교 전경. 이곳은 원래 신라시대 국학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며 설총이 국학의 책임자인 경을 역임하며 제자를 양성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경주향교 전경. 이곳은 원래 신라시대 국학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며 설총이 국학의 책임자인 경을 역임하며 제자를 양성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원효는 태종무열왕 8년(661) 45세 즈음 당 유학을 가던 중에 무덤 속에서 깨달음을 체험하였고, 이어 요석공주를 만나서 설총을 낳고 환속하여 거사가 되었다. 그 뒤 문무왕대(661~681) 20여년 동안은 원효 생애의 전성기로 불교대중화운동과 불교사상체계 수립에 매진한 시기였다. 이 기간 쟁관법(錚觀法)을 만들어 엄장(嚴莊) 같은 화전민을 교화했고, 사생아로 태어난 불구의 사복(蛇福)과 어울리고, 그 어머니의 장례를 치러주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전연구에 몰두하여 100종 가까운 저술 대부분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원효의 활동은 이런 대중화운동과 경전연구에 머물지 않고 훨씬 다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정치와 군사 분야에서의 활동도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앞장의 글에서 이미 원효와 중대왕실, 태종무열왕-문무왕 부자와의 관계는 언급한 바 있으나, 정치적 의미를 좀 더 추구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은 것이 자의에 의한 범계가 아니라 태종무열왕이 주도한 정치적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만남은 사적인 연애사건으로만 그 의미를 제한시킬 수 없는 정치적 사건이기도 하였다. 중국불교사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구마라집(Kumārajīva, 344~413, 또는 350~409)은 중국에 전래된 경전들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중국불교사의 발전에 한 획을 그은 구역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원래 승려 신분인 생부와 공주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은 고장(姑藏)에서 전진왕 부견의 명령을 받아 잡으러온 장군 여광(呂光)의 강압으로 구자국의 왕녀를 아내로 삼게 되었으며, 장안에 온 뒤에는 후진의 황제 요흥(姚興)의 뜻으로 현명한 아이를 갖게 하기 위하여 10인의 기녀들과 동침하기도 하였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 인용된 향전에는 원효가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겠는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한다”고 하였고, 태종무열왕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이 스님께서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하고 관리를 시켜 요석궁으로 안내케 하여 설총을 낳게 하였다는 설화를 전해주는데, 이 사건의 주역은 원효가 아닌 국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효의 수수께끼 같은 노래를 듣고 유일하게 그 의도를 간파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두 사람을 만나게 한 사람은 바로 태종무열왕이었다.

이것은 두 사람의 만남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두 사람 사이의 단순한 연애사건 이상의 정치적 사건, 곧 국왕이 주도한 국가의 프로젝트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본다. 이 사건에서 정치적으로 주목할 것은 원효와 중대왕실 사이에 인척 관계가 성립되었으며, 또한 태종무열왕의 처남인 김유신이 다시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과 결혼함으로써 원효와도 동서 관계가 이루어짐으로서 원효는 삼국통일 두 주역 가문과 인척관계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요석공주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 추정되는데, 남편 김흠운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뒤 6년 만에 원효를 만나게 되었는데, 정상적인 혼인형태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없지 않으나, 당시 신라 사회는 재혼이 별다른 하자가 되지 않는 개방된 분위기였고, 불교계는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으며, 그 소생인 설총이 신문왕 때 관직에 진출하고 있었고, 더욱이 뒷날 신라 불교의 10성(聖)에 대응되는 유교의 10현(賢)의 1인으로 추앙되었던 것을 보아 양자의 결합은 중대왕실에 의해 혼인으로 받아들여졌고, 당시 사회에서도 별다른 문제없이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설총의 신분은 골품제도의 규정에 따라 어머니인 요석공주의 진골신분보다 한 등급 낮은 아버지의 신분을 이어받아 6두품에 소속되었음은 물론이다. 설총이 원효를 공경하고 사모하였다는 것은 원효가 입적하자 유해를 부수어 진용을 빚어 분황사에 봉안하고 예배를 드리니 소조상이 돌아보았다는 설화가 전승되고 있었고, 원효가 마지막 머물다가 입적한 혈사의 옆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결국 아버지 원효는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하여 신라불교 10성의 1인으로서, 나아가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되고 있는 반면에 아들 설총은 이두를 집대성하여 유교경전을 해독하고 후생을 양성하여 신라유교의 10현 가운데 1인으로서, 나아가 고려 현종13년(1022)에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에 배향되어 한국 유교사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라불교의 10성과 신라유교의 10현은 그 성립시기가 다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의 10성은 ‘삼국유사’ 동경 흥륜사 금당의 10성조에 의하면,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의 금당 동쪽과 서쪽의 벽면에 소조상으로 봉안된 10인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곧 아도・염촉・안함・자장・혜숙・혜공・원효・사파・의상・표훈 등 중고기 불교의 공인부터 중대 화엄종의 성립 단계까지의 인물들이 선정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10성의 선정과 소조상의 조성 시기는 중대에서 하대로 전환되는 8세기말 9세기 초 즈음으로 추정되며, 신라불교가 전성기를 지나면서 그 이전의 신라 불교사를 종합 정리한 결과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반면 유교의 10현은 ‘삼국사기’ 설총전에 의하면, 최승우・최언위・김대문・박인범・원걸・(왕)거인・김운경・김수훈・최치원・설총 등 10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중대 삼국통일부터 하대 신라가 멸망하기까지 인물들이 선정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10현의 선정 시기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택된 고려 초기 이후로 추정되며, 아니면 최치원을 문창후, 설총을 홍유후로 추증하는 현종대(1010~1031)나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인종대(1123~1146)까지 내려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46, 열전6은 강수・최치원・설총 등 3인의 유학자로 구성되었는데, 문장가와 유학자를 구분하였음이 주목된다. 유학자로는 앞에서 언급한 10현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음에 비하여 문장가로는 강수를 비롯하여 제문・수진・양도・풍훈・골번 등 6인을 열거하여 유학자들과는 구분하였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거사가 된 이후의 정치적・군사적 활동으로 전해지는 구체적인 사례는 많지 않다. 문무왕 2년(662) 당의 장수 소정방이 김유신에게 보내온 암호를 해독하여 신라군을 무사히 귀환케 하였다는 사실이 군사적 활동으로는 유일한 예이다. 한편 직접적인 정치활동은 아니었지만, 문무왕과 원효의 관계, 그리고 원효의 정치적 위상을 나타내주는 사례로는 ‘금강삼매경론’의 저술과 강의 사건을 설명해주는 연기설화를 들 수 있다. 원효의 나이 60세 전후로 추정되는 시기에 왕비의 악성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용궁에서 전해온 ‘금강삼매경’을 강의할 인물로서 원효를 선정한 것은 문무왕이었다. 당시 원효는 불교계의 주류적인 승려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서 앞서 백고좌회의 100명 고승의 선발에서도 제외된 바 있었고, 경전의 강의 날짜에 앞서 주석을 훔쳐가는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강의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방계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문무왕의 강력한 의지와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비록 추상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원효의 정치적 활동을 포괄적으로 설명해주는 자료로서는 800년대 초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薛仲業)이 수립한 ‘고선사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上碑)’를 들 수 있다. 3편으로 조각난 채 발견된 이 비석은 글자의 마멸이 심하여 해독에 어려움이 있으나, 원효의 전기에 관한 자료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비문 내용 가운데 원효의 행적을 4언구의 시로 압축한 사(詞)의 마지막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장쾌한 이야기는 성스러움에 통하였고, 명쾌한 언설은 신이함에 통하였다, 다시 혈사(穴寺)를 중수하여 (중략) 길이 왕궁을 하직하고 경행(經行)으로 도를 즐겼다”고 하여 원효는 성스럽고 신이한 언설로 교화하던 끝에 말년에는 혈사를 중수하고 은거하여 도를 즐겼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원효는 마침내 신문왕 6년(686) 3월30일 이 혈사에서 입적하니 춘추는 70세였다. 문무왕이 즉위 21년(681) 7월에 승하하고 신문왕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감히 귀족세력을 억압하고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정치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하자 원효는 궁궐을 떠나 혈사에서 은거생활을 하던 중 입적한 것으로 보이며, 은거 시기는 신문왕이 즉위하는 65세 전후부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원효와 중대왕실과의 관계는 그의 아들 설총과 손자 설중업까지 이어지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 권46 설총전에는 설총이 31대 신문왕(681~692)과 나눈 대화 내용, 그리고 설중업이 36대 혜공왕 15~16년(779~780) 일본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다녀온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먼저 설총은 어느 해 오월 화창한 날 신문왕에게 화왕(목단)과 백두옹(할미꽃)의 우화를 들려주어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고 정직한 자를 가까이하라’는 가르침으로 왕을 깨우쳐주었다고 하는데, 유교적인 도덕을 기준으로 하는 인사원칙(諷王書)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에 신문왕은 ‘왕자의 계감(戒鑑)으로 삼겠다’고 하면서 설총을 발탁하여 높은 관직을 주었다고 한다. 설총전에서는 관직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으나, 신문왕 2년(682)에 설치된 국학의 총장급인 경(卿)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으로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이 11등 나마~6등 아찬이었기 때문에 6두품 출신인 설총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이었다.

그런데 신문왕은 즉위년(681) 김흠돌 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왕비인 그의 딸을 내치고, 2년 뒤에 새 왕비로 김흠운의 딸을 맞아들였다. 김흠운의 부인은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서 요석공주와 동일인으로 추정되고, 따라서 신문왕의 부인이 된 신목왕후는 설총과는 진골과 6두품으로 신분은 달랐지만, 남매 관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밖에 설총의 행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33대 성덕왕 19년(720)에 조성된 ‘감산사 아미타상조상기’를 찬술한 사실이었다. 이때 설총의 나이 60세 전후로 추정되는데, 그 조상기의 발원 내용 가운데서 불상을 조성한 중아찬 김지성의 부모의 명복과 가족들에 대한 축복에 앞서 국왕(성덕왕)과 이찬 개원(愷元)의 복을 기원하고 있었다. 성덕왕은 태종무열왕의 증손자, 개원은 태종무열왕의 일곱 번째 아들인데, 특히 개원은 삼국통일전쟁에 참여했고, 32대 효소왕 4년(695)부터 성덕왕 5년(706)까지 10년간 상대등을 역임한 중대왕실의 최고 원로 가운데 1인이었다. 이로써 원효는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그리고 설총은 신문왕과 상대등 개원 사이에 특별한 인연을 가지게 된 인물로서 신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대를 이어 중대왕실과의 관계를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14호 / 2021년 12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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