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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뿐 아니라 윤리학 차원서도 불교 가치 입증

1. 연재를 시작하며

불교는 사회규범에 비판적 분석 허용하지 않는 수행문화 특징
계율도 승가 내 도덕규범으로 윤리학 담론으론 발달하지 못해
붓다 가르침 최고 명품이지만 편의성과 유용성 시대에 뒤쳐져

석가모니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법을 설하는 모습을 표현한 부조. 2~3세기 간다라.
석가모니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법을 설하는 모습을 표현한 부조. 2~3세기 간다라.

2022년부터 ‘세상이 묻고, 불교가 말하다’를 연재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답하다’ 대신 굳이 ‘말하다’라는 술어를 사용한 것은 세상의 일에 대해 어떤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상황에서 가장 바람직한 윤리적 선택이 무엇일까를 함께 고민해 보자는 ‘제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연재 제목이 다소 방어적으로 보이게 된 배경이다.

불교윤리학(buddhist ethics)의 역사는 상당히 짧은편이다. 1964년 윈스톤 킹이 자신의 책 ‘열반을 향하여(In the Hope of Nibbāna)’에서 불교와 윤리의 역할에 대한 일반적 물음을 던진 것이 불교윤리학의 효시(嚆矢)였다. 그 후 자야틸레케와 프레마시리, 하말라바 사다티사, 칼루하파나와 피터 하비 등에 의해 학문의 불씨가 전해져 오다가 1994년에 데미언 키온과 찰스 프레비쉬의 주도로 온라인 ‘불교윤리학 저널’이 창간된 이후 다소 활기를 띠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불교윤리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종사하는 학자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이는 불교가 사회규범이나 계율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수행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옳고 그르거나, 좋고 나쁜 것과 같은 윤리적 판단은 기본적으로 분별지의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이에 반해 궁극적 진리는 세속적 분별지를 넘어 초세간적인 무분별지의 경계에서 비로소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감히 그때는 맞았을지 모르나 지금은 틀렸다고 말하고 싶다. 종교가 세상을 가르치던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종교가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종교의 의미가 의심받는 상황이 되었다. 종교도 언제까지나 고상한 클래식 음악만 고집하지 말고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대중음악도 좀 연주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불교교학에서 윤리학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불교가 형성될 무렵의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기원전 5세기경의 인도는 개인의 행복이나 사회의 정의와 같은 윤리학적 담론이 등장하기 어려운 전제군주국가였다. 둘째, 불교는 사회적 삶과 이를 지배하는 법률체계를 거부했던 출가수행자 운동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붓다의 가르침은 마을의 관습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수행자의 종교적 목적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형성, 유지, 발전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승가는 세상과의 접점을 추구하는 윤리학적 담론의 갑론을박이 필요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다만 승가의 화합을 위해 계율의 제정과 위반에 상응하는 처벌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율장은 승가 내부의 문제해결 방식을 집대성해놓은 일종의 도덕규범집인 셈이다. 계율의 정립은 깨달음의 길을 걷는 수행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지 그 자체가 철학하기의 대상은 아니었다. 불교에서 교학의 깊이에 비해 윤리학적 사고에 대한 인식이 낮은 것은 이런 사정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의 윤리학 전통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과거’의 약속 및 도덕규범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은 행위에 대해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하는 의무론과 ‘현재’ 선택한 행위가 ‘미래’의 목적에 비추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따져서 ‘좋거나 나쁘다’고 규정하는 목적론이 있다. 이외에도 도덕적 품성의 계발을 통해 인격적 완성을 도모하려는 전통적인 덕론도 존재한다. 불교윤리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일정 비율 이상으로 골고루 함축하고 있다.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보면 의무론이고, 모든 것을 깨달음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목적론이자 결과주의다. 동시에 불교는 탐진치의 삼독심을 끊고 붓다와 같은 자비심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덕론의 특성도 갖는다. 

많은 불교윤리학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과 유사한 목적론적 윤리학에 가깝다고 해석한다. 최근에는 불교가 지고(至高)의 목적인 깨달음을 달성하기 위해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는 일종의 성품 결과주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불교윤리학의 학문적 특성을 어떻게 규정하든 우리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도덕적 쟁점들에 대한 불교의 관점을 확립하고 이를 실천적으로 적용해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불교가 교학의 탁월성뿐만 아니라 응용규범윤리학의 차원에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불교의 지평을 계속 넓혀 나가야 한다.

이어질 연재에서는 그동안 번역했던 책이나 ‘불교윤리학 저널’ 등에서 흥미를 끌 만한 쟁점을 임의로 선정, 소개할 예정이다. 교학적인 설명에 덧붙여 윤리학적인 해석을 추가함으로써 관련 이슈들에 대한 독자들의 도덕적 판단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불교윤리학적인 논의 자체가 곧 어떤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실제로 삶 속의 윤리적 딜레마는 수많은 서로 다른 고려사항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교학 지식을 각자 상황에 맞게 창의적으로 응용해 봄으로써 개인의 윤리적 판단 능력을 높이고자 하는 시도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다. 비유컨대 붓다의 가르침은 세계 최고의 명품임에 틀림없지만, 청바지나 운동화의 편의성과 유용성은 갖추지 못했다. 온고(溫故)의 가치는 지신(知新)에 있고, 계왕(繼往)의 목적은 개래(開來)에 있다고 본다. 교학을 ‘옛것을 덥히거나 간 것을 잇는 것’에 빗댈 수 있다면, 윤리는 ‘새것을 알거나 올 것을 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후자의 실천에 좀 더 방점이 찍혀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은 불교적 인식의 시대적 변화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좋든 싫든 ‘마음’만으로는 ‘사랑’을 얻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때로는 마음을 ‘표현’하는 선물과 이벤트가 사랑의 메신저가 되기도 한다. 연재하는 동안 불교의 ‘콘텐츠’와 윤리학의 ‘시스템’이 학문적 중도(中道)의 자리에서 만나 ‘불교윤리학’이 한층 더 성숙해져 가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16호 / 2022년 1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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