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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을 궁극적 실체라는 아트만과 동일시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

기자명 이제열
  • 기고
  • 입력 2022.01.17 15:52
  • 호수 1617
  • 댓글 3

[기고] 홍창성 교수의 불성론을 비판한다

홍 교수는 불성이 연기론·무아론·무상론에 위배된다고 주장
‘열반경’ 등 수많은 경전에서 불성을 공성·연기·중도로 설명
심의식 긍정성 드러내 성불 향한 원력 갖도록 하려는 의도

이제열 법사는 “불성은 나지(生) 않았으므로 유무의 성품이 아니며, 유무의 성품이 아니므로 변할 것도 없고 사라질 것도 없다는 것이 대승경전의 일관된 관점이다”고 말했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미륵반가사유상.법보신문 자료사진
이제열 법사는 “불성은 나지(生) 않았으므로 유무의 성품이 아니며, 유무의 성품이 아니므로 변할 것도 없고 사라질 것도 없다는 것이 대승경전의 일관된 관점이다”고 말했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미륵반가사유상.법보신문 자료사진

현재의 한국불교는 난관에 봉착해 있다. 승단의 이미지 실추, 출가자 감소, 신도 수 급감 등 갖가지 요소들이 불교의 앞날을 어둡게 한다. 게다가 내부적으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한국불교의 사상적 기반인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불교 내부로부터 공격을 받아 서서히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가 한국에 유입된 이래 불교 밖의 종교나 사상에 의해 교리를 공격당한 적은 별로 없다. 조선조의 정치가나 유학자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불교를 무지막지하게 탄압했지만 교리를 비난한 예는 흔치 않다. 기껏해야 정도전이 쓴 ‘불씨잡변’ 정도이다. 오늘날 한국에 기독교가 번성해 불교의 교세를 앞지른 지 오래 되었다고는 해도 그들이 불교 교리를 대놓고 공격한 적은 없다. 그런데 근래 한국불교 대승의 교리는 불교를 신봉하는 이들로부터 공격당하고 있다. 바로 초기불교 지상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초기불교의 교설만이 부처님의 원음이라고 규정하면서 대승 교설의 진의를 살펴보지도 않은 채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기형적 불교라고 비판한다. 대승의 법신사상, 정토사상, 보살사상, 유식사상, 공사상 등 거의 모든 교리를 비불설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불성(佛性)이 그중 대표적이다. 불성은 무아설(無我說)에 위배되므로 불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승에서 가르치는 불성은 힌두교의 아트만 사상으로 불교의 근본교리에 벗어난다고 말한다. 정작 대승에서는 불성이 아트만과 같은 성격을 지닌 교설이 아님을 곳곳에서 밝히고 있지만 전혀 아랑곳 않는다.

안타깝게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홍창성 교수도 그리 다르지 않다. 필자가 홍 교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현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이 펴낸 ‘깨달음의 그 역사 그 이후’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였다. 그 후 홍 교수의 불교적 견해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된 계기는 법보신문에 연재한 ‘홍창성의 철학하는 삶’에서였다. 홍 교수는 서양철학의 논리와 사유방식으로 불교 용어와 교리들을 해석하는 방법을 취했다. 홍 교수가 법보신문에 게재한 여러 글들 가운데에 필자의 눈을 가장 의심하게 된 내용 역시 불성에 관한 설명이다. 홍 교수는 ‘불성의 불교적 이해’라는 주제로 자신의 불성관을 피력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초기 불교지상주의적인 시각으로 불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홍 교수는 불성을 언급하기 전에 대승 일부에서 공(空)을 실체화시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교설을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찌 진공묘유가 공을 실체화시킨 교설일 수 있나? 진공에서 진(眞)은 공성을, 묘유에서 묘(妙)는 중도의 의미를 강조한 용어이다. 진공이라 해서 공을 실체화시킨 것이 아니며, 묘유라 해서 유를 신비화시킨 것이 아니다. 진공묘유는 연기와 무아의 교설을 그대로 전승한 대승적 표현방식이다. 일체 만법 그대로가 진공묘유이지 실체화 된 공 속에 형이상학적 유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홍 교수가 최소한 천태교학의 공(空)·가(假)·중(中) 삼제(三諦)를 이해했다면 이런 가벼운 주장은 나올 수 없다. 대승 어디에서도 공을 실체화시킨 적이 없는데 홍 교수는 근거도 없는 논리로 대승의 교리에 톱질을 가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홍 교수는 대승불교의 불성이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다면서 불성은 초기불교의 무아설과 무상설에 위배된다고도 주장했다. 필자는 홍 교수에게 불성이 힌두교의 아트만과 동일하다는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묻고 싶다. 학자라면 자신이 어떤 내용을 비판할 때 정확히 텍스트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 주장은 사견이나 낭설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홍 교수는 초기불교 우월론자들이 그러하듯 객관성이 결여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필자의 안목으로 대승경전 어디에서도 불성을 아트만처럼 실체화시켜 설한 구절을 본 적이 없다. 불성은 나지(生) 않았으므로 유무의 성품이 아니며, 유무의 성품이 아니므로 변할 것도 없고 사라질 것도 없다는 것이 대승경전의 일관된 관점이다. 존재론적 유성(有性)을 강조하는 아트만과는 질적으로 다른 불성을 아트만과 동일시하는 행위는 심각한 오류다. 홍 교수는 ‘열반경’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구절에서 유(有)라는 글자에 집착한 것 같다. 공성인 불성을 유성(有性)으로 보지 않았다면 힌두교의 아트만과 불성이 같다는 주장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홍 교수는 불성이 초기불교의 연기론, 무아론, 무상론에 위배된다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서 필자는 홍 교수가 불성의 기본개념에 대한 이해가 충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불성이 연기론, 무아론, 무상론을 위배했다는 것은 억측이기에 그렇다. ‘열반경’에서 부처님은 가섭존자에게 “불성은 법무아이며 마하반야바라밀이며 십이연기이며 제일의공이며 중도이며 열반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여래가 법무아를 설하니 미혹한 중생들이 이를 단멸로 알까 염려하여 불성을 설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불성이 무아와 연기의 교설을 위배하기는커녕 무아와 연기의 교설을 더욱 명료하게 전승하고 있음을 밝히는 내용이다.

불성이 실체 없는 무아의 성질을 띠고 있다는 점은 유식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을 보아도 명확해진다. 이 경전에서 불성에 해당하는 용어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이 원성실성은 법무아로써 자성이 없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의 마음을 떠나 따로 원성실성의 마음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원성실성을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몸이 허깨비 같은 줄 보면 부처의 몸을 보고, 마음이 꼭두각시 같은 줄 보면 불성을 본다” 하였다. 이는 생로병사하는 몸 이대로가 부처의 법신이며 생주이멸하는 마음 이대로가 불성이라는 의미이다. 어찌 불성이라 하여 연기와 무아와 무상의 이치를 거스르겠는가? 부처님이 발견하신 연기의 진리는 법계에 상주하여 끝이 없는 것처럼 불성 또한 법계에 상주하여 다함이 없다. 불성의 불변불멸은 존재론적 입장에서의 불변불멸이 아니다. 불성을 존재론적 유견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아트만의 불변불멸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종경록’에서 영명연수선사는 “연기의 공성을 중생의 마음에 적용하면 불성이라 하고 사물들에 적용하면 법성이라 한다”고 하여 공성, 불성, 법성이 같은 이치임을 밝혔다. 따라서 홍 교수의 불성이 연기론과 무아론과 무상론을 배척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홍 교수가 불성을 단일체(單一體)라고 보는 입장 역시 수긍하기 어렵다. 대승경전 어디에서 불성을 단일체라고 했던가? 경전에서는 불성을 단일체라고도 복합체라고도 말한 적이 없다. 홍 교수는 대승경전에서 설하지도 않은 내용을 시빗거리로 만들어 공격을 가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중생의 모든 마음은 의타기로 무자성이다. 불성은 바로 무자성을 다르게 표현한 용어라 할 수 있다. 무자성의 불성은 독립적·개체적으로 마음 안이나 밖에 따로 자리하지 못한다. 무자성의 불성은 중생의 육식·칠식·팔식 속에 평등하게 머문다. 마음의 구조를 두고 단일체이니 복합체이니 하고 논리를 세우는 것은 성립이 가능하나, 불성에 대해 단일체이니 복합체이니 하고 논리를 세우는 것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불성은 유무의 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성을 설명하면서 부피 운운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홍 교수는 불성에 관해 새로운 해석으로 전통을 유지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이 또한 위험한 생각이다. 불성을 아트만으로 오인한 채 펼치는 해석이 어찌 온당한가? 더구나 유명론적(有名論的) 입장에서 불성을 해석해야 한다니, 이는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을 전과자로 만든 뒤 사면시켜주겠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홍 교수는 불성을 실재론(實在論)으로 굳게 오인하고 있다. 홍교수의 이러한 오인은 불성을 연기와 무아에 위배된다는 견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불성은 실재론이 아닌데 스스로 실재론이라고 오인하고 이를 유명론으로 바꾸어 놓겠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초기불교에 길들여진 시각에서 불성의 교리는 힌두교의 아트만이나 푸드갈라로 오인되기 쉽다. 무아면 무아로 끝내야지 왜 유론이라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원리나 명칭을 만들어냈느냐고 항변할 수 있다. 긴 대승불교 역사에서 이 같은 항변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대승의 논사들의 고민도 그만큼 깊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불성이라는 개념을 끝까지 전면에 내세웠다. 그 이유는 대승의 깨달음이 소승의 깨달음과 차이가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승과  대승의 교리는 여러모로 성격이 다르다. 그 가운데 무아와 심의식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차이가 크다. 소승에서는 무아를 자아에게만 적용시키는데 반해 대승은 일체법, 나아가 소승의 법성까지도 무아로 보는 ‘법무아’를 강조한다. 이러한 법무아는 중생들로 하여금 단멸의 견해를 짓게 하는데 불성은 이러한 단멸상을 깨뜨리기 위해 설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 소승에서는 중생의 심의식을 다루는데 지나치게 부정적이다. 중생의 마음은 무명과 갈애 등 번뇌의 속성만 지니고 있지 않다. 분명 수행이라는 조건을 만나면 맑아져 부처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대승은 이러한 심의식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 중생들로 하여금 성불을 항한 믿음과 원력을 갖게 하고 궁극적으로 불지(佛智)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불성은 법무아와 심의식의 청정한 속성이 결합한 보다 차원을 달리한 교리라 할 수 있다. 영가선사가 ‘증도가’에서 ‘무명의 실제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라고 불성의 속성을 밝힌 점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이제열
이제열

홍 교수는 진리마저도 논리를 초월할 수 없다는 지론을 펼친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에서 논리는 진리에 들어가는 수단이나 진리를 증명하는 표현 방식은 될 수 있어도 진리 그 자체는 될 수가 없다고 한다. 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뗏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진리는 궁극적으로 사고와 언어가 단절돼야만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대지도론’의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行處滅), 유마거사의 일묵(一黙), 선가의 염화시중(拈花示衆)의 경지를 과연 논리로써 증명할 수 있는지도 숙고할 부분이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1617호 / 2022년 1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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