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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안 당한다

기자명 이병두

뉴질랜드 동쪽으로 6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채텀(Chatham)섬에는 수렵‧채집 생활로 살아가는 모리오리(Moriori)족 수천명이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1835년 11월19일과 12월5일에 마오리족이 두 차례 쳐들어와서 “이제 너희들은 우리 노예이다”라고 선언하며 무차별 공격을 펼쳐, 깊은 산 속으로 숨어 살아남은 극소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민을 몰살시켰다. 당시 침입자인 마오리족보다 모리오리족이 최소한 두세 배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왜 이렇게 쉽게 패했을까?’ 모리오리족이 바깥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데에다, 종족 내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오던 전통이 있어서 ‘침입자와 맞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자원을 나누어 갖자’고 제안하기로 부족회의에서 결정한 뒤 그 내용을 통보하러 가기도 전에 공격을 당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835년 말 채텀(Chatham)섬의 마리오리족만 이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은 특히 배타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한 백인 제국주의자들이 아시아‧아프리카‧대양주‧아메리카 대륙 곳곳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숱하게 벌어졌다. 1531년 잉카 제국이 최후를 맞은 원인과 배경도 마리오리족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백인들이 가져온 천연두에 감염되어 잉카의 전임 황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그들은 바깥세상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편한 마음으로 채 200명도 되지 않는 스페인 군인들과 함께 온 침입자 피사로(Pizarro)가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고 하는 말에 속아 비무장 상태로 그들을 만나기로 하였다. 당시 침략군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아타후알파와 함께 한 잉카 군대는 8만명 정도로 화려한 복장을 갖춰 입고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유지하였다.

피사로는 주변에 군인들을 숨겨놓고 가톨릭 수사를 아타우알파에게 보내어 “하느님과 스페인 국왕의 이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에 복종하고 스페인의 국왕 전하를 받들라”고 요구했다. 수사가 십자가와 기독교 성서를 아타우알파에게 들고 가서 ‘하느님의 뜻’을 거론하자 아타우알파는 성경을 보여 달라고 하더니 그것을 던져버렸고, 이에 수사가 외쳤다. “나오시오! 나와요, 기독교인들이여! 하느님의 일들을 거부하는 개같은 적들을 물리치시오. 저 폭군이 내 성스러운 율법의 책을 땅에 던졌소! 그걸 보지 못하였소? … 내가 죄를 용서해줄 테니 어서 나와서 저 자를 치시오! 산티아고!”(요즈음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가 자주 나오지만 이 ‘산티아고’가 스페인 군대의 공격 신호였음을 아는지 모르겠다.) 이를 신호로 스페인 군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하고 있던 잉카인들을 죽이고 황제를 포로로 잡은 뒤, 대규모 학살 끝에 결국 제국이 몰락하였다.

심지어는 당시 잔혹한 잉카 침략에 참여했던 스페인 장교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잉카 마지막 황제는 왜 피사로가 쳐놓은 덫 안으로 들어갔을까?” ‘외부 세계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던 잉카 제국 지도자들의 ‘정보 빈곤’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멀고 먼 곳에서 옛날에 일어난 일을 왜 거론할까. 1945년 해방 이후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불교계가 정치권력으로부터 탄압과 차별을 숱하게 당한 것도 마리오리족이나 잉카 제국 사람들처럼 ‘바깥세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모르거나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특정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임기응변(臨機應變) 식으로 대처하는 데에 머무르면서 차별과 탄압의 고리를 제대로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살피고, 정부이든 이웃 종교이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어떤 곳인지 정보를 갖추어 대책을 세워 놓은 뒤에라야 자비와 화쟁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외부 세력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난 뒤 후회하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618호 / 2022년 1월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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