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6.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25)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8)

원효는 구유식 공부한 뒤 신유식 접하면서 종합적 불교사상체계 수립

원효의 저술목록 정확치 않고 대부분 사라져 학자마다 편차
원효행적과 당나라 등 국제적 불교변화 통해 저술연대 추정 
당서 귀국한 스님들 영향으로 국제적 성격의 단계로 나아가

경주 분황사에 모셔진 원효 대사 진영.
경주 분황사에 모셔진 원효 대사 진영.

원효의 저술편년을 통해 불교사상의 변화과정을 추구할 때 어려운 문제가 저술의 종류와 분량에 대한 이해부터 혼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원효 저술의 목록작성이 추진되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근거가 된 장소록(章疏錄)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어떤 것에 의거할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목록 작성자의 견해 차이 못지않게 근거하는 자료 자체의 기술이 모호한 곳이 많은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원효의 저술이 몇 부 몇 권이라는 것을 확정할 수 없다. 그 결과 저술의 종류는 72부부터 100여부, 분량은 100여권부터 200여권으로 추정됨으로서 학자에 따라 커다란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 위에 원효 저술 대부분이 일실(逸失)되고, 현재 전해지는 것은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22부에 불과하다. 그 현존본 22부 가운데도 6부는 일부분만이 전해지는 잔편단간이고, 또한 ‘판비량론’(671) 이외에는 저술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원효의 저서의 상호인용 관계, 그리고 현장(玄奘)에 의한 신역경전(新譯經典) 인용 사례의 확인을 통해 저술 연도를 추정해 보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나, 충분한 성과를 내지는 못한 실정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저술편년을 통해서 불교사상의 변화과정을 이해하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보완하는 방법으로서 원효의 행적이 비록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그의 행적과 관련시켜 저술연대를 추정해 보려고 한다. 또한 7세기 신라와 당의 불교교류, 특히 현장에 의한 신역경전의 전래과정, 신역경전으로 인한 당 불교계의 파동과 신라불교계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원효의 저술 연대와 선후관계를 추정해 보려고 한다. 우선 저술연대를 원효의 행적과 관련시켜서 검토할 때 4시기로의 구분이 가능하다.

* 성장기 (617~631, 1~15세 즈음)
① 출가수학과 초기저술 (631~650, 15~34세)
② 신역경전의 전래와 ‘대승기신론별기’ (650~661, 34~45세)
③ 사상체계의 수립과 ‘대승기신론소’ (661~670, 45~54세)
④ 교판체계의 수립과 ‘화엄경소’ (676~686, 54~70세)

이러한 저술시기의 구분은 구체적인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구분 시점은 수정이 요구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기구분을 시도한 것은 원효의 저서를 그 내용과 성격을 기준으로 하여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보고, 각 그룹의 저술시기를 연대순으로 정리함으로서 원효의 불교사상의 변화과정을 이해하려는 의도에서다. 원효는 구역불교를 충분히 이해한 토대 위에 신역불교를 받아들임으로서 7세기 당 불교계를 중심으로 변화하는 동아시아불교사의 역사적 과제를 누구보다 먼저 인식하고 종합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하였다. 나아가 동아시아불교의 형이상학적인 이론체계의 완성으로 평가되는 중국 화엄사상과의 상호영향을 통해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이 완결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필자의 평소 가설을 확인하려는 의지의 소산이기도 하다.

이상의 시기구분 가운데 출가 이전 성장기의 원효 행적은 알려진 사실이 전혀 없다, 첫째 시기인 출가수학기에는 원효가 15세 즈음에 출가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의 출가 동기를 헤아릴 길은 없다. 출가 이후의 수학과정에 대해서 ‘삼국유사’권4 원효불기조의, “배움에 스승을 따르지 않았다(學不從師)”라는 표현과 같이 원효는 일정한 스승을 정함이 없이 여러 선지식을 폭넓게 찾아다니면서 수학하였다. ‘삼국유사’권5 낭지승운조에는 원효가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 영취산의 낭지(朗智)를 찾아뵙고, 그의 교시로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한 뒤 그것을 낭지에게 보내면서 그 책의 끝에 써넣은 게송을 전해주고 있다. “서쪽 골짜기의 사미는 머리 숙여 예합니다. 동쪽 봉우리 높은 바위 큰 스님 전에, 미세한 먼지를 불어 영취산에 보태고, 가느다란 빗방울 날려 용연에 던집니다.” 낭지의 교시로 지은 책 2부를 보내면서 사미로서의 예를 다한 글이다. 낭지는 은둔형의 신승(神僧)으로서 영취산에 오래 머물면서 항상 ‘법화경’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화엄도량인 청량산(오대산)에 구름을 타고 가서 청강하곤 했다”는 설화를 남겼던 것으로 보아 ‘화엄경’에도 밝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삼론학(三論學)에도 조예가 있었던 모양으로, 낭지의 교시로 저술했다는 ‘초장관문’이라는 책의 이름이 삼론학에서 입문의 기초로 삼는 ‘초장(初章)’을 관하는 글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로서 원효는 출가한 뒤 사미의 단계에서 낭지를 사사하여 ‘법화경’이나 삼론학을 수학하면서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저술하였다. 이들 저술은 고려시대까지도 전해져서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권3에도 실렸었으나, 오늘날은 전해지지 않는다.

원효는 ‘삼국유사’ 권4 이혜동진조에 의하면, 영일의 항사사(恒沙寺)에 주석하고 있던 혜공(惠空)을 찾아가 교류하였는데, 여러 경전의 소(疏)를 지으면서 질의하였다고 한다. 혜공은 “늘 미친 듯이 만취하여 삼태기를 지고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웠으므로 사람들에게 부궤화상(負簣和尙)으로 불렸다”는 불교대중화운동의 선구자였는데, 중국 삼론종 조사인 승조(僧肇, 374~414)가 지은 ‘조론(肇論)’을 보고, “이것은 내가 옛날에 지은 것이라고 말했다”는 설화를 남긴 것을 보아 삼론학에 밝았던 것 같다. 혜공과 원효는 서로 희롱할 때도 있었다는 것을 보아 나이 차이를 초월한 교유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원효는 그로부터 삼론학을 배웠고, 그에게 질의하면서 그 분야의 경전을 주석했던 것을 알 수 있으나, 그 저술이 전래되지 않음은 물론 그 저술의 이름 자체도 확인할 길이 없다. 혹시 원효의 저술 목록에 보이는 ‘반야경’과 삼론학 관계 저술 가운데 이때 지은 것이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보덕(普德)으로부터 열반종의 교학을 청강한 일도 있었다. 의천의 ‘대각국사문집’에 의하면, 고구려의 반룡산(盤龍山) 연복사(延福寺) 보덕의 비래방장의 옛터를 찾아보고 지은 시와 백제의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 비래방장의 보덕의 진영에 참배하면서 지은 시에서 원효와 의상이 보덕으로부터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웠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보덕은 보장왕과 연개소문의 도교 홍포정책에 반대하여 보장왕 9년(650)에 백제의 고대산으로 방장을 날려 옮겨왔다는 설화를 전해주는데, 그가 망명한 해는 원효와 의상이 육로를 통해 당에 가려다가 고구려의 순라에게 첩자로 몰려 잡혔다가 겨우 빠져나온 해이기도 하다. 원효 등이 보덕을 찾아가 청강한 때가 보덕의 망명에 앞선 650년 이전인가? 아니면 고대산으로 망명한 이후인가? 하는 문제인데, 현재 남아있는 자료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원효와 의상이 당으로 2차 유학을 떠나는 661년 이전인 것만은 분명하며, 잠정적으로 650년 전후로 추정하려고 한다. 당시는 3국 사이에 항쟁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사람들(특히 승려들)의 왕래와 문화의 교류는 끊이지 않았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원효에게는 ‘열반경’의 장소 2부, ‘유마경’의 장소 2종의 이름이 알려지고 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은 ‘열반경종요’ 1권뿐인데, 이 저술은 교판체계를 수립하는 단계인 말년경의 저술로 추정된다.

이상 원효의 행적을 통해 수학과정과 저술 관계의 사실을 대강 살펴보았다. 낭지・혜공・보덕 등의 선지식을 폭넓게 찾아가서 사사하면서 삼론학과 ‘법화경’ ‘열반경’ ‘유마경’ 등을 공부하고 있었고, 여러 종의 저술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학 시기의 저술 가운데 하나도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원효의 불교사상 내용을 밝힐 길은 없다. 그런데 원효가 수학기를 보내고 있던 7세기 전반에는 고구려에서는 삼론학・지론학・열반학, 백제에서도 삼론학・성실학・열반학・계율학 등이 연구되고 있었으며, 신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또한 신라에서도 진흥왕 10년(549) 양(梁)으로부터 각덕(覺德)이 귀국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계속 이어진 유학승들의 귀국으로 남북조와 수・당의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편 7세기에 들어오면서 수에서 당초에 걸쳐 중국의 불교계는 불교의 기초학 분야가 삼론학・성실학・지론학 등에서 ‘섭대승론’을 중심으로 하는 유식교학으로 옮겨가고 있었고, 중국에 유학한 신라 유학승들이 이 교학을 주로 받아오고 있었다. 수에서 당초에 걸쳐서 한국의 유학승들을 가르쳤던 중국 승려의 기록을 보면, 우선 수의 대외 관계 업무를 관장하던 홍려사(鴻臚寺) 사방관(四方館)에서 외국 학승을 대상으로 교육이 행해졌는데, 대업 4년(608)에 정영사 혜원에게 ‘열반경’, 담천에게 ‘섭대승론’을 배운 정업(淨業)이 번승(蕃僧)을 가르쳤고, 혜원에게 사사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섭대승론’과 ‘십지경론’을 배워서 정영사에서 강설한 정장(靜藏)이 동 9년(613)에 동번(東蕃)을 가르쳤다. 다음 해에는 지론종 남도파로 이어지며 ‘열반경’과 ‘섭대승론’에 능통하고, ‘대승기신론’의 주석서를 지은 영윤(靈潤)이 삼한(三韓)의 승도를 가르쳤고, 같은 해에 신형(神逈)도 ‘대지도론’을 강의하고 삼한의 제방의 사(諸方의 士)를 교육시켰다. 그밖에 무애(無碍)와 혜승(慧乘) 등도 사방관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들 가운데 특히 영윤은 뒷날 당 정관 19년(645) 현장이 역경팀을 구성할 때에 증의(證義) 12명 가운데 필두로 참여하여 오성각별설의 무불성 문제를 제기하여 큰 파문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영윤과 현장의 제자들 사이에 전개된 논쟁의 소문은 신라에도 전해져 신역경전을 처음 접하게 된 원효에게 상당한 충격을 준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신역경전의 전래시기에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홍로시 이외에서는 정관 16년(642)에 죽은 승변(僧辨)이 ‘섭대승론’과 그 밖의 유식학을 강의하여, “대해 안밖의 중국과 오랑캐의 승려들이 만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참여했다”고 하며, 성실・비담・화엄・지론 등에 정통하고 ‘섭대승론’과 ‘열반경’에 뛰어났던 법상(法常)은 자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동번(東蕃)과 서번西蕃)을 가르쳤다고 한다. 중국에서 섭론학을 배워온 신라 승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한 원광과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한 자장이었다. 그 가운데 원광은 일찍 남조의 진(陳)에서 ‘열반경’ ‘성실론’ ‘아함경’ 등을 공부하고, 개황 9년(589) 수의 서울로 가서 새롭게 유행하고 있던 섭론학을 전수하여 왔으며, 자장은 귀국 이후에 궁중에서 ‘섭대승론’을 강의함으로서 신라 불교학의 주류를 ‘섭대승론’을 중심으로 하는 유식교학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진덕여왕 4년(650) 즈음 원효는 먼저 삼론학과 ‘법화경’ ‘열반경’ ‘유마경’ 등에 이어서 ‘섭대승론’을 중심으로 하는 구유식학을 공부하고, 그 토대 위에서 신역불교, 특히 신유식학을 새로 접하게 됨으로서 그의 불교사상은 국제적 성격을 갖는 새로운 단계인 신역경전의 전래와 ‘대승기신론별기’ 저술의 시기로 발전할 수 있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20호 / 2022년 2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