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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26)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9)

당 태종으로부터 받아온 ‘유가사지론’이 원효불교에 일대 전기 마련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 신라왕 요청으로 받아온 사실 전해
김춘추 받아왔음 확실하나 유교사관에 의해 의도적 배제 추정
신역에 따른 당 불교계 사상적 갈등, 원효불교 이론체계 시발점

고려대장경 ‘유가사지론’ 제1권 첫째장, 당 태종이 직접 서문을 지었다.
고려대장경 ‘유가사지론’ 제1권 첫째장, 당 태종이 직접 서문을 지었다.

원효 행적과 저술편년을 통해 불교사상의 변화과정을 추구할 때 두 번째에 해당되는 시기(신역경전의 전래와 ‘대승기신론별기’)는 진덕여왕4년(650)~태종무열왕8년(661)으로서 원효 나이 34~45세 무렵이다. 이 기간 원효는 새로 전래된 ‘유가사지론’을 중심으로 신역경전, 그리고 신역경전으로 인한 당 불교계의 파동소식을 접하며 국제불교에 대한 안목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당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불교계 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당 유학을 결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진덕여왕4년(650) 원효가 의상과 시도한 당 유학은 실패했고, 이후 국내에서 10여년 동안 동아시아 불교계의 문제해결을 추구한 최초 연구 성과가 ‘대승기신론별기’였다. 본회에서는 ‘대승기신론별기’ 내용을 분석하기에 앞서 신역경전인 ‘유가사지론’의 전래과정 문제부터 추적하려고 한다.

고려중기인 예종6년(1111)에 수립한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에 의하면, ‘유가사지론’의 전래사실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대송고승전’에서 현장은 유가유식학을 개창한 시조이며, 기(基, 규기는 잘못임)는 이 교학을 보수하여 기술한 종조라고 하였다. 현장에게 기가 만약 없었다면 어찌 그의 교학을 조술하여 넓힐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무릇 성상의문(性相義門)으로 들어가고자 할진대 자은(慈恩)의 교학을 버리고는 그 구극의 경지에는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과거 당 문황(당태종, 627~649)이 신라왕이 표문(表文)으로 요청한 ‘유가사지론’ 100권을 보내주었다. 이 무렵 응리원실종(應理圓實宗), 즉 법상교학이 없었는데, 이 땅에서도 점점 융성하게 되었다. 원효법사가 앞에서 이끌고 태현대통이 뒤를 따르매, 등불이 전해져 타오르고 세대를 이어 흥륭하였다.”

탑비 주인공 혜덕왕사 소현(韶顯, 1038~1096)은 의천의 외숙으로 당시 융성한 법상종 교단을 이끌면서 화엄종 의천의 교장(敎藏) 간행을 도와 흥왕사의 교장도감과는 별도로 금산사에 광교원을 설치하고 유식학 중심의 불전들을 간행했던 인물이었는데, 고려 법상종의 근본경전으로 ‘유가사지론’을 명기하고, 또한 유식학 경전 가운데서 특히 이 경론을 당태종이 신라왕의 요청으로 보내주었다는 사실을 특기하고, 나아가 고려 유식학의 시조로 신라 원효를 받들고 있음이 주목된다. 위 비문에서 당태종이 신라왕의 요청으로 ‘유가사지론’을 보내주었다는 연대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으나, 그 시기는 ‘유가사지론’의 번역이 완료되는 시점(648.5.15)부터 당태종이 세상을 떠나는 시점(649.5.26) 사이고, 또한 당시 표문을 올려 이 경론을 요청한 신라왕이 진덕여왕이었음은 분명하다.

진덕여왕 2년(648)부터 3년(649) 사이 신라에서는 3차례 당에 사신을 보냈는데 ‘삼국사기’와 ‘신・구당서’에 의하면, 648년의 봄 정월, 겨울(10~12월), 윤12월 등이고, 649년에는 사신을 파견한 사실이 없다. 이 가운데 봄 정월의 사신 파견 사례는 ‘유가시지론’ 번역이 완료되기 전으로 해당이 되지 않고, 겨울에 파견된 한질허(邯帙許)는 당태종으로부터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 사용에 대한 질책을 받고 성과 없이 귀국하였다. 이로 인해서 다시 김춘추를 파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 위기에 처하였던 신라는 당의 군사적 협력이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윤12월 다시 김춘추(뒤의 태종무열왕)를 급거 파견하였다, 김춘추는 정치와 외교의 실권을 장악한 실력자로서 앞서 642년에는 고구려, 647년에는 일본을 다녀왔고, 648년에는 당에 가서 마침내 나당군사협정의 체결을 성공시킴으로서 사실상 삼국통일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신라의 사신 파견 사례로는 유일하게 ‘구당서’ 본기에도 기록되었을 정도로 주목받은 사건이었는데, 김춘추는 당태종의 환대를 받으면 국학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을 참관하고, 당태종이 직접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받고, 마침내 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당의 장복(章服) 제도를 받아들였으며, 김춘추는 특진(特進, 문산관 정2품), 동행한 셋째 아들은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직사관 종3품)의 관직을 받고, 그 아들을 숙위(宿衛)로 남겨놓은 다음에 성대한 환송을 받으면서 귀국하였다. 그런데 이들 역사서에는 ‘유가사지론’ 같은 불전을 받아온 사실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는데, 유교사관에 의해서 유교경전이나 역사서가 아닌 불전은 의도적으로 배제시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편 현장의 역경사업과 당태종의 관계를 살펴보면, 신역경전의 신라 전래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장은 정관 19년(645) 1월 귀국하여 당태종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4월에 번역팀을 구성하고, 5월부터 번역작업에 착수하였다. 이후 664년까지 19년 동안 74부 1335권을 번역하였는데, 유식학 불전을 중심으로 하였고, 인도 유식학의 10대론사 가운데서 특히 호법(護法) 계통의 유식학을 위주로 하였다. 초기에 번역된 경전은 645년 5월에 ‘대보살장경’ 20권을 시작으로 하여 무착의 ‘현양성교론송’ 1권과 ‘현양성교론’ 20권, ‘6문다라니경’ 1권, ‘불지경’ 1권을 연이어 번역하였고, 646년에 안혜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 16권에 이어 5월15일 ‘유가사지론’ 100권의 번역에 착수하여 648년 5월15일에 완료하였다. ‘유가시지론’을 번역하는 도중에도 세친의 ‘대승오온론’ 1권, 무성의 ‘섭대승론석’ 10권, ‘해심밀경’ 5권 등의 번역을 병행하였는데, 당태종의 요청에 의해서 ‘대당서역기’ 12권을 찬술한 것도 이 기간이었다. 초기 번역된 경론 가운데 특히 주목받은 것은 ‘유가사지론’이었는데, 현장의 인도구법여행의 원래 목적의 하나가 이 경전의 원본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당태종은 현장을 옥화궁으로 초청하고, 번역본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열람하고, 비서성의 서수(書手)로 하여금 9부를 필사케 하여 전국 9주 각지로 유통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문(大唐三藏聖敎序)’을 직접 지어 관료들을 상대로 읽게 하였고, 황태자의 ‘술성기(述聖記)’와 함께 비석에 새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는 황태자(뒷날의 고종)가 문덕황후를 위하여 창건한 자은사(慈恩寺)에 번역원을 짓고 현장을 옮겨 주석하도록 하였는데, 전에 주석했던 홍복사(弘福寺)로부터 새 절로의 이사행렬은 황제와 황태자까지 참관할 정도로 장관이었다고 한다. 바로 그 다음 달에 김춘추가 당에 가서 당태종의 환대를 받으면서 문화적인 활동을 폭넓게 전개하였던 것을 보아 현장의 역경과 자은사로의 이사 등의 불사도 견문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현장도 앞서 645년 당태종으로부터 고구려 원정에 동행할 것을 요청받은 바 있었고, 그 뒤 현장은 당태종의 5대 업적 가운데 다섯 번째로 고구려 원정의 공적(사실은 패퇴)을 꼽을 정도로 해동3국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상 신라왕의 표문에 의한 요청으로 당태종이 ‘유가사지론’을 보내왔다는 ‘혜덕왕사비문’의 내용, 김춘추가 당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실을 전하는 ‘삼국사기’의 기록, 그리고 당에서의 현장의 역경사업과 당태종의 후원 사실을 전하는 현장의 전기자료 등을 종합할때, 진덕여왕 2년(648) 연말 김춘추가 당에 사신으로 가서 당태종으로부터 ‘유가사지론’을 받아왔다는 사실은 합리적 추론이라고 본다. 그 경전이 번역된 지 불과 8개월만이었다. 그것은 곧바로 원효에게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앞서 추적한 바와 같이 원효가 김춘추(뒷날의 태종무열왕)와 교류한 것은 요석공주를 만나기 이전이었으며, 두 사람의 결혼은 국왕인 태종무열왕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음을 고려하면 김춘추가 가져온 ‘유가사지론’은 곧장 원효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유가사지론’의 전래에서 비롯된 신역경전들의 전래는 구역경전에 의거하던 원효 불교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비약적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특히 진제 번역의 ‘섭대승론’을 중심으로 하는 구유식학을 기반으로 하여 ‘유가사지론’을 중심으로 하는 신유식학을 받아들임으로서 원효불교의 이론적 바탕이 마련되었다. 원효는 정관 23년(649)에 현장이 번역한 ‘섭대승론세친석’ 등을 참조하면서도 양(梁) 진제역의 ‘섭대승론’을 주석하고 다른 저술에서도 인용하고 있었는데, ‘양섭론소초’ 4권, ‘섭대승론세친석론역기’ 4권, ‘섭대승론소’ 4권 등은 일찍이 일실되었지만, 구유식학을 바탕으로 신유식학을 받아들이는 원효의 불교성격을 나타내주는 저술들이었다. 원효의 현존 저술 23종에서 신역경전을 인용한 사례를 조사하면, ‘발심수행장’ ‘대승육정참회’ ‘미타증성계’ ‘화엄경소’ 등 4종을 제외한 모든 저술에서 신역경전을 인용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4종 가운데 앞의 3종은 저술이라기보다 짧은 분량의 단편에 불과하고, 글의 성격상 유식학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이고, ‘화엄경소’는 서문과 권3만이 현존하는 잔편에 불과하다. 그리고 인용된 신역경전 가운데서도 초기번역본인 ‘유가사지론’은 거의 모든 저술에서 빠짐없이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서 윈효의 불교에 미친 영향과 위상을 확인시켜 준다. 특히 신역경전이 전래된 이후 최초의 저술로 추정되는 ‘대승기신론별기’에서 ‘유가사지론’을 12회 이상 인용하면서 “신론(新論)”으로도 표기한 것은 새로 번역되어 전래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원효의 80여종 150여권의 저술 가운데 저술의 분량만을 가지고 판단할 때 단일 경전으로는 ‘화엄경’과 ‘대승기신론’ 관련 저술이 가장 많지만, 분야별로는 유식학 관련 저술이 가장 많다. 원효가 유식학 분야에 이렇게 큰 비중을 두고 있었던 것은 어리석은 범부들로 하여금 깨달음의 해탈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인간의 심식(心識)을 철저히 분석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김춘추로부터 전해 받은 것은 ‘유가사지론’을 비롯한 신역경전 그 자체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원효에게 직접적으로 충격을 준 것은 현장의 신역으로 인한 당 불교계의 파동 소식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지적인 호기심에 불타던 청년 비구인 원효로 하여금 당으로 유학의 길에 나서게 한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다고 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현장이 귀국한 직후부터 이미 그 명성이 조야에 진동하였고, 당태종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인도 나란타사의 호법(護法)-계현(戒賢) 계통의 유식학을 전수하여 와서 조직적인 번역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구역경론은 오류(舛誤)가 많다고 비판하고 사용을 금지함으로서 구역경론에 의거하는 불교도들의 반대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러한 당 불교계의 소식은 신역경전의 전래와 함께 그대로 전해져 왔을 것이다. 현장의 신역으로 인한 당 불교계의 파동은 신・구유식의 갈등, 불성 유무의 논란, 일승과 삼승의 대립, 공・유의 대립 등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 갈등 가운데도 공・유 대립의 문제는 사상적인 갈등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인도불교로부터 이어져 온 유가유식학파와 반야중관학파 사이의 역사적인 대립의 문제였다는 점에서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더욱 근본적인 문제였다. 원효의 저술 제2기의 첫 저술인 ‘대승기신론별기’의 서문에서 내건 문제가 바로 이 공・유 대립의 문제였다. 진덕여왕 4년(650) 원효는 1차 당 유학에 실패한 이후 그 해결의 실마리를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에서 찾았는데, 이것이 뒷날 종합적인 원효불교의 이론체계 수립의 시발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22호 / 2022년 3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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