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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함의 변명

기자명 이병두

이제는 역사 기록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먼 옛날 일처럼 느끼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고 하는 악명 높은 ‘흑백차별제도’ 때문에 백인만 ‘국민’으로 대접받으며 권리를 행사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넬슨 만델라를 비롯하여 오랜 세월 흑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애써온 이들이 있었지만, 걸핏하면 지도자들을 투옥해 운동의 맥을 끊어놓음으로써 1960년대 말에는 흑인 인권 운동의 구심점이던 아프리카민족회의마저 무너져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절망의 순간에 젊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흑인의식운동’이 일어나 그 공백을 채운다. 몇 해 전 마틴 메러디스가 쓴 ‘아프리카의 운명-인류의 요람에 새겨진 상처와 오욕의 아프리카 현대사’를 읽다가, 이 운동을 이끌던 대학생 스티브 비코가 1970년 9월 학생신문에 쓴 글을 대하고 마치 나와 내 주변의 상황을 비추어주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독서일기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비겁함’을 ‘불가피한 입장’으로 감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공무원 중에도 이런 분위기가 있지만, 특히 종교계(불교계와 신구 기독교를 가릴 것 없이)에 종사하는 사무원들 사이에는 이런 비겁함을 ‘불가피한 상황’으로 자기용서(自己容恕)받으려는 정서가 강하다. 실은 이런 자기용서는 스스로를 속이고 스스로를 버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말이다.” 스티브 비코가 말한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전형적인 흑인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렸다. 그는 상냥한 조개껍데기 노릇을 한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길로 백인 권력 구조를 바라보며 ‘불가피한 입장’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감수하는… 그의 얼굴은 남의 눈길이 닿지 않는 화장실에 들어가면 심하게 일그러지고 백인 사회를 향한 무언의 비난을 뿜어낸다. 그러나 주인이 조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서둘러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지며 양처럼 순한 복종을 보인다. 버스나 기차에 올라 집으로 향할 때면 백인을 혹독하게 비난하는 무리에 합류한다. 하지만 경찰이나 사장 앞에 서면 행여 뒤질세라 정부를 칭찬한다.”

이 짧은 글 한 대목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면, 그 조직이나 집단은 희망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로디지아 같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남아공이 내전을 거치지 않고 백인에서 흑인으로 비교적 평화롭게 정권 이양을 가져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꺼져가는 흑인 인권 운동의 등불을 다시 살려내 결국 1991년에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폐기시켜 흑인 정권 수립의 기반을 다지게 해준 스티브 비코의 위 글이 있었다.

스스로 ‘억압·차별 당한다’고 느끼는 사람들 중에 자신보다 더 열악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여러 종교의 여성 수행자와 성직자들이 종무원이나 여성 신도를 대하는 태도에서 자주 보이고, 각 종교 기관에서 종무원으로 일하는 이들 중에서도 종종 만나게 된다. 종교계뿐 아니라 한때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사람이 막상 권력을 잡게 되자 비리와 직권 남용에 휘말리고 국민을 함부로 여기는 모습도 자주 보게 된다. 이런 일의 시작과 끝에 ‘비겁함을 불가피한 입장으로 감추려는 자기용서와 자기기만’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기용서와 자기기만의 가장 큰 피해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본인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자.

“어제의 피(被)압제자가 오늘의 압제자가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을 이미 목격해왔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만델라 정권 시절에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위원회’ 위원장 소임을 맡게 된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험난한 앞길을 예상하며, 권력을 장악한 흑인들을 향해 한 경고이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623호 / 2022년 3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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