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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27) (7)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10)

대승기신론과 유가사지론 대립 해소 노력이 원효 불교 핵심

원효 사상의 진전 과정이 곧 대승기신론에 대한 이해 과정
유가사지론 접한 후 원효불교 사상체계에 새로운 전기 마련
현장 스님 역경불사는 한문경전의 범어 번역으로도 이어져

원효 스님 대승기신론 별기 일본 천명 원년(1781) 간행.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원효 스님 대승기신론 별기 일본 천명 원년(1781) 간행.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진덕여왕 2년(648) 말경 ‘유가사지론’을 비롯한 신역경전과 함께 전해져온 당 불교계의 파동소식은 32세의 청년 원효로 하여금 도당 유학을 결행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원효가 도당 유학을 시도했던 사실은 ‘고선사서당화상비’ ‘삼국유사 원효불기조’ ‘송고승전 원효전’ 등 원효 전기 자료 가운데 오직 ‘송고승전’에서만 언급되었다. “의상법사와 함께 당에 들어가려고 한 것은 현장삼장과 자은의 문하를 흠모해서였는데, 인연이 어그러져 유학할 마음을 접었다.”

원효의 도당 유학은 실패했기 때문에 그의 전기 자료에서 더 이상의 언급은 무의미했을 것이지만, 유학결심의 동기만은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반면 원효와 도당 유학을 시도하였던 의상은 2차의 시도 끝에 성공해 화엄종을 전수해 왔기 때문에 의상의 전기 자료에 유학 사실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의상의 전기 가운데 원효 관련 이야기가 삽화처럼 끼어 있기 때문에 원효의 유학에 얽힌 사실도 좀 더 밝힐 수 있다.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에 인용된 ‘부석본비(浮石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진덕여왕 4년(650) 육로를 통한 1차 유학 시도는 실패했으나, 태종무열왕 8년(661) 해로를 통한 2차 유학 시도는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 인용된 ‘최후본전(崔侯本傳)’에 의해서 1차 시도는 육로로 요동 변경까지 갔다가 고구려 국경수비대에게 구금된 지 수십일 만에 겨우 풀려나 돌아왔으며, ‘송고승전 의상전’에 의해면 당나라에 교종(敎宗)이 번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원효와 함께 해로를 통한 2차 유학의 길에 나서 당주 경계의 무덤 속에서 자다가 원효는 만법유식의 도리를 깨닫고 귀환한 반면 의상은 당나라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학계는 의상 전기 자료들을 종합해 원효의 650년의 육로를 통한 1차 유학 시도와 661년의 해로를 통한 2차 유학 시도 등 두 차례 당 유학 추진 사실을 정설로 받아들이게 됐다.

그런데 원효의 당 유학 관련 사실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10년의 간격을 두고 두 차례나 유학을 시도할 정도로 현장의 신역불교, 특히 ‘유가사지론’를 중심으로 한 유식학에 대해 원효가 남다른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648년 말 ‘유가사지론’을 접하고 제1차 당 유학을 시도한 바 있고, 이후에도 당을 다녀오는 사신이나 유학승들의 귀국을 계기로 속속 번역되는 신역경전들이 전래되어 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원효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10년 뒤에 다시 제2차의 당 유학을 시도하였다는 사실은 그만큼 ‘유가사지론’을 중심으로 하는 유식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661년 2차 유학 도중에 깨달음을 체험하고 읊조렸다는 오도송에서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라는 표현이 ‘대승기신론’의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以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故)”라는 구절을 변형시킨 것에 불과할 정도로 원효는 이미 ‘대승기신론’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갖고 있었다. 

원효의 ‘대승기신론’ 주석서는 ‘해심밀경’과 ‘유가사지론’ 중심의 유식학설과 ‘능가경’과 ‘대승기신론’ 중심의 여래장설을 비교하는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대승기신론’에 대한 최초 연구서로 추정되는 ‘대승기신론별기’의 한 구절만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유가론’ 등과 같은 데에서는 아라야식이 이숙식(異熟識, Vipāka-vijnňāna)으로서 한결같이 생멸만 한다고 말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 ‘기신론’에서는 아라야식이 불생멸과 생멸의 두 가지 뜻을 갖추어 함유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원효는 아뢰야식에 대한 두 경론의 해석상 차이점을 제기한 다음, ‘능가경’에 의거한 ‘대승기신론’으로 이 차이점을 화회시키려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논의 내용은 번잡하여 생략한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의 진여연기설과 ‘유가사지론’의 아뢰야연기설 사이의 대립을 화회시키려는 노력은 이후 ‘대승기신론소’를 비롯한 다른 저술들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대승기신론’과 유식학설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논의는 8세기 중엽 원효 불교의 영향을 받은 태현의 ‘대승기신론내의약탐기(大乘起信論內義略探記)’나 견등의 ‘대승기신론동이약집(大乘起信論同異略集)’ 등으로 이어질 정도로 신라 불교계에서 주목받았다.

원효의 저술 가운데서 ‘대승기신론소’는 원효불교의 이론체계, ‘금강삼매경론’은 실천원리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원효의 불교는 ‘대승기신론’의 연구에서 시작됐고, 그 연구결과인 ‘대승기신론소’ 저술에 의해 원효 불교의 사상체계가 완성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화쟁’을 일생의 목표로 삼은 원효의 불교사상을 뒷받침한 것이 바로 ‘대승기신론’이었고, 원효사상의 진전과정이 ‘대승기신론’에 대한 이해과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원효 저술의 제2기인 650년부터 661년까지의 10여년 동안은 유식학 분야의 신역경전인 ‘유가사지론’의 철저한 이해와 여래장 계통의 ‘대승기신론’의 새로운 평가를 통하여 원효의 불교사상체계의 틀을 마련한 시기였다. 그런데 ‘유가사지론’은 번역자, 번역시기와 장소 등이 명확한데 반해 ‘대승기신론’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신라에 전래된 시기나 원효가 접하게 되는 과정도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 저술의 이해를 추구하기에 앞서 원효가 그 경전을 접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볼 필요가 있다.

‘대승기신론’은 인도의 마명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그 원전인 범어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오늘날 전해 오는 것은 양의 진제(500~569)와 당의 실차난타(652~710)가 번역했다는 두 가지 한역본뿐이다. 원효에 앞선 이 경전의 주석본으로는 수의 정영사 혜원(523~592)의 의소(義疏) 4권이 알려져 있다. 혜원은 지론종 남도파의 교설에서 본 남북조의 불교학을 집대성한 ‘대승의장’ 14권을 저술하였으며, 그의 문파는 매우 번성하였다. 그는 ‘십지경론’과 함께 ‘열반경’을 널리 선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밖에 ‘대승기신론’을 주석한 것은 의미가 크다. 그런데 7세기 전후 ‘대승기신론’을 강의한 학승들은 대부분 ‘섭대승론’을 강설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섭론종 계통의 학승들은 지론종의 영향을 받으면서 ‘열반경’을 강설하였고, 아울러 여래장 계통의 ‘대승기신론’을 점차 중시해 갔다. 7세기 중국 불교계의 이러한 학풍은 신라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특히 원광이 장안에서 새로 흥기하는 섭론종을 받아왔고, 이어 자장이 섭론종의 법상(567~645)에게 수학하고 귀국하여 궁중에서 ‘섭대승론’을 강의하였다. 또한 외국 학승을 위한 홍려시(鴻臚寺)에서 교육받은 유학승들이 연이어 귀국하였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신라 불교계에서도 ‘섭대승론’의 이해에 수반되어 ‘대승기신론’ 연구의 기반을 조성해 갔을 것이다. 

원효 당시의 중국 승려 가운데서 신라 불교계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서는 영윤(靈潤)이 주목된다. 영윤은 담천-변상의 계통을 이은 섭론종의 학자로서 ‘열반경’을 70여 차례, ‘섭대승론’을 30여 차례 강의함으로써 이 분야의 제1인자로 칭송되었으며, ‘의소 13권’ ‘현장 3권’을 지었다. 그밖에 ‘유마경’ ‘승만경’ ‘대승기신론’ 등을 강의하고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섭론종의 학자로서 ‘열반경’과 ‘섭대승론’을 중심으로 하면서 여래장 계통의 ‘승만경’과 ‘대승기신론’을 강의하고 주석서를 남겼다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영윤의 학설 가운데는 종래의 섭론종 학자들과 다른 새로운 주장들이 있고, 또한 현장의 신유식학과도 대립되는 주장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윤은 645년 현장이 귀국하여 역경팀을 조직할 때에 증의(證義) 12인의 필두로서 참여하였는데, 무불성(無佛性)의 문제를 비롯한 14종의 의문을 제기하여 ‘유가사지론’을 비롯한 신역경전의 학설을 정면으로 비판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오성각별(五性各別)을 명확하게 설하는 ‘유가사지론’과 ‘불지경론’에 반대하고 실유불성(悉有佛性)을 설하는 ‘열반경’ 등의 구역경전이 진정한 대승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쟁과 불교계의 파문은 현장의 번역 개시 단계부터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소식은 신라 불교계에도 신역경전의 전래와 함께 속속 알려졌을 것이다. 특히 영윤은 일찍이 614년 홍려시 사방관에서 해동 3국의 승려들을 가르친 바도 있었기 때문에 신라 승려들에게도 친숙한 인물로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원효는 현장이 역경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열반경’과 ‘섭대승론’ 등 구역경전들과 함께 ‘대승기신론’도 연구할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신역경전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현장의 경전번역 사업에서  특기할 것은 한문 경전들을 인도의 범어로 번역하였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유가사지론’의 번역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647년에 당태종의 칙명으로 도교 경전인 ‘노자(老子)’를 범어로 번역해 서역에 보냈다. 그리고 둘째는 번역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한문의 ‘대승기신론’을 범어로 번역해 인도에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노자’의 번역 사실은 현장의 여러 전기와 ‘속고승전’ 등에 언급되어 있어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은 오직 ‘속고승전 현장전’에서만 언급돼 있으며, 현장의 입적 사실까지 서술한 후 연월을 밝히지 않은 채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기신론’ 한편의 글은 마명(馬鳴)보살에게서 나온 책인데도 그 땅의 모든 스님들이 그 책을 한 번 보기를 원하던 차에 현장 스님은 곧 당나라 글로 된 책을 인도말로 번역하여 오천축국(五天竺國)에 두루 배포하였으니, 이는 법으로 교화한 인연이 동서를 넘나들며 거양한 일이다.” 

‘대승기신론’은 진제와 실차난타가 번역했다는 2종의 한문본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고, 오늘날까지 원전인 범어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현장이 번역했다는 범어본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속고승전’의 저자로서 현장의 범어역을 유일하게 증언한 도선(596~667)은 4분율에 관한 저술들과 ‘속고승전’과 ‘석가방지’ 등의 저술로 계율학과 불교사 분야에서 특히 권위를 가진 학자였다. 645년 4월 현장이 번역팀을 조직할 때는 “철문(綴文)” 9인 가운데 일원으로 참여하여 최초의 ‘대보살장경’ 번역에는 증문(證文)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속고승전’에 현장전을 편입하고, 현장의 생애와 업적의 서술에 이어 입적할 때의 모습까지 자세하게 증언할 정도로 가까이서 지켜봤던 밀접한 관계로 보아 ‘대승기신론’의 범어 번역 사실을 쉽게 부정할 수도 없다. ‘대승기신론’은 7세기경 불교 각 학파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었고, 특히 도선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점도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의 진여연기설(眞如緣起說)과 ‘유가사지론’을 비롯한 신역경전의 아뢰야연기설(阿賴耶緣起說)이 대립적인 관계였던 점은 현장이 ‘대승기신론’에 공감하고 범어로 번역까지 했다는 사실을 의심케 한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24호 / 2022년 3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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