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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만약 앎으로써 앎을 안다고 하면(若以知知知)

기자명 승한 스님

진공 너머 묘유 있다는 단순한 진리

오도 순간 선시는 저절로 오고
선사들 그 시 받아 읊조린 것
‘知知知’ 같은 말장난식 배출은
읽는 이에게 글의 통쾌함 선사

만약 앎으로써 앎을 안다고 하면/ 손으로 허공을 움켜잡는 것과 같네./ 앎은 단지 스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니/ 앎이 없어야 다시 앎을 아는 것이네.

若以知知知(약이지지지)
如以手掬空(여이수국공)
知但自知己(지단자지기)
無知更知知(무지갱지지)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항상 궁금했다. 깨달음의 순간, 선사들은 왜, 꼭, 선시를 썼을까? 깨달음의 이치를 왜, 꼭, 문학적으로 형상화했을까? 자신의 깨달음의 내용을 꼭, 그런 식으로 표출해야만 했을까? 그렇다면 과연, 선시를 남기지 않은 선사는 고승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고지식한 필자의 관념의 늪 때문이었는지를. 깨달음 이퀄 무아(無我)라는, 깨달음 이퀄 공(空)이라는 ‘말의 통발’에 갇혀 필자는 오랜 세월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거다. 우스운 건, 그러면서도 필자가 시인이라는 명함을 내밀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또한 승려로서 진공(眞空) 너머 묘유(妙有)가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놓치고 살고 있었던 거다.

필자의 무지를 일깨운 건 이옥(李玉, 1760~1815. 조선 후기 문인)의 ‘이언(俚諺)’이었다. 그 글을 통해 이옥은 말하고 있었다.

“내 글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다. 주인이 있어 시킨 것이다. 이를 지은 자가 감히 어찌 지었겠는가? 이를 지은 자에게 이를 짓게끔 만든 사람이 지은 것이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천지만물이다. 천지만물은 작가에게 있어, 꿈에 의탁하여 현상으로 드러났다가 다른 형상으로 변화하여 정을 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천지만물이 사람의 힘을 빌어 시를 지으려 할 때는 귓구멍과 눈구멍으로 쏙 들어와 단전 위를 배회하다가, 입과 손을 통해 술술 나오는 것이니, 본래 시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는 마치 석가모니가 어쩌다 공작의 입을 통해 배속으로 들어갔다가 금세 공작의 뒤꽁무니를 통해 다시 나온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것을 석가모니의 석가모니라 해야 할지, 공작의 석가모니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런 까닭에 시인은 천지만물의 통역관이라 하고, 또 천지만물을 그려내는 화가라고 하는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1904~1973, 칠레 시인)의 “시가 내게로 왔다”는 것과 똑같은 시작(詩作) 이치였다. 그런데 네루다보다 144년이나 먼저 태어난 지구촌 반대쪽의 조그만 나라 조선 문인이 시가 오는 길을 더 훤히 꿰차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창고가 석가모니와 불교임을 명백히 알려주고 있었던 거다.

필자는 이옥의 ‘이언’을 읽으면서 눈물을 똑똑 흘렸다. 자각과 감동의 터짐이었다. 승려로서 저절로 오는 시를 저절로 받아 적지 못하고, 시가 왜 안 써지냐며 매양 두 번째 화살과 세 번째 화살까지 맞고 살았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 시를 쓰는 건 그가 맞다. 하지만 그가 한 일은 천지만물의 이야기를 대신 통역해주는 것일 뿐이다. 입 없는 천지만물을 대신해 그는 그 말을 그대로 전달하고, 눈으로 보여주는 자일 뿐이다. 똥을 눈 것은 공작이지만, 그 똥은 공작새의 똥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똥이라는 사실을 대신 전달해주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허령불매(虛靈不昧)와 이언절려(離言絶慮)의 순간, 천지만물이 선사들의 단전으로 들어와 맴돌다가 선사들의 손과 입을 빌려 언어적 외양(문학적 형상화)을 갖춘 뒤 몸 밖으로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선시였던 것이다. 오도의 순간 선사들에겐 그냥 선시가 왔고, 선사들은 그 선시를 그냥 받아 읊조린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시를 읽자 시 읽는 즐거움이 한층 배가됐다. 청매인오 선사의 이 선시도 그 선시가 오게 된 이치를 생각하며 읽으면 정말 맛있고 즐겁다. 특히 ‘知知知’ 같은 말장난식 배출은 읽는 이에게 글의 통쾌함과 함께 어째서 석가모니의 똥이 통쾌한지를 희롱처럼 보여준다. 모든 선시는 다 그렇게 온다. 선시 읽기가 즐겁고 행복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도 날마다 똥을 싸고 살지 않은가. 그 똥이, 똥냄새가 ‘知知知’하지 않으려면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살면 된다. 머리로 살지 말고 가슴으로 살자는 뜻이다.

승한 스님 빠리사선원장 omubuddha@hanmail.net

[1630호 / 2022년 4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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