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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시대의 불교] 5. 봉은사 청호 스님의 이재민 구제 활동

대홍수 때 708명 구제한 청호 스님 대가뭄 때는 농가들 살렸다 

1925년 한강이 범람하자 뱃사공 설득하고 자신도 구호활동
목숨 건진 708명 십시일반 기금 모아 봉은사에 공덕비 건립
1929년 설 앞두고는 가뭄으로 굶주린 농가 찾아가 쌀 전달

청호 스님은 죽음을 무릅쓴 보살행으로 살아있는 부처로 칭송받았다.
청호 스님은 죽음을 무릅쓴 보살행으로 살아있는 부처로 칭송받았다.

1929년 5월27일 경기도 광주군 대본산 봉은사(현 강남 봉은사)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봉은사 주지 청호 스님(晴湖, 1875~1934)을 찬탄하는 ‘나청호 대선사 수해구제 공덕비’ 제막식이었다. 공덕비에는 ‘을축년 7월 홍수로 선리·부리·잠실의 뽕나무밭이 큰물에 잠기고, 708인 다급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목숨을 구해 달라 외쳤다. 나청호 대선사가 자비로움으로 이를 구제하니, 그 덕을 잊을 수가 없구나’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공덕비 비용은 스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708명이 그 은혜를 갚고자 십시일반 걷어 비용을 마련했다. 행사에는 사회 저명인사들과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는 선리·부리·잠실리 주민들도 다수 참여했다.

청호 스님이 세간에서 ‘활불(活佛)’로 존경받게 된 것은 4년 전 대홍수를 겪으면서부터다. 한반도를 뒤흔든 폭우는 1925년 양력 7월6일 시작됐다. 며칠 쏟아지다 말겠거니 여겼던 비는 7월20일까지 장장 보름동안 전국적으로 쏟아졌다. 낙동강, 금강, 만경강이 크게 범람했고, 전국적으로 1만여 채의 가옥이 침수됐다. 그중 가장 심각한 곳이 뚝섬 일대의 저지대였다. 특히 16일과 17일 집중호우로 한강 수위가 12.72m를 기록하면서 용산제방이 무너지고 오늘날 송파구와 강남구 일대의 마을들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 조선일보 1925년 7월18일자 호외에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뚝섬 상부에 있는 신천리 잠실리 두 동리는 약 1000호에 4000명이 전부 물속에 빠져서 절명 상태에 있다는데 그곳은 무인고도(無人孤島)와 같이 되어 배도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구조할 도리가 전연 없으며 17일 밤 10시경부터 살려 달라는 애호성(哀呼聲)이 차마 들을 수 없이 울려 왔는바 그동안 모두 사망하였는지도 알 수 없더라.’

주민들은 급류를 피해 지붕 위로 올라갔다. 잠실 큰 느티나무 두 그루에는 무려 700명이 올라가 구조해달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세상에 펼쳐진 지옥도나 다름없었다. 관(官)도 민(民)도 속수무책으로 상황만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구제에 나선 사람이 봉은사 주지 청호 스님이었다.
 

청호 스님이 1925년 대홍수 때 사람들을 구제하는 모습의 벽화
청호 스님이 1925년 대홍수 때 사람들을 구제하는 모습의 벽화

스님은 불교계에선 이미 저명한 강백이자 사판승(행정승)이었다.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난 스님은 12세 때 오대산 명주사로 출가해 24세 때 경전을 강의할 정도로 뛰어났다. 10여년간 수행 및 후학 지도에 힘쓰다 대중포교에 뜻을 두고 하산해 조계사 전신인 각황사에서 전법활동을 펼쳤다. 많은 이들이 법문을 듣고 속속 불교에 귀의했다. 스님의 활동은 불교계 안팎에서 크게 주목받았고, 1912년 80여개의 말사가 소속된 봉은사 주지를 맡게 됐다. 스님은 행정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절 부근 황무지를 개간해 전답과 임야 20만평에 이르는 막대한 토지를 확보했고, 경내 각종 전각을 중수·창건하면서 봉은사를 전국 최고의 대본산으로 일궈나갔다.

1918년 주지 소임에서 물러나있던 스님이 다시 주지를 맡은 것은 1924년 6월이었다. 이때 역점을 기울인 것은 전법이었다. 식민지 치하 백성들에게 불법은 위안과 희망을 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함경남도 안변 약수포리에 포교당을 건립한 것을 비롯해 곳곳에 법을 펼 수 있는 도량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을축년 대홍수는 스님이 주지를 맡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서였다. 엄청난 폭우로 용산제방이 무너지자 잠실 일대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자 스님은 봉은사 및 말사 스님들을 이끌고 구조에 나섰다. 그때 봉은사에서 정진하며 상황을 지켜봤던 동연 스님으로부터 상세한 얘기를 전해 들은 운남 스님은 당시 봉은사 조실로 있던 한암 스님의 역할도 컸음을 언급한 뒤 청호 스님의 활동에 대해선 이렇게 전했다.

“나청호 스님은 이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절에 가서는 대중을 독려하고 강가에 이르러서는 뱃사공을 불러 혹은 의(義)로써 권하고 혹은 이(利)로써 유도하며 혹은 눈물로써 슬피 호소하고 혹은 성난 표정으로 힐난하면서 구제선(救濟船)을 띄워…죽음의 위기로부터 708명의 인명을 구했다.”(불교신문 1987년 8월12일자)
 

당시 스님에 의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십시일반 기금을 마련해 세운 청호 스님 공덕비.
당시 스님에 의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십시일반 기금을 마련해 세운 청호 스님 공덕비.

청호 스님은 이때 뱃사공들에게 인명을 구하면 포상까지 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지시만 내리지 않고 직접 배를 타고 나가 사람들을 구했다. 강에 떠내려오는 사람, 수몰 직전의 지붕에 올라가 있는 사람, 나무에 매달린 사람 등을 일일이 구해 봉은사로 옮겨왔다. 지붕과 느티나무 위로 올라간 사람들을 모두 배로 실어 날랐을 때는 느티나무 두 그루 중 하나가 뿌리째 뽑혀 쓰러지더니 곧바로 급류에 휩쓸려갔다(나머지 한 그루는 이후 40여년 간 자리를 지키다가 1970년대 잠실개발과 함께 없어졌다). 이때 청호 스님 덕에 목숨을 건진 사람 중에 선리(현재 하남시 선동)의 이준식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는 청호 스님의 수해공덕비를 세울 때 지역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인보, 오세창, 이상재 등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예술가,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찬사를 마지않았다. 다음해 당대 명사들은 청호 스님의 삶을 정리하고 중생구제를 칭송하며 언제까지고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바람을 담은 ‘불괴비첩(不壞碑帖)’ 편찬에도 적극 참여했다.

청호 스님이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구한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신념에서 비롯됐다. 대홍수가 있기 훨씬 전인 1924년 1월 발간된 잡지 ‘불교’(4권0호)에는 스님이 각황전 법회에서 설한 법문 내용이 실려 있다. 주제는 ‘불타의 구제(救濟)를 구(求)하라’였다.

“가장 위대하고 안전하고 장구하다고 생각하는 천지 세계에도 기근, 질병, 도병(刀兵)의 작은 삼재와 물, 불, 바람의 큰 삼재를 지니고 있다고 했으니, 작은 삼재로는 그 세계에 의지해 머무르는 유정(有情) 밖에 고통을 주지 못하지만 큰 삼재로는 세계 그 자체까지를 괴멸시키는 것이라.… 부처님의 구제는 오직 죽은 자에 한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들도 부처님의 구제를 받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니 그러면 오늘 우리들은 죽은 자를 위해 구제를 구하는 동시에 우리들 스스로도 구제하려 해야 할 것이다.”

청호 스님의 구제 정신은 경전에서 비롯됐겠지만 당대 스님들의 구제활동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22년 12월26일자에는 해주 신광사 주지 순호 스님의 구제활동이 소개돼 있다. 선광사에서는 12월10일부터 경내에 금강계단을 세워 청호 스님 등 선지식을 초청해 경전 강의 및 수계식을 거행했는데 성황리에 마쳤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해 여름 황해도 일대에 ‘희유한 홍수’로 수많은 수해이재민이 발생했는데 신광사 주지 순호 스님이 수해구제회를 결성해 대중스님 및 신도들을 대상으로 의연금을 마련해 해주군청에 전달함으로서 ‘일반에 모범적 인물’이라고 기록돼 있다. 당시 불교계가 이재민 구제에 적극 나섰다는 신문기사들을 여럿 찾아볼 수 있고, 그 절에 직접 방문했던 청호 스님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29년 1월 발간된 ‘불교’(58권0호)에는 그간 알려지지 않은 청호 스님의 중요한 구제활동을 하나 더 찾아볼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1929년 2월5일 청호 스님은 파주 아동면 금릉리(현 파주 진서면 금릉리)를 직접 방문했다. 그곳에는 봉은사 소유의 대규모 전답이 있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추수한 농작물의 일정 부분을 봉은사에 주기로 했다. 그런데 전년도인 1928년(무진년) 파주 일대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이 그해 겨울을 나기도 전에 양식이 모두 떨어지고 설을 쇠기는커녕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 지경이었다. 이 얘기를 전해 듣고 현장을 방문한 스님은 그 참혹한 상황에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일일이 농민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위로했고 쌀 13가마와 10말을 나눠줘 춘궁기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왔다. 이를 통해 스님이 수백 명의 이재민과 극빈자를 구제해 칭찬이 자자하다고 보도하고 있다.

청호 스님은 이후에도 사람들의 아픔을 살피고 도움의 손길을 건넸으며, 봉은사 안변 삼방포교당에 이어 인천포교당, 관동포교당, 현저동 포교당, 옥천동 포교당을 설립해 진리를 통한 중생구제에도 매진했다. 그러다 1934년 8월29일(음력 7월20일) 입적했으며, 다비식 후 수습한 93과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탑은 공덕비와 더불어 현재 봉은사 일주문 안 오른쪽 부도밭에 자리 잡고 있다.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이 “반야의 거룩한 배 가는 곳마다 중생들 다 같이 살아나네”라고 찬탄했던 것처럼 청호 스님은 암울한 시대 자비의 화신이자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불렸다. 올해 스님이 열반한지 88년째이며, 3년 뒤면 을축년 수해구제활동이 100주년을 맞는다. 그러나 한 세기가 다 가도록 스님에 관한 책 한 권, 연구 논문 한 편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631호 / 2022년 5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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