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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시대의 불교] 2. 한국불교는 재난에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나라에 재난 일어나면 정법 수지와 육바라밀 실천부터 강조

거란·몽고 침입 맞서 대장경 조성하고 승복 입고 전쟁터 나서
역병 발생 원인을 불법 쇠퇴하는 말세로 진단해 경전 등 암송
불교는 안심입명의 역사…사홍서원도 중생무변서원도로 시작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1449년 세종은 한양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흥천사가 4월21일 전통 괘불재를 봉행하며 코로나19 종식과 국난 극복을 염원하고 있는 모습.  [법보신문 DB]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1449년 세종은 한양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흥천사가 4월21일 전통 괘불재를 봉행하며 코로나19 종식과 국난 극복을 염원하고 있는 모습.  [법보신문 DB] 

우리는 법회나 행사를 마감하면서 늘 사홍서원을 봉행한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로 시작하는 이 네 가지 큰 발원은 대승불교의 근본이념이다. 즉 중생 제도에서 시작하여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워 불도를 이루겠다는 다짐은 우리 불교의 변하지 않는 최상의 가치이다. 이러한 중생 제도, 중생 구제의 정신은 삼국시대 불교를 수용한 이후 지금까지 불교가 한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선도해 온 원동력이기도 하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에 앞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보살의 이타정신은 곧 민족과 국가를 위한 호국불교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국가적 재난에 처했을 때 불교계는 이 중생 구제의 가치를 발휘하여 재난 극복에 앞장 서 왔다. 

전통시대의 재난은 주로 전쟁과 전염병, 그리고 기상이변으로 인한 가뭄, 홍수, 성변(星變) 등을 말한다. 이 글은 이러한 재난에 대처하는 불교적 해법, 대응책이 한국불교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재난 가운데 국가와 생명의 존립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협은 전쟁이다. 한국불교의 역사에서 전쟁에 대한 대응으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고려의 대장경 조성과 조선의 의승 활동이다.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맞서 시작한 대장경 조성은 초조, 재조의 대역사를 이루며 마침내 국난 극복의 초석이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왜란과 호란의 국가적 위기에서 분연히 궐기한 의승 활동은 사명당대사의 말처럼 ‘중생을 구호하는 일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일’ 곧 중생 구제의 실천이었다. 

근대의학이 발전하기 이전까지 역병은 약방(藥方)으로 다스리기 힘든 재앙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으니 하늘을 위무하고 역귀를 물리치는 각종 의례를 시행하였다. 경전과 다라니에는 역병에 대처하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한다. 경전에서는 대체로 역병의 발생 원인을 불법이 쇠퇴하는 말세의 현상으로 진단하고 그 해결책으로 불법의 회복과 정법의 실현을 강조한다. 다라니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방법, 즉 역병퇴치 의례를 제시한다. 이러한 차이는 있지만 경전과 다라니의 대처법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모두 독송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금광경’과 ‘반야경’ 등을 읽거나 특정한 다라니를 지성으로 외우면 역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금광경(금광명최승왕경)’은 사천왕이 바른 법을 닦아 행하며 세상을 수호한다고 설한다. 정법으로 통치하는 나라에는 사천왕과 선신(善神)들이 국토의 쇠락, 외적의 침략, 기근과 질병 등 각종 재난으로부터 보호해준다고도 한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이 사천왕에게 정법을 행하는 수호자 역할을 기대하며 재난이 있을 때마다 금광명경도량을 자주 열었다. 

재난을 물리치는 이른바 소재도량을 가장 많이 개설한 시기는 고려시대였다. 이 시대 국가에서 진행한 도량과 법석, 재 등의 불교의례는 83종, 1,200회 이상이었다. 이러한 불교의례는 백성의 안심을 도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의례는 사회 발전의 저해 요소에 대한 불교적 해법으로서 국가의 유지 발전에 중요한 기능을 제공하였다. 고려는 역병이라는 국가의 재난에 봉착할 때마다 다양한 대응책을 불교의례에서 찾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반야도량, 금광명경도량, 경행, 불정도량, 마리지천도량, 점찰회, 소룡도량, 수륙재, 약사도량, 관음기도 등이었다. 

이 중에서 의식의 절차와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사례가 경행이다. 경행은 원래 출가자들의 선수행의 일부였다. 특정한 날 특별한 목적으로 행하는 의례가 아니라 일상의 수행법이었다. 고려의 경행은 1046년(정종 12) 처음 시작하였다. 먼저 개경의 거리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각각 채색한 누각 모양의 들것에 ‘반야경’을 넣고 행진한다. 나발을 울리고 각종 번(幡)과 개(蓋)를 앞세운다. 스님들은 법복차림으로 향불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며 불경을 외운다. 관리들도 공복 차림으로 따라가며 거리를 순행한다. 그 뒤에 백성들이 불경을 따라 외며 행렬에 참여한다. 이때부터 경행은 연중행사로 진행되어 고려시대 내내 이어졌고, 조선초기인 1422년까지 계속되었다. 재난에 대응하는 ‘반야경’의 위신력과 효험이 400년이 넘게 지속되며 숭유억불의 조선초까지 여전히 유효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불교의례 가운데 가장 중시되었던 사례가 수륙재이다. 조선의 창업자 태조는 1395년 자신이 몰살시킨 고려 왕족의 영혼을 천도하는 수륙재를 삼화사 등에 개설하였다. 2년 뒤인 1397년에는 국가의 공식의례로서 수륙재를 개설하는 국행수륙사(國行水陸社)를 진관사에 설치하기에 이른다. 태조는 신왕조 건국 직후 국가의 안정을 위해 민심을 결집할 수 있는 방안을 수륙재에서 찾고자 하였다. 수륙재는 불교의 영혼천도의식 중에서 가장 효율적이었고, 대규모의 의식을 통해 많은 사람이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기회였다. 국왕이 수륙재에 참여하여 고려 왕족을 비롯한 신왕조의 개창과정에서 사망한 영혼들을 천도함으로써 신왕조의 포용성과 관용을 보여주었다. 즉 수륙재를 통해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는 동시에 과거와 단절하는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이후 수륙재는 본래의 목적인 영혼천도 뿐만이 아니라 역병 구제, 수명 장수, 해운의 안전, 후손의 발복, 천재 퇴치 등 다양한 목적으로 설행되었다. 이처럼 수륙재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전통문화와 풍속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억불의 시대에서 불교가 존립할 수 있었던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수륙재는 근현대사회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1914년 봉은사 주지 나청호(羅晴湖)스님은 전쟁에서 사망한 혼령을 위무하기 위해 한강에 30척의 배를 띄워 대규모 수륙재를 거행하였다. 1936년 월정사 강릉포교당에서도 수해로 사망한 영혼을 위로하는 수륙재를 개설하였다. 

전통사회에서 가뭄과 홍수, 성변(星變) 등의 기상이변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재앙이었다. 과학문명이 발전하기까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기도와 의례뿐이었다. 기상이변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가뭄이었고 이에 대처하는 다양한 의례가 등장하였다. 불교경전에 비를 기원하는 ‘대운륜청우경(운우경)’이 있다. 윤개용왕이 부처님께 단비를 내려 모든 생물이 잘 자라고 안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큰 자비심을 행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큰 자비심의 위덕으로 신·구·의의 3업을 행한다. 그리고 ‘시일체중생안락(施一切衆生安樂)’의 다라니를 항상 독송하면 때맞추어 단비를 내려 모든 싹들이 잘 자랄 수 있다고 설한다. 한국불교에서 이 ‘운우경’에 입각한 기우제가 개설되었다. 고려 1건, 조선 4건이 확인되는데, 기우제의 명칭을 경전 이름에 따라 ‘운우도량(雲雨道場)’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불교기우제의 사례에서 ‘보공재(報供齋)’라는 특이한 재가 있었다. 1449년(세종 31) 한양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기우제를 직접 주관하도록 하였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기원문을 대독하며 기도하였다. 140여명 승도가 사리탑을 돌며 예불하고 범패와 범무가 펼쳐졌다. 승도가 법당을 누비며 기우의례를 행하고 감찰을 위해 파견되었던 사헌부 관리들도 동참하였다. 3일 후 마침내 비가 내렸다. 세종은 이에 감동하여 스님들에게 포물을 하사하고 절에 보공재를 베풀도록 하였다. 즉 보공재는 말 그대로 ‘보답으로 공양을 베푸는 재’였고, 불법을 강의하는 법석까지 개설되었다. 조선사회에서 기우제 이후 비가 내리면 참여자에게 보답하는 ‘보사제(報祀祭)’의 시행이 관례였다. 즉 보공재는 불교식 기우제에 따른 보사제였다. 이러한 흥천사의 재난 극복 전통은 올해 4월 ‘코로나 종식과 국난극복을 염원하는 괘불재’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한국의 불교는 수많은 재난들, 전쟁과 전염병, 가뭄과 자연재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생로병사의 인간사에서 재난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불교적 대응은 일관된 흐름을 지닌다. 먼저 정법을 바르게 수지하고 보시와 지계, 인욕과 정진, 선정과 반야의 육바라밀 정신을 지키라고 가르친다. 재난을 물리치는 기도와 의례는 그 다음이다.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나라에 역병과 가뭄이 들면 국왕은 모든 것을 자신의 허물로 돌리고 유흥과 오락을 일절 금한 채, 근신 성찰하였다. 혹여 억울한 옥살이나 비명횡사자가 없는지 각별히 살피도록 하였다. 그 다음의 방책이 부처님, 산천과 천신께 기원하는 소재의례였다. 이 과정에서 불교의 여러 의례는 국가의 공식의례가 되어 오랫동안 중생들의 안심입명처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시대의 위태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지구촌의 많은 중생이 고통 받고 있다. 소중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육바라밀의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1631호 / 2022년 5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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