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서 꺼내준 부처님 은혜 청년포교로 보답합니다

기자명 법보

동국대 총장상 - 김승희

학교 자퇴로 마주한 막막함·절망…명상·108배로 벗어나 신입생으로 재출발
봉사·수행 두 가지 핵심 원칙으로 불교동아리 발전에 기여한 것이 큰 보람
두 번째 용기 내어 내실 다지며 동아리 회복…청년포교 씨앗 되었음에 감사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2017년, 24살이었던 나는 허리와 목에 디스크가 심해져서 재학 중인 목포해양대를 자퇴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바다에 대한 꿈을 키우며 고된 입시 생활을 버텨, 원했던 학교에 입학해 일상에 만족하던 중 찾아온 건강 문제는 고통스러웠다. 조금만 앉아있어도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픈 통증도 힘들었지만 더 무서운 건 지금의 고통이 잠깐의 성장통에 멈추지 않고 영원히 나를 괴롭힐 수 있다는 점이었다. 통증이 지속될수록 청춘의 패기와 긍정적인 에너지는 사라지고 부정적인 생각만 남아 나를 지배했다. 

그렇게 1년간 병원에 다니다 의료진의 조언에 결국 체력이 많이 요구되는 해양대를 자퇴할 수밖에 없었다. 자퇴서를 대학 행정실에 제출하고 들어오고 싶었던 교문을 스스로 나갈 때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애써 닦지 않았다.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꿈과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도 아닌, 노력으로 할 수 없는 건강 문제로 스스로 학교를 나와야만 했다. 게다가 돈도, 기술도 없는 상황이라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것처럼 막막했다. 부모님과 주위 어른들은 “젊은 얘가 그걸 못 견디니….”라고 핀잔을 주셨고, 주변 사람들도 컨디션이 안 좋은 나를 떠나갔다. 결국 스스로 고립되는 게 낫다고 생각해 휴대폰도 정지시킨 뒤 아무도 만나지 않고 병원만 다녔다. 

그 기간 스스로를 비관하며 허송세월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 영화처럼 작은 구명보트 하나에 몸을 의지하며 거친 바다를 견디며 생존하는 느낌이었다. 집에만 있는 나를 답답하게 지켜보시던 부모님은 친분 있는 스님과 차담 시간을 마련해주셨다. 그 자리에서조차 스스로 비관하며 우울해하는 나를 본 스님께서는 자기 수양과 신체가 건강해지는 108배, 그리고 바른 호흡을 통해 정신이 맑아지는 명상을 알려주셨다. 자유 시간이 정말 많았기에 반신반의 하면서도 틈틈이 명상과 108배를 했다. 매일 아침 명상으로 시작해 명상으로 마치자 깊은 우울증에 빠진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매일 108배를 실천하니 체력이 붙는 게 느껴졌다. 이제 작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오전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도전했고 그 돈으로 병원비와 용돈을 벌었다. 

그렇게 돈을 벌면서 진로에 대해 고민했다. 디스크가 심한 상황에서 어떤 직업을 통해 남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현실의 상황에 낙담하고 주저앉는 것이 아닌, 현실의 상황을 인정하고 최선의 전략을 찾았다. 앉아있는 것이 특히 힘들었던 나는 서서 하는 직업을 찾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걸 좋아하는 특성상 영어학원 선생님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1년의 자유 시간을 이용해 전남대 영문학과 18학번 늦깎이 신입생이 됐다.

학교에 들어오니 동아리가 정말 많았다. 동아리 홍보 글을 보다가 불교동아리를 발견했다. 불교동아리를 발견하자 나를 구렁텅이에서 꺼내주신 스님이 생각나 주저없이 입회했다. 한국사와 동양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덕분에 불교의 위대함과 파급력을 알고 있었다. 더 공부하고 싶었고 동기보다 늦은 대학 생활을 불교를 통해 위로받고 성장하고 싶었다. 

그렇게 대학 생활에 대한 보랏빛 기대를 안고 동아리에 들어왔지만, 인원은 10명이 되지 않았고 프로그램도 부재했다. 그 적은 인원에서도 다음 해에 성균관대로 떠나는 인도 여성(알차나)이 회장이었고 한국인보다 외국 교환학생이 많았다. 나는 그 기간에 사람들과 친목을 다지기보다 동아리방에 비치된 불교 서적을 읽거나 유튜브를 통해 스님들의 강연을 접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그렇게 18년도가 흘렀고 회장(알차나)은 예정대로 성균관대로 떠나며 내게 19년도 회장 역할을 부탁했다.

회장직을 수락한 나는 ‘불교란 무엇인가’ 생각하며 어떤 동아리를 만들지 고민을 거듭했다.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니 ‘귀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유일신을 믿는 다른 종교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이 핵심이지만, 불교는 ‘믿는다’가 아닌 ‘귀의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믿음이 시작과 끝인 다른 종교와 다르게 불교는 믿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의 종교인 불교는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그 가르침의 의미를 잘 이해하여, 행을 실천함으로써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증득하는 종교다. 이제 불교에 귀의한 20대 중반인 내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은 ‘행(行)’이라 믿고 두 가지 핵심원칙을 세웠다.

첫 번째는 ‘봉사’였고, 두 번째는 ‘수행’이었다.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돼서 학교에 좋은 영향력을 펼치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동아리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명씩 모여 좋은 사람들로 동아리가 채워지고 그 착한 집단이 거대한 태풍으로 성장해 긍정적 에너지를 학교 또는 지역 사회에 전해주고 싶었다. 뿌리 깊은 나무로 성장해서 호남 청년포교의 중심으로 전남대 불교동아리가 든든하게 자리 잡는 설레는 상상을 하며 매일 밤 행복하게 잠들었다.

그렇게 좋은 마음을 갖자 부처님의 가피로 놀라운 일들이 선물처럼 찾아왔다. 봉사활동 중 만난 정응 스님께서 동아리방을 예쁜 카페처럼 리모델링해주셨다. 스님은 바쁘신 중에도 1주일에 한 번은 직접 오셔서 격려해주시고 동아리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셨다. 스님께서 좋은 리더십을 보여주시자 동문 선배들도 동아리를 많이 후원해주셨다. 그 덕분에 회원은 10배 가까이 늘어 100명에 이르렀고 여러 불교 언론사에서 취재를 요청할 만큼 활성화됐다.  

학교를 대표하는 대규모 동아리로 성장하자 한편으로는 불안감도 들었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점진적으로 성장했다면 내가 떠나도 동아리를 이끌 사람들이 많아 안심이지만,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엄청난 성장을 거듭했기에 내실이 부족한 부분도 많았다. 임기 내에 동아리를 확실하게 성장시키고 싶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을 자책했다. 돌아보면 후회가 많았지만 그건 다음 임원진이 잘 할 것이라 기대하며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하지만 상황은 내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동아리는 젠더 갈등으로 남녀 간의 불화가 심했다. 새로운 회장은 우울증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갔고, 부회장은 다시 수능을 보겠다며 동아리를 떠났다. 더군다나 그해는 코로나19의 공포가 시작되는 때였다. 학교는 문을 굳게 닫고 동아리방 출입도 금지됐다. 오프라인 활동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리더를 잃은 동아리는 빠르게 무너졌다. 당시 나는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는데 교수님과 스님께서는 내게 다시 동아리를 이끌어달라고 하셨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재학생도 아닌 신분으로 동아리를 이끌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게다가 누구나 당황하고 예측할 수 없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내 대학생활을 바친 동아리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만 볼 수는 없었기에 두 번째 용기를 냈다.  

사적 모임 금지 상황에서 동아리가 나아갈 방향은 오직 온라인이었다. 온라인 활동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눴다. 온라인 법회, 독서 모임(인문학), 수행 소모임. 매주 스님과 함께 줌으로 동아리 회원과 한 시간씩 대화를 나눴다. 명상, 마음 나누기, 근황 이야기, 불교 공부 등. 처음에는 온라인으로 대화하는 것이 어색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의 대화에 집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독서 모임은 교수님과 스님의 도움으로 2달에 1권의 책을 함께 읽었다. 매주 일요일 각자 집에서 화상회의를 하며 정해진 분량까지 독서를 마치고 책과 인생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며 일주일을 마무리했다. 수행 소모임은 코로나19로 우울과 불안이 심해진 시대를 불교를 통해 극복해보고자 만들었는데, 불교 경전을 매일 쓰면서 불안한 청춘을 응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2021년까지 동아리 회장 역할을 수행했고 코로나19 후 한 자리 숫자였던 회원은 다시 50명대로 증가했다. 정부의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다양한 주제의 템플스테이, 다른 대학과 연합활동도 진행하면서 동아리는 끈끈해졌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동아리를 키우면서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 노력했고 이제 동아리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만큼 튼튼해졌다. 그렇게 나는 22년 새로운 회장에게 동아리를 넘겨주고 광주지부장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남은 군 복무를 수행하며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던 중 최근 화사하게 핀 벚꽃 뉴스처럼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4월16일 조선대 불교학생회가 11년 만에 다시 문을 연 것이다. 조선대 회장을 2021년에 만나 직·간접적으로 도왔던 내게는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광주여대, 광주대도 교내 불교동아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인데 조선대처럼 좋은 성과를 맺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겠다. 두 번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됐고 이상적인 불자의 모습으로 한 걸음 전진할 수 있었다. 그 행동은 단순히 나만 변화시킨 것에 멈추지 않고 호남 청년포교의 씨앗이 되었음을 알기에 부처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다. 

앞으로도 부처님 가르침을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 불자답게 행동하고 호남 지역 불교 확산을 위해 주어진 소임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1631호 / 2022년 5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