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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밖에 모르는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 만나게 된 참 행복의 길

기자명 법보

포교원장상 - 이동엽

미래 행복 위해 일에만 매진…각종 질병으로 약봉지 달고 살아
조계사에서 교리 배우고 참선 익히며 마음 다스리고 건강 회복
포교사 거듭나 음성공양‧인터넷에 법문 올리며 참 불자 삶 찾아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나는 경기도 여주 운촌리 어둔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청소년기까지 보냈다.

부모님이 연로하고 집안은 가난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농사일을 거들었다. 땔감나무를 하는 일, 소에게 먹일 쇠죽을 만드는 일, 못자리 만드는 일, 우물 파는 일, 개울에 도랑 파서 논에 물대는 일, 수박·참외·고추 심는 일, 논에 잡풀 뽑는 일, 소 꼴 베어오는 일, 소 풀 먹이는 일, 벼 베어 타작하는 일, 고구마 감자 땅콩 수확하는 일, 닭장에 먹이 주는 일 등 일은 많았다. 이렇게 1년을 보내다보면 학교공부는 뒷전이었다.

전기도 없는 시골 오지인 마을에는 버스도 다니질 않았다. 어머니는 20리가 넘는 읍내 장터로 농산물을 머리에 이고 걸어갔고 길가에 좌판을 펴고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마을에 학교가 없어서 마을회관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시작했다. 2학년 때 부터는 인근 밭에 분교가 신설되었는데 학년이 늘어남에 따라 교실이 매년 한 칸씩 늘어서 6년을 줄곧 신설 분교에서 공부했다. 당시는 옥수수 빵을 배급타서 가족과 나눠 먹던 정말 가난한 시절이었다.

성년이 되기까지 작은 시골 오지마을에서 농사일만 거들다보니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고속도로, 고속버스, 기차와 고층빌딩, 동물원, 영화관 등을 구경 한번 못했으니, 농사를 지어야만 먹고 사는 줄 알았다.

군에 입대한 이후 부대장님께서 종종 중요한 일을 나에게 맡겼고 그때 인간관계에서 성실함과 신뢰감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됐다. 

고향을 떠나 군에서 보낸 3년은 많은 것을 일깨우는 과정이었다. 특히 세상이 참 넓다는 것을 배운 소중한 시간이었다. 군을 제대하자마자 넓은 세상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향에 가서 부모님께 전역인사를 드리고는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매일 하루를 청소일로 시작해서 막노동과 궂은일을 도맡아했다. 하루 3시간씩만 자며 밤낮으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낮에는 하루 3시간씩 틈을 내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비록 아르바이트지만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의 사장님이 잠적하는 일이 발생했다. 사업은 잘 됐는데 도박 좋아하고 유흥업소 출입이 잦더니, 빚을 지고 도망을 간 것이었다.

예금해 놓은 자금을 탈탈 털었다. 오십만 원 정도 되는 돈이었다. 그 돈으로 전화 팩스를 구입하고 광화문 근처 네 평짜리 사무실 구해 직원 세 명과 함께 첫 사업을 시작했다. 가족같은 분위기로 회사를 운영한 덕에 거래처가 늘면서 서울 중심가(명동, 종로, 을지로, 퇴계로, 광화문, 시청 상권)에 중견기업(조선, 롯데, 힐튼 등) 및 상권 빌딩 오피스 등을 거래처로 만들 수 있었다. 일은 즐거웠다. IMF시대 때도 역발상을 한 덕분에 성장은 계속됐다. 

미래 먹거리에 대한 구체적 사업 계획서를 5개년, 10개년, 30개년, 50개년 단위로 만들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런데 일에 취한 나머지 몸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사업이라는 것이 항상 좋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렵고 속이 상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그냥 참았다. 그러자 언제부터인가 몸은 바짝 말라갔다. 위장병을 달고 살았고, 불면증으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 늘어나는 것은 약봉지뿐이었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수시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음을 다스리거나 혹은 상담을 해 줄 좋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의 꿈은 열심히 일해서 근사한 집짓고 멋진 옷 입고 고급승용차를 타며 가끔 최고급 호텔에 묵으며 전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몸이 부서지도록 쉬지 않고 일했다. 어느 날 돌이켜보니 나는 없고 일에 지친 노예만 존재한다는 사실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갔다.

늘어가는 약봉지를 조용히 지켜보던 아내가 말했다. 사무실 근처 조계사에 들러 ‘저녁 예불이라도 보고 오는 것이 어떠냐’는 조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소중한 권선이었다. 
조계사로 향했다. 처음인지라 낯설었고 안내해 주는 분도 없어 그냥 방석에 앉아 스님의 집전을 따라 저녁예불을 드렸다. 경전을 제대로 따라 읽지는 못했지만 곁눈질을 하며 열심히 예불에 동참했다. 그러면서 문득 불단의 부처님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아내가 조계사에 다녀온 소감을 물었다. ‘아주 편안하고 좋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계사는 재가불자 교육도량으로 커리큘럼이 잘 되어있으니 기본교육부터 차근차근 배우면서 다니면 어떻겠냐고 조언 했다. 아내가 직접 조계사 기본교육과정을 접수해 주었다. 이후로 하림 스님으로부터 불자의 기본교육과정을 이수했고 법연이란 법명과 함께 자랑스러운 불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뜻을 같이 하는 도반들과 함께 성진 스님께 기초교리 과정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업과 윤회 등을 배우며 부처님 가르침에 조금씩 다가가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재가보살의 삶의 지침인 수계를 받고 진정한 불자로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꾸준한 공부를 위해 강의용 인쇄물을 사무실 벽면에 쭉 붙여놓고는 틈틈이 시간 될 때마다 공부하면서 생각해보니 “도반이 부처님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도반들과 함께 다음 단계인 불교대학에 진학해 부처님의 생애를 배우며 부처님의 일대기를 알게 되었다. 불교문화를 익히며 탑과 신앙 전래과정을, 그리고 불교입문 교리과정을 깊게 배우면서 점차 어둔 무명에서 벗어나 지혜의 눈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특히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과 탁마하는 시간에는 신바람이 나서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거웠다. 대학원에서는 공의 도리, 연기법으로 읽는 불교, 유식학 등을 배우며 이론적인 지식이 늘어가는 것 못지않게 마음 또한 조금씩 다스릴 수 있게 됐다.

교리를 공부하고 나니, 이제는 스스로 체험하는 실행공부를 하고 싶었다. 아내와 조계사 선림원장 남전 스님의 지도로 간화선 수행을 시작했다. ‘참 나’를 찾아가는 수행공부를 시작하면서 성철 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 ‘선가귀감’을 함께 공부할 수 있었는데 옛 스님들의 수행법을 자세히 공부하고 나니, 점차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참 불자가 돼 가고 있었다. 

조주 스님의 “차나 한잔 하고 가게” 와 마조도일 선사의 “평상심이 도다”라는 화두를 참구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옷 입고 밥 먹고 배설하고 잠자는 것이 거짓 없는 우리의 일상이면서 또한 그 자체로 본모습이며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동안 더 갖고자하고 비교하면서 괴로웠던 그 마음을 껴 앉은 채로 성내고 욕심내고 화내며 살았다. 그러나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나서부터는 무명이 조금씩 벗어지는 것 같은 감응이 일면서 고통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슬픔은 슬픔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되 자신을 놓아 버렸다. 내가 얼마나 화를 내는지 혹은 어떤 것에 화가 났는지 그것을 알아차리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참회를 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되돌아보게 됐다.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삶이 아니라, 늘 진리로 중심을 잡으며 그 마음으로 살고자 다짐했다. 그러면서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마음으로 믿어졌다.

일상생활이 바로 ‘도’임을 알게 됐고 무명으로 인해 불면증과 위장병에 시달렸음을 자각하면서 건강이 찾아왔다. 우선 신체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체중이 70kg으로 적당하게 좋아지면서 얼굴에 화색이 생기고 눈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몸과 마음에 변화가 생기니 자연스럽게 사업은 더욱 확장됐다. 서울을 벗어나 전국으로, 그리고 지금은 미국과 동남아, 러시아 등과도 거래를 하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회향하기 위해 포교하기로 마음먹고 7년 전부터 조계사 불교대학 총동문회 합창단에 가입해 음성공양으로 전법하고 있으며, 법회 때마다 큰 스님의 법문을 정리해 카페 에 올려 많은 불자들의 마음에 신심의 씨앗을 심고 있다. 도반들의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때는 희열이 느껴졌다. 부처님 회상에서 나도 부처님 법을 전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6년 전 전법과 보살의 삶을 살겠다는 마음으로 포교사고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현재는 조계사 포교사팀 합창단을 창단해, 단장소임을 맡아 음성공양으로 법을 전하고 있으며 포교사팀 법회에 오신 스님의 법문도 정리해 카페에 올려 포교사들의 불심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계종 포교원 서울지역단 서부총괄 통일팀에서도 팀장 소임을 맡아 탈북민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찬불가와 곁들여 근기에 맞게 전하고 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포교사팀 단체 안에서 나의 일 너의 일을 가리지 않고 힘을 합쳐 함께 해내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힘이 솟는다.

일반인과 불자들에게 음성공양으로 법음을 전할 때, 큰 스님의 법문을 정리하여 카페에 올려 불자들에게 불교와의 인연을 심을 줄 때 느끼는 기쁨은,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지 못했을 때 꿈꿨던 고급승용차를 타는 것보다, 고급호텔에 묶으며 전 세계를 여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과 환희심으로 다가온다.

앞으로도 도반들과 함께 부처님 법을 음성공양하고, 스님 법문을 정리해 인터넷에 올리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할 생각이다.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이 부처님 법 안에서 더욱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내가 불자(佛子)이듯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부모님은 바로 부처님이라 생각한다. 이런 변화된 나의 삶과 모습은 온전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 결과라는 점에서 불법을 만난 그 인연에 감사한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자랑스럽다.

[1631호 / 2022년 5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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