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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32)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 (15)

의상 귀국 이후 원효불교 최종 종착지는 화엄사상으로 향해

의상 통해 중국 지엄의 화엄학 새로 접하며 사상에 일대 전기
화엄 관련 저술 대부분 의상 귀국 이후 추정…학계 주목 필요  
화엄경소 10권은 60권 화엄 전체에 대한 원효 해석임은 확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문화재청]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문화재청]

원효저술 편년에서 제3기는 태종무열왕 8년(661) 당 유학의 길에서 만법유식의 도리를 깨닫고 귀환한 후 10여 년간에 해당되는데, 원효 나이 40~50대 장년기였다. 원효저술 대부분이 이 기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목되는 것은 원효의 저술 가운데서 유일하게 저술 시기가 함형(咸亨) 2년(문무왕 11, 671) 7월16일로 명기된 ‘판비량론(判比量論)’ 그리고 원효가 입적한 지 100여년 이후인 애장왕대(800~808)에 수립된 ‘고선사 서당화상비’에서 원효 저술로 특기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 2종이었다.

‘판비량론’은 원효의 불교논리학을 대표하는 저술이고, ‘십문화쟁론’은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 성립의 전제조건인 화쟁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저술들은 완본이 아닌 단간으로 전해져 올 뿐이고, 한국·중국·일본의 불교 문헌에 남아 있는 일문에 의해서 복원이 시도되어 왔을 뿐이다. 따라서 원효불교 연구에서 대표하는 저술은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와 실천원리를 제시한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 등 2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저술들은 다행히 완본으로 전래돼 많은 연구가 축적됨으로서 개략적이나마 원효불교사상의 이해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원효불교의 사상체계와 실천원리의 정립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대승기신론’과 ‘금강삼매경’ 등 두 경론이 오늘날 학계에서는 ‘위경(僞經)’ 논란에 휩싸여 제작의 시기와 장소, 제작자 등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원효불교의 역사적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경론의 성립 문제로까지 우리의 이해를 확대시켜야 할 것이다.

‘판비량론’과 ‘십문화쟁론’ 그리고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 등이 모두 원효의 저술 편년 제3기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이 기간은 원효 저술의 전성기였을 뿐만 아니라 원효불교의 논리학과 방법론, 사상체계와 실천원리가 정립된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무왕 10년(670) 의상(625~702)의 귀국을 계기로 지엄(600~668)의 화엄학을 새로 접하게 되면서 원효불교는 일대 전기를 맞게 되었다. 원효 말년 불교사상에는 의상의 영향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효는 의상보다 8세 연상의 선배였지만, 함께 당으로 유학을 기도한 바도 있었던 매우 친밀한 도반의 관계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원효가 연상의 선배였고, 구역불교의 이해를 기반으로 신역불교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하였다하더라도 동아시아 불교의 중심인 당 불교계의 소식과 새로운 불교인 화엄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구도심에 불타고, 당의 불교계 동향에 대해 예민한 관심을 가졌던 원효의 태도를 감안하면 화엄종을 새로 창립한 지엄의 문하에서 10여 년간 수학하고 귀국한 의상에게서 당 불교계의 소식을 듣고, 새로운 불교사상을 배우려고 하였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균여의 ‘십구장원통기’ 권하와 ‘법계도기총수록’ 권하의 1에 의하면, 지엄으로부터 의상이 배워온 수전법(數錢法)이 원효에게 전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원효는 이 수전법을 의상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저술인 ‘화엄종요(華嚴宗要)’와 ‘보법기(普法記)’에 인용하고 있었다. 원효에게는 화엄사상 관련 저술로서 이들 ‘화엄경종요’1권·‘보법기’1권 이외에도 ‘화엄경소(華嚴經疏)’10권·‘화엄강목(華嚴綱目)’1권·‘화엄경입법계품초(華嚴經入法界品抄)’2권·‘일도장(一道章)’1권(의천은 ‘신편제종교장총록’에서 ‘화엄경’의 장소로 분류하였으나, 일본의 정창원문서에서는 ‘기신론일도장(起信論一道章)’이라 하여 ‘대승기신론’ 관련 저술로 분류하였음)·‘대승관행(大乘觀行)’1권 등 모두 7부15권이 알려져 있다. 이 밖에 징관의 ‘칠처구회송석장(七處九會頌釋章)’에 인용된 ‘화엄관맥의(華嚴關脈義)’를 포함하면 8종이 되지만, 엔초(圓超)의 ‘화엄종장소병인명록(華嚴宗章疏幷因明錄)’에서는 법장의 저술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위 저술들 가운데 ‘대승기신론소’에 앞서 저술된 ‘일도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화엄 관련 저술 6종은 모두 의상이 귀국하는 670년 이후의 저술로 추정된다. 

의상의 귀국을 계기로 하여 지엄의 화엄학에 대한 정보를 얻고 ‘화엄경’에 대한 평가가 변화된 뒤의 저술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상으로부터 지엄의 수전법을 전해 듣고 저술한 ‘화엄종요’와 ‘보법기’는 말할 것도 없고, 원효의 ‘화엄경’ 관련 중심 저술인 ‘화엄경소’ 10권도 역시 의상 귀국 이후의 저술일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이러한 ‘화엄경’ 관련 저술 시기는 670년 의상의 귀국 이후부터 원효 말년까지를 저술 편년의 제4기로 설정하여 ‘대승기신론’과 ‘금강삼매경’의 주석을 통한 사상체계와 실천원리를 정립한 제3기와는 구분하고자 한다. 제4기는 원효 말년의 저술 시기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의 ‘화엄경’ 관련 저술과 원효의 화엄사상은 오늘날 학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제4기 ‘화엄경’ 관련 저술의 검토를 통하여 원효불교의 최종 귀결된 경지가 화엄사상이었음을 밝힘으로서 동아시아불교에서의 원효불교의 역사적 위치를 새롭게 평가하려고 한다.

원효가 ‘화엄경소’를 주석하였다는 사실은 ‘삼국유사’권4 원효불기조에 전해지고 있다.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소’를 짓다가 제4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자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소송으로 인해서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로 나누었으므로 모두 그의 위계를 초지(初地)라고 하였다.” 원효의 행적에 관한 자료 가운데 그의 저술이 언급되는 사례로서는 ‘삼국유사’ 외에 ‘고선사 서당화상비’의 ‘십문화쟁론’과 ‘화엄종요’ 그리고 ‘송고승전’ 원효전의 ‘금강삼매경론’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원효가 ‘화엄경’ 십회향품에서 절필하였다는 ‘삼국유사’ 기록은 오늘날 학계에서는 신빙하는 분위기이고, 또한 ‘화엄경소’가 미완성으로 끝난 원효의 최후의 저술로 이해되고 있다. 나아가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의 화엄의 무애행(無碍行)에 대한 내용과 결부되어 대중교화의 역사적인 사실로 믿어지고 있다. “원효가 이미 계율을 어겨 설총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였다.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無碍人)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문구에서 이름을 따서) 이름을 무애호라고 하고 이에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며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無)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그런데 원효의 ‘화엄경소’에 대해 의천(1055~1101)의 ‘신편제종교장총록’은 전체 10권으로 기록하면서 “원래 8권이었는데, 그 가운데 제5권을 2권으로 나누고, ‘화엄종요’를 더해서 10권으로 만들었다”는 주석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데 ‘화엄경소’가 10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은 의천 이전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고문서에서는 의천 이전에 이미 10권이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일본고문서’에 의하면, 덴표(天平)15년(743)·16년(744) 등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뒤 도다이지의 엔초(圓超,?~914)가 914년에 칙명으로 작성한 ‘화엄종장소병인명록’과 에이초(永超)가 1094년에 편찬한 ‘동역전등목록’ 등에도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으며, 고경(古經, 60권본 ‘화엄경’)에 대한 주석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가마쿠라시기 화엄종 교넨(凝然)의 ‘화엄법계의경’에서 “‘화엄경소’10권은 60권을 해석한 것이고, 원효대사의 찬술이다”고 하여 60권본 ‘화엄경’에 대한 원효의 주석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이들 여러 기록으로 보아 원효의 ‘화엄경소’는 처음부터 10권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화엄경종요’와 나누어진 8권 본도 별도로 전해져 오다가 의천에 의해 합해져서 10권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김천학은 원효의 ‘화엄경소’가 처음부터 10권이었음을 들어 원효가 ‘화엄경’ 제4 ‘십회향품’에서 절필하였다는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의 사실성을 부정하고, 전체를 주석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그 절필설화 성립의 원형으로서 중국 지론종의 정영사 혜원(523~592)의 고사를 들었다. 즉 정영사 혜원이 만년에 ‘화엄경’의 주석서를 저술하는데, ‘십회향품’에 이르러 갑자기 심장이 아파서 보니, 심장 부분의 모공으로부터 피가 흐르는 것을 투시하였다고 한다. 또 꿈에서 낫을 들고 산에 올랐으나 반쯤 가서 힘이 부치는 꿈을 꾸고 ‘화엄경’ 주석을 중지했다는 전승을 혜원의 ‘화엄경소’가 불완전했다고 추정한 기무라 기요타카의 해석을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결론으로서 ‘삼국유사’의 원효 절필 기사는 원효의 대중교화를 강조하기 위해 혜원의 이 고사를 원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추정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서 “원효가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찬술하였는데, 제4 ‘십회향품’에 이르러 절필하였다”는 표현 가운데, 저술 장소가 분황사였다는 기록은 원효와 분황사의 관계로 보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제4’와 ‘십회향품’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서 최원섭은 “일찍부터 원효의 ‘화엄경소’를 전해주는 목록들이 10권(또는 8권)이라고 한 것을 보아 ‘화엄경소’의 권4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십회향품’은 60권 ‘화엄경’의 제21품이므로 ‘제4’가 ‘제4품’이라는 의미도 아니다”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십회향품’이 권14부터 권22까지 해당되기 때문에 ‘제4’는 ‘권14’의 오기로 보거나, 아니면 십회향이 보살수행의 52계위인 10신(信)·10주(住)·10행(行)·10회향(廻向)·10지(地)·등각(等覺)·묘각(妙覺) 가운데 네 번째에 해당되므로 ‘제4’라고 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하였다. 

그러나 설득력이 매우 약한 주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삼국유사’의 원효불기조는 찬술자인 일연이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원효의 행적과 교화의 업적에 대한 서술은 ‘속고승전’과 ‘행장’에 미루고 ‘향전(鄕傳)’에 실린 한두 가지의 특이한 사적만을 게재한 데 불과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민간에서 즐겨 전승되기 좋은 사실성이 약한 설화적인 내용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연은 애초에 원효의 전기나 사상을 정확하게 서술할 목적이 없었고, 더욱이 저술가나 사상가로서의 원효상을 전해주려는 의도도 없었다. 그 결과 원효의 저술이나 불교사상에 관한 내용은 생략되거나 부정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원효를 이해하려고 할 때 민간에 설화적인 형태로 전승되는 자료에 의거한 대중포교사·교화사로서의 원효의 모습과 원효의 저술을 통해 이해되는 저술가·사상가로서의 원효의 모습은 불연속선을 그릴 수밖에 없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35호 / 2022년 6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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