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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뷰징’을 꼭 써야 했나

기자명 남춘호

지난 8월1일, 대통령실에서는 “국민제안 Top10을 선정하여 국정에 반영하려 했으나, ‘어뷰징’ 때문에 우수 제안을 고를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 관련 기사에서는 주로 중복투표, 해외IP 등 부정행위 문제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어뷰징’이 어떤 단어인지 유추가 어려워서,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했다가 당황스러웠다. 첫 번째는 필자가 아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단어의 뜻과 철자는 알았지만, 발음을 몰랐던 것이다. 어뷰징의 기본형은 ‘abuse[어뷰즈]’로, 부정의 접두어 ‘ab-’와 사용하다의 ‘use’가 합쳐져 ‘잘못 사용하다’는 뜻이다. 주로 ‘오용하다, 남용하다’로 많이 사용되며, 확장되어 ‘(약자를) 학대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두 번째 이유는 본래의 뜻으로는 유추하기 어려운 전문용어로 사용되기 때문이었다. 검색 결과로 ‘뉴스 어뷰징’(비슷한 기사를 다수 게재), ‘게임 내 어뷰징’(해킹, 복수계정 사용 등) 같은 내용이 주로 나왔다. 전문용어 측면에서 관련 논문도 살펴보았는데, 국내와 국외의 사용 양상이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제목에 어뷰징이 포함된 국내 논문 25건을 검토해보니, 2011년 즈음부터 등장해 주로 언론, 게임, 마케팅분야에서 사용됐다. 주요 키워드는 인터넷 기사, 광고, 게임, 소비자 리뷰 등이었다. 반면 국제적으로 우수한 논문이라 불리는 SCI, SSCI에서 검색해보니, 아동학대, 노인학대, 성학대, 약물남용 등의 본래 의미로 많이 사용됨을 알 수 있었다.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며, 학문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다. 사회학자인 니클라스 루만은 커뮤니케이션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단위라고 주장한다. 그는 주체와 행위가 아닌 의사소통을 통해 새로운 질서로의 변화, 즉 창발(創發)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의사소통을 통해 늘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 역시 의사소통행위를 통해 사회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의사소통행위에서는 의미가 통해야 하고, 진정성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말하는 과정에서 수행적 적절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원어나 전문용어를 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원어를 번역하면 본연의 뉘앙스를 전달하기 어려운 경우다. 예를 들어 ‘옴니버스(omnibus)’라는 라틴어가 있다. 원래 ‘모든 것들에게’라는 뜻에서 ‘여러 사람이 타는 버스’를 거쳐 ‘별개로 모아 놓은 작품 구성’으로 의미가 굳어졌다. 이처럼 본연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서 외국어 발음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상대방과 의사소통에서 전략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다. 전문용어를 씀으로서 전문가의 권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후광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굳이 후광효과를 바란다면야 그것도 나름 전술이겠지만, 명확한 의미전달이 필요한 의사소통의 측면에서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대통령실이 국민과의 소통에 일부 소홀했다고 판단한다. 만일 중복투표, 부정사용 등의 쉬운 단어를 사용했다면, 정확도는 떨어졌더라도 오히려 명쾌하게 의미를 전달했을 것이다. 굳이 대선 과정의 ‘아리백’(RE100)과 같은 경우를 국민들도 비슷하게 느낄 필요는 없지 않는가. 게다가 어뷰징이라는 전문용어를 국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혹자는 필자가 침소봉대한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일은 분명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바로 의사소통 과정에서는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상대방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노력이 부족해지고 멈춰지는 순간, 표현은 부정확해지며 의미는 왜곡되기 시작한다. 부처님과 가섭존자처럼 이심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빠르고 복잡하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도 “기교 부리지 말고, 기본에 충실하라”는 충고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남춘호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연구위원
namchoonho@naver.com

[1646호 / 2022년 8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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