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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따뜻한 밥-이기철

기자명 동명 스님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자격

만물에 보탬 돼야 밥값한 것 
공짜밥은 결국 갚아야 할 빚
고달픈 인생길 걸어갈지라도
삶의 지침 잊지 말고 힘내야

신발마다 전생이 묻어 있다
세월에 용서 비는 일 쉽지 않음을
한 그릇 더운 밥 앞에서 깨닫는다
어제는 모두 남루와 회한의 빛깔이다
저무는 것들은 다 제 속에
눈물 한 방울씩 감추고 있다
저녁이 끌고 오는 것이 어찌 어둠뿐이랴
내 용서받고 살아야 할 죄의 목록들
내일 다시 걸어야 할 낯선 초행길들
생은 사는 게 아니라 아파하는 것이다
너는 몇 켤레의 신발을 버리며
예까지 왔느냐
나무들은 인간처럼 20세기의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늦었지만 그것이 내 믿음이요 신앙이다
나는 내 믿음이 틀렸더라도 끝내 수정하지 않으리라
쌀 안치는 손의 거룩함을 알기 전에는
이런 말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되리라
생을 업고 일을 업고 가기 위해선
이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종교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선

(이기철 시집, ‘가장 따뜻한 책’, 민음사, 2005)

이 시에 세 가지 중요한 것이 등장한다. 신발과 밥과 나무이다. 신발은 내가 살아온 발자취를 상징하고, 밥은 내 생명을 운용할 힘을 주는 연료에 해당하며, 나무는 삶의 지침을 제시해주는 종교이다. 시인은 신발이 맨발의 인간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지능적인 도구를 넘어, 지나온 굴곡진 길을 새겨놓은 업식(業識)과도 같다고 말한다. “신발마다 전생이 묻어 있다”는 표현은 곧 신발이 주인의 정체성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가 숲속으로 유배 가 있는 동안 왕위에 오른 이복동생 바라타는 자신은 형 대신 통치한다는 의미에서 왕좌에 형의 신발을 올려놓았다. 불상을 만들지 않던 시대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 부처님의 발자국이었듯이, 주인이 부재할 때 그를 대표하는 상징이 그가 신었던 신발이었던 것이다.

고단한 신발을 벗고 앉은 자리에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놓여 있다. 밥이 신발에게 묻는다. “밥값은 하고 여기 앉은 거냐?” 신발은 말문이 막힌다. 밥값을 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 밥에 천지만물의 은혜가 스며 있다면, 세상 천지만물에 자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어야 밥값 했다 할 것이다.

부동산 투기나 시세차익으로 밥을 먹고 있다면, 그 밥은 공짜밥이다. 수행자로서 열심히 수행하지 않고 밥을 먹고 있다면, 그 밥도 공짜밥이다. 공짜밥은 결국 빚이다. 지금 먹는 밥은 달콤하겠지만, 결국은 다 갚아야 할 빚이어서, 그 빚 때문에 쫄딱 굶어야 할 때가 온다.

밥을 먹다가 내다본 뜰에 나무들이 서 있다. 시인은 나무들을 보면서 “나무들은 인간처럼 20세기의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늦었지만 그것이 내 믿음이요 신앙이다”라고 말한다. ‘늦었지만’이란 표현으로 보아 시인에게 나무가 믿음이자 신앙이 된 것은 최근인 듯하다. 아니 시인에게만 늦은 것이 아니라 20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늦었다는 뜻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나무를 믿고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에 인간이 범한 오류는 무엇일까? 이 시의 언어를 빌려 말하면, “쌀 안치는 손의 거룩함”을 모르거나 무시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시인은 또 “이런 말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되리라”라고 경고한다. 쌀 안치는 손의 거룩함은 화려한 언설에 있지 않고 나무처럼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는 침묵 속에 있다는 뜻이리라.

우리도 시인처럼 저녁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확인해보자. 어둠의 글씨 속에 “내 용서받고 살아야 할 죄의 목록”이 있고, 어둠의 그림 속에 “내일 다시 걸어야 할 낯선 초행길”의 지도가 있다. 그 목록 속에서 내일 또 아파할 것이고, 그 지도를 향해 또 몇 켤레의 신발을 버리며 고달픈 인생길을 걸어갈 것이지만, 언제나 뜰 앞을 지키는 나무 종교의 진리, ‘쌀 안치는 손의 거룩함’으로 새겨지는 밥의 경전 말씀은 잊지 말자.

오늘도 신발이 밟고 가는 길을 세심하게 내려다보고, 인간의 삶 주위를 조용히 외호하는 나무들을 올려다보면서, 따뜻한 밥 한 그릇 앞에 두 손 모으고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 최소한의 밥값은 했던가? 오늘은 꼭 밥값 해야지!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646호 / 2022년 8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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