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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중생은 생각으로 살고 제불보살은 지혜로 살아갑니다

중앙승가대 전 총장 종범 스님

도업을 이뤄 생각이 지혜로 바뀌면 비로소 깨달음 얻게 돼
중생은 생업에 골몰하며 얻으려 하나 모든 것은 무상할 뿐
깨달음 이룰 것 발원하고 반야지행 닦아야 밝게 볼 수 있어

종범 스님은 생업에 종사하던 의식에서 깨어나 깨달음을 얻는 공부에 들어가길 당부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도업을 이루신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보리를 이루는 일을 도업이라 하고, 일체제불은 모두 도업을 이룬 분이며 일체중생은 생업을 이루었습니다. 생업은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면 도업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대방광불화엄경’의 ‘세주묘엄품’에서 첫 번째 말씀하시는 것이 도업을 이룬 내용입니다. 모든 지혜를 이룬 분을 일체제불이라고 하며, 일체제불은 일체종지요, 일체종지는 일체제불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는 순간 지혜가 생겼습니다. 중생은 생각으로 살아가는 반면 일체제불이 도업을 이룬 순간에는 생각이 지혜로 변합니다. 이것을 “생각이 바뀌어 지혜가 되었다”고 하고,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을 통해 이룬 지혜는 과거 현재 미래와 통합니다. 그리고 생각을 바꿔서 지혜를 이룬 그 몸을 ‘법신(法身)’ 혹은 ‘지신(智身)’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변해서 지혜로 이루어진 그 몸이 시방에 두루하고, 지혜의 몸이 삼세에 다 들어가 지혜의 몸이 시방에 두루하다는 것으로,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과정이고 이룬 것은 지혜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삼세에 다 들어가고 시방에 두루합니다. 이것을 정각이라고 합니다. 정각을 이루어 지혜를 드러내면 만법이 일심이고, 일심이 만법인 경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그대로 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물건만 보고 마음을 모릅니다. 이를 무명, 미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도몽상, ‘늘 꿈꾸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원각경’에 ‘무변허공(無邊虛空) 각소현발(覺所顯發)’이라는 말이 있는데, 무변이라는 것은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변하고 온 우주가 각이 많은 마음이 나타나고 일어난다는 것인데, 여기서 각은 마음으로 각소는 ‘아는 마음이 나타난 장소’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 그릇을 보면 이것이 마음이 나타난 장소입니다. 산을 봐도 그 산이 마음이 나타난 장소이고, 하늘을 봐도 그 하늘이 마음이 나타난 장소입니다. 그것이 ‘각소현발’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인데, 미혹한 중생은 물건만 보고 이게 자기 마음이 나타난 곳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것이 일체중생과 일체제불의 차이입니다.

성정각심(成正覺心)이 정각을 이룬 마음이고, 그 마음이 마치 해인(海印), 즉 바다에 도장을 찍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바다를 멀리서 보면 물은 안 보이고 그 물에 비친 것만 보입니다. 그것을 해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이 하늘에 올라가지도 않았고, 하늘의 별과 달과 해가 물속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바다를 보면 그곳에 별도 있고 해도 있고 달도 있고 산도 있습니다. 그것이 깨달은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구경청정이라고 합니다.

그 깨달은 마음속에 세 가지 종류의 세간이 있는데 국토세간, 중생세간, 불보살세간입니다. 불보살도 그 마음속에 있고, 국토도 마음속에 있고, 중생도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성정각심, 그것이 비유하면 해인인데 해인 속에 모든 게 다 있듯이 정각을 이룬 그 지혜의 마음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은 생업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생업은 사는 일이고, 사는 일이란 곧 먹는 일입니다. 먹고, 잠자고, 옷 입고, 배설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배고프니까 먹었고, 피곤하니까 잠잤고, 춥고 더우니까 옷 갈아입었고, 속이 그득하니 배설했고, 그러다 보니까 산 것이지 뭐 큰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으로 하다 보니 생각은 세 가지로 가르칩니다. 생각을 식이라고 하는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이 대상을 접촉해서 식별을 합니다. 전부 식별을 해야 거기서 몸에 좋은 것을 먹고, 몸에 안 좋은 것은 안 먹고 그렇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식이라는 것은 사는 데 아주 집중적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아닌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데, 죽음을 판단할 때 의식이 있는지를 봅니다. 의식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의식입니다. 의식은 어떻게 유지가 될까요. 호흡과 체온이 있어야 합니다. 호흡과 체온과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숨 끊어지면 아닌 것이고, 체온이 다하면 아닌 것이고, 의식이 다하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식별을 하면 이 식별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게 다 기억이 돼서 자기 나름대로 생각으로 헤아려서 정리를 합니다. 이것을 사량식(思量識)이라고 합니다. 또 제7식이라고도 합니다. 식별식은 제6식인데, 식별하고 생각해서 정리한 내용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다 저장이 되는데, 그것을 종자식이라고 하고 제8식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배워서 저장이 됐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이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지, 그냥 갑자기 보면 모릅니다. 보면서 알고, 알고 나면 생각하고, 또 식별하고 생각한 것을 저장하고, 그 저장된 것이 또 나타나서 식별하고, 이렇게 돌고 도는 것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하면서 금생에 저장된 종자가 내생에 또 태어나서 또 그렇게 끝도 없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없습니다. 무상하고 허망한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생긴 것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철저히 알면 도업을 이루게 됩니다. 생긴 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모르면 영원히 만들어내려고만 하지, 깨달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만들어도 그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철저하게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만들어 놓아 봐야 다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 ‘이게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거를 가만히 돌아보면 꿈과 같은데 현재는 과거의 연속입니다. 또 미래는 현재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또 과거가 됩니다. 돌고 도는 것입니다. 과거가 현재가 되고 현재가 미래가 되고 미래가 다시 과거가 되는 삶을 살면서 이렇게 죽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그것이 신심이 됩니다. 믿는 마음이라는 건 결정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깊은 이해가 있어야 결정심이 나오는데, 이해를 하려면 관찰을 해야 합니다.

신심을 일으켜서 이 세상에서 무슨 업적을 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어야 되겠다’는 발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반야 지행을 닦아야 합니다. 중생들은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지만, 보살들은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만들다가 죽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관찰합니다. 그것을 ‘반야바라밀행’이라고 하고, 그 관찰이 바로 밝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밝게 보는 것에서 생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자성, 즉 자체성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게 반야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을 조견, 관조라고 합니다. 여기서 반야삼매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관조를 하면 물건에 물건이 없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본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물건을 보면서 물건에 물건이 없음을 보면, 그 다음에는 보는 마음을 또 돌아보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또 돌아보면 마음에도 마음이 없습니다. 물건에 물건이 없고, 마음에 마음이 없으면 일심이 청정하게 됩니다. 이 청정심으로 들어가는 것이 세 번째 관조입니다. 첫 번째는 물건을 보고, 두 번째는 마음을 보고, 세 번째는 물건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청정심,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삼매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본래 마음이 청정한 것을 느끼는 건 순간이고, 다시 이 세상일에서 헤매는 것은 계속됩니다. 하지만 하고 또 하다 보면 생사업은 점점 줄어들고, 반야업은 점차 늘어나서 초지보살이 이지보살이 되고, 그러면서 십지보살까지 올라 등각에 올라가면 그 종자식이 없어지게 됩니다. 식 중에 제일 오래도록 남는 것이 종자식인데 식별식은 없어지는데 사량식이 더 오래가고 마지막에 종자식까지 없어지면 정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은 생각으로 살고, 일체보살은 반야로 살고, 일체제불은 지혜로 산다고 했습니다. 일체제불은 일체종지이고, 일체보살은 일체반야이고, 일체중생은 심의식심입니다. 의식과 반야와 보리, 일체종지 지혜 이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전식성지(轉識成智)입니다. 식을 바꿔서 지혜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도업을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로병사를 영원히 해결하는 길을 찾아 나섰고, 그렇게 찾은 것이 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일체 만물에는 자성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일체 만물의 자체성이 없는 걸 보는 것을 반야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자성이 없느냐, 그것은 법의 자성이 없어서 이타의성이나 다른 것으로 성을 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긴 것이 곧 생긴 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것을 깨달아 아는 마음이 지혜이고, 그 지혜는 시방에 가득해 생사를 해결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생사를 생사 연장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라, 생사 해탈로 해결한 것입니다.

멸진삼매에 들어 생사를 연장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멸진 연장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대신 해탈 생사에 생사의 본성이 없는 것을 보고. 보는 지혜가 삼세에 가득하고 보는 지혜가 시방에 가득한 일체종지를 이루어서 생사 해탈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고 합니다. 일체종지를 이루어서 일체만법에 자재하는 것이 깨달음이고 그것이 도업을 이루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이룬 도업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함께 도업을 이루자고 말을 못하는 것은 돌아서면 생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 산중에만 있어서 몰랐을 때는 그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해에 젖어들면 달라지게 됩니다. 반야가 깊어지면 무상한 현상을 보는 게 아니라 생멸 없는 실상을 생멸 속에서 보게 됩니다. 적멸실상을 생멸 현상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파도에서 물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파도가 치는데 거기에 물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은 적멸실상이고 파도는 생로병사임을 아는 것이 반야입니다. 물건에 물건이 없고, 물건을 보는 마음에 마음이 없습니다. 오로지 일광지, 한 광명의 지혜가 있을 뿐입니다. 생업에 전념하던 그 의식에서 깨어나 깨달음을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정리=김민아 기자 kkkma@beopbo.com

이 법문은 중앙승가대 전 총장 종범 스님이 8월22일 선우정사에서 한 설법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1648호 / 2022년 9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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