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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40) (7)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23)

의천에 재조명된 뒤 잊힌 원효, 근대 이능화·정황진에 의해 재인식

의천은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원효의 저술 44부 87권을 수록
12세기 후반 균여 직계 원효 배제 뒤 근대까지 완전히 잊혀
일제강점기, 비편 발견과 일본불교학 영향 역사적 인물 확인

조선 후기 필사한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 [고려대 도서관]
조선 후기 필사한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 [고려대 도서관]

11세기 고려의 전형적인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고 문벌귀족세력이 등장하는 것에 상응하여 불교계에서 교종 계통의 화엄종과 법상종이 주류적인 종파로 대두하면서 (초조)대장경의 완간에 이은 불전 간행의 보완사업으로서 의천(1055~1101)에 의해 경·율·론 삼장의 주석서인 장소를 모은 교장을 간행하였다. 불교의 역사에서 최초로 동아시아 불교사의 업적을 집대성하는 의의를 갖는 불사였다. 그 간행 예정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1090)에는 원효의 저술 44부 87권(또는 83권)의 목록을 수록하였다. 그리고 의천은 경주의 분황사를 찾아 원효의 소조상 앞에 올린 제문에서 “오직 우리 해동보살만이 성상(性相)을 융통히 밝히고 고금을 한 데 포괄하여 백가의 다툼의 단서를 화합하고 일대 지공의 논의를 얻었습니다”고 하여 원효의 회통불교를 극찬하였다. 

반면 고려초의 균여에 대해서는 “세상의 이른 바 균여·범운·진파·영윤 등의 저서를 보면 글을 잘못 지어서 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뜻도 통하지 않아서 조사의 도를 황폐하게 하였으니, 후생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고 비난하면서 균여의 저술 등은 간행 목록에서 일체 제외시켰다. 그리고 의천은 원효에게 화쟁국사, 의상에게 원교국사를 추증케 함으로서 원효를 의상과 나란히 화엄종의 조사로 받들게 하였다. 이에 화엄종과 경쟁 관계였던 법상종에서도 태현의 앞에 원효를 조사로 받들게 하였고, 의천이 선종 승려들을 포섭하여 새로 개창한 천태종에서도 체관의 앞에 원효를 조사로 받들게 함으로서 여러 종파의 조사로서 추앙받게 되었다.

12세기 후반 무신집권 이후 의천의 직계 법손들이 화엄종 교단의 주류에서 밀려나면서 원효에 대한 추앙 분위기는 퇴색되었다. 1236~1251년 (재조)대장경을 간행할 때에 균여의 직계법손들이 주관하게 되면서 보판(補板)으로 앞서 의천이 제외시켰던 균여의 저술은 4종이나 수록하면서 원효의 저술은 ‘금강삼매경론’ 1부를 넣는데 그쳤다. 보판으로 간행된 불서 가운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법계도기총수록’인데,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기’에 대한 의상 법손들의 주석을 집대성한 것이다. 고려 균여의 주석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아 균여 이후에 편집되었고, 재조대장경을 조성할 때에 균여의 저술들을 수습한 천기(天其)나, 교감을 담당했던 수기(守其) 등에 의해 재편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는 의상의 법손들 이외에도 중국의 지엄·법장·징관 등의 화엄학승의 저술도 인용되었는데, 원효의 저술은 인용이 없고 단지 원효가 의상에게 3개의 질문으로 의문을 해결하였다는 사실만이 기록된 것을 보아 원효를 비판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더라도 경시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수기가 편집한 ‘고려대장경교정별록’의 추함(推函) 대장경조에 “본조(고려)의 분황종에서 오래도록 행하고 있는 경전이므로 고치기 어렵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아 의천에 의해 원효를 추존하는 화엄종 안의 분파(분황종)가 성립되어 의상-균여로 이어지는 직계 법손들과 대립되어 오던 가운데 (재조)대장경을 조성할 때에 편집과 교정책임을 맡았던 수기 등에 의해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이외의 저술이 모두 배제되었고, ‘법계도기총수록’의 편집에서 원효 저술의 경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으로 본다. 

한편 무인집권 이후에 주류적인 교단으로 새로 대두된 수선사의 지눌(1158~1210)은 ‘법집별행록병입사기’ ‘권수정혜결사문’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화엄론절요’ 등에서 ‘화엄종요’ ‘대혜도경종요’ ‘미타증성게’ ‘보살계본지범요기’ 등 원효의 저술을 인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눌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선통합을 추진하면서 정혜쌍수를 주창하였고, 마침내 간화선을 받아들임으로서 이후의 불교사는 선종 중심으로 개편되었고, 원효의 저술은 소외되어 갔다. 고려후기 지눌 이외에 원효 저술의 인용이 확인된 것은 서룡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에서의 ‘금강반야경소’ 보환의 ‘수능엄경환해산보기’에서의 ‘기신론소’ 등 2건뿐으로 원효의 저술과 학승으로서의 모습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그리고 일연의 ‘삼국유사’에서의 원효의 거사로서의 대중교화 활동 사실만이 설화 형태로 전승되어 갔을 뿐이었다. 

14세기 이후 불교계는 선종의 간화선이 풍미하면서 교종은 점점 쇠퇴하여 갔으며, 더욱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후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불교교단이 축소되어 선교양종으로 통폐합되었다. 세조대(1456~1468)에 일시 불교가 부흥되어 대장경이 대량으로 인출되고 이어 의천의 교장도감에 비견되는 간경도감이 설치되어 불전, 특히 장소들이 대량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원효를 비롯한 신라 승려들의 저술이 모두 제외된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간경도감의 간행본 가운데 오늘날 확인되는 장소로는 ‘대승기신론’의 법장과 자선, ‘화엄경’의 이통현, ‘유가론’이나 ‘유식론’ 등 유식학 분야의 자은기·혜소·지주 등 중국 학승들의 저술뿐이다. 특히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와 ‘화엄경소’ 등은 일체 제외되었고, 그 대신 법장 등 중국 학승들의 주석서만이 간행되었으며, 이후 이 저술들이 조선 불교계의 기본 텍스트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원효 불교의 전통이 이미 단절되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세조대의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장소의 대부분이 의천의 교장도감의 간행본을 중수한 것임을 고려하면, 의천의 교장 간행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지에서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효를 비롯한 신라 학승들의 저술을 모두 제외하고 중국 학승들의 저술 위주로 간행함으로써 신라 불교 전통의 단절과 중국 불교 전통으로의 일방적 회귀라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원효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천의 교장 간행사업과는 역사적 의의가 전연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세조가 세상을 떠난 뒤 간경도감마저 혁파됨으로서 더 이상의 불서 간행은 계속되지 못하였다. 16세기 전반 ‘동문선’에 6편의 원효 저서의 서문을 수록한 것은 불교 내용의 중요성보다는 유려한 한문체(漢文體)에 대한 높은 평가 때문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세조의 불전 국역은 한국불교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서 원효 불교 전통의 계승이라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별도의 검토가 요청된다.

17세기 이후에는 서산휴정과 부휴선수의 법손들이 불교계의 새로운 주류로 등장하면서 태고법통설을 제창하였는데, 이 법통설에 의해 한국불교사의 인물들을 집대성한 채영의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1764)에서는 원효를 정통조사의 계보에서 제외시켜 산성(散聖) 가운데 1인으로 이름만을 올리는데 그치었다. 이 시기의 불서 간행으로 특기할 사건은 1681년 전라도 임자도에 불서를 실은 중국 상선이 표착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성총이 190 여권을 간행한 사실이었다. 이들 불서는 명나라의 가흥장(嘉興藏) 계열의 것인데, ‘대승기신론필삭기’와 ‘화엄경소초’ 등 모두 중국 승려들의 저술뿐이었다. 성총은 법장의 ‘기신론의기’에 종밀의 ‘기신론소주’와 자선의 ‘기신론소필삭기’를 합쳐 ‘대승기신론소필삭기회편’을 편집하였는데,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와 ‘별기’도 인용되고 있으나, 그것은 자선이 인용한 것을 전재한 것뿐이고, 원효의 저술을 직접 참고한 것은 아니었다. 성총 이외의 다른 인물들의 저술에서도 원효의 저술 인용의 몇 사례가 발견되고 있으나, 모두 중국 저술에서의 재인용에 불과한 것들뿐이다. 이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불서들이 수입되어 오는 가운데서 ‘진심직설’과 ‘염불요문’ 같은 불서는 지눌의 저술로 오인되기도 하였는데, 원효의 저술들도 이미 잊힌 상태였음은 물론이다. 조선후기 승려 교육과정으로 사미·사집·사교·대교 등의 이력과정이 정비되었으나, 원효의 저술 가운데서는 오직 ‘발심수행장’만이 지눌의 ‘계초심학인문’, 야운의 ‘자경’과 함께 ‘초발심자경’이라는 단권으로 묶어져 읽혀 왔을 뿐이었다. 

오랫동안 잊혔던 원효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9세기말 각안의 ‘동사열전’(1894)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동사열전’에 수록된 원효국사전의 내용은 원효의 전기 자료로서 유일하게 전승되어온 ‘삼국유사’의 원효불기조에, ‘임간록’의 오도설화와 당시 사찰들에 전승되던 원효 관련 유적지를 덧붙인 것에 불과하고 원효의 저술과 사상적 업적에 관한 서술은 없다. 원효의 저술들이 다시 주목받게 되는 것은 20세기에 들어와 조선총독부에 의해 해인사의 경판이 주목받고, 금석문 자료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부터였다. 원효에 대한 자료로서 특기할 것은 1914년 조선총독부의 관리에 의해 ‘고선사서당화상비’ 하단부의 비편이 발견된 것이었다. 이로써 설화 속의 인물이던 원효가 역사적인 인물로 확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불교사에 관한 자료 수집과 정리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 것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3편(1918)이었다. 이능화는 편년체의 상편에서는 ‘삼국유사’의 원효불기조와 ‘송고승전’의 원효전을 전재하였고, 주제별의 하편에서는 ‘지월록’(‘임간록’에 부전)의 오도설화와 ‘화엄현담’에 인용된 4교판설을 전재하였다. 

그런데 원효의 저술과 사상을 밝히는데 이능화가 크게 기여한 것은 ‘조선불교총보’(1917∼1921)의 편집겸 발행이었다. ‘조선불교통사’의 편집이 이미 완료되어 인쇄 중이던 1917년 ‘조선불교총보’ 6호(1917.9)에 원효의 ‘법화경종요’의 서문을 전재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8호(1918.3)에 ‘고려의 대각국사’(妻木直良 원저, 鄭晄震 번역), 그리고 12호(1918.11)에 일본에 유학 중인 정황진이 ‘동문선’ 소재의 원효의 ‘진역화엄경소서’ ‘열반경소서’ ‘해심밀경소서’ ‘금강삼매경론서’ ‘본업경소서’ 등을 발굴하여 게재하게 되었다. 13호(1918.12)에는 정황진이 작성한 원효의 저술 목록(대성화정국사원효저일람표)을 게재하였다. 총 87부 223권을 권수·출처와 함께 작성한 목록인데,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이래 가장 방대한 분량의 원효저술목록이다.

1980년대 이후에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저술 목록이 반복 정리되면서 수정 보완이 거듭되고 있으나, 아직도 미완의 상태임을 고려하면 정황진의 선구적인 업적은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정황진은 14·15호(1919.2~5)에 신라의 경흥을 주목하여 그의 행적과 저술을 밝히고 40부 245권에 이르는 저술총람표를 게재하였는데, 그의 선구적인 불교학자로서의 역할과 함께 근대불교학의 발전에 미친 일본 불교학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20호(1920.3)에는 원효의 8종 저술의 서문을 게재하였는데, ‘불설아미타경소’ ‘유심안락도’ ‘무량수경종요’ ‘미륵상생경종요’ ‘보살계본지범요기’ ‘대승기신론소’ ‘대승기신론별기’ ‘대혜도경종요’ 등 저술의 처음 부분인 ‘대의(大意)’와 ‘경종체(經宗體)’를 발취한 것으로서 원효 저술의 특징을 정확하게 이해한 결과로 보인다. 

발취한 인물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역시 정황진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신라의 원효는 686년 입적한 지 400여년이 지나서 고려의 의천에 의해 재평가되어 회통불교의 사상가로 화려하게 등장하였고, 다시 오랫동안 잊혔다가 800여년 만에 근대의 이능화와 정황진 등에 의해 종합적인 불교의 사상가로 재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51호 / 2022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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