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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열반경변③-막고굴 158굴

기자명 오동환

오열하는 제자와 평온한 보살의 대조가 전하는 진리

제자들 조연으로 활용 “방편으로써 열반에 드심” 표현
‘죽음’ 상징 입관·운구 대신 과거·미래불 한 공간 조성
부처님 열반 통해 드러난 법신의 시·공간 상주 시각화

158굴 남벽 10대제자 거애도와 보살들. 제자들의 슬픔이 더욱 극렬하게 표현될수록 대승보살들의 평정이 부각된다.
158굴 남벽 10대제자 거애도와 보살들. 제자들의 슬픔이 더욱 극렬하게 표현될수록 대승보살들의 평정이 부각된다.
막고굴 158굴 주실.오른쪽으로 손을 베고 길게 누운 세존의 모습이 평온해 보인다. 와불상의 주위로 열반을 애도하는 대중들이 운집해 있다. 시방세계를 묘사한 천정은 아이러니 하게도 관뚜껑의 모양이다.
막고굴 158굴 주실.오른쪽으로 손을 베고 길게 누운 세존의 모습이 평온해 보인다. 와불상의 주위로 열반을 애도하는 대중들이 운집해 있다. 시방세계를 묘사한 천정은 아이러니 하게도 관뚜껑의 모양이다.

지난회에서 논의했듯 석가여래의 반열반은 남겨진 육신마저 태워버리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을 통해서 오히려 법신을 드러낸다. 이후 성당(705~781) 시기에 조성된 막고굴 148굴에서는 332굴의 경우처럼 주실의 중심에 자리했던 탑주를 세우지 않았다. 이로써 상대적으로 열반굴 내에서 탑이 갖는 의미가 감소하고 주존인 와불상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와불의 뒷벽에는 세존의 열반 후 입관에서 사리탑 봉안에 이르는 과정이 여전히, 오히려 더욱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점은 사리탑이 여전히 열반의 교의를 설명하는 주요 소재임을 보여준다. 

9세기 전반 토번(吐蕃) 통치 기간에 조성된 막고굴 158굴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158굴은 돈황석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와불로 그 길이가 15.6m에 달한다. 참배자는 통도(通道)를 지나 주실에 들어서면 곧바로 좌우로 길게 뻗은 공간에 오른팔을 베고 누우신 석가여래의 열반상을 마주하게 된다. 협소한 공간 속에서 이와 같은 대형 와불을 마주할 때, 참배자는 마치 석가여래 열반의 현장에 참석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형성된 횡권식(橫卷式) 석실은 148굴에서도 볼 수 있다. 158굴에서는 332굴이나 148굴에서 세세하게 묘사되었던 입관, 운구, 다비, 사리분배, 탑의 봉안과 같은 세존의 열반 후의 서사 장면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158굴은 어떠한 내용으로 어떤 교의를 표현하고 있는 걸까?

158굴의 주실에 들어선 참배객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길게 가로누우신 석가여래의 존상이다. 옷 주름이나 신체의 굴곡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세존의 열반하신 모습에서 마치 단잠을 자고 계시는 듯 평온함이 전해진다. 이어서 시선을 끄는 부분은 와불의 좌우와 배후에서 둘러싸며 운집한 대중들이 세존의 열반을 애도하는 세세한 장면들이다. 

그중 세존의 머리맡에 묘사된 10대 제자들의 거애(擧哀) 장면을 보자. 세존이 열반하신 후 뒤늦게 도착한 대가섭이 오열하며 두 팔 벌려 쓰러질 듯이 세존에게 달려들고, 주위에서는 나머지 제자들이 그를 만류하고 또 부축하며 함께 오열하고 있다. 이들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에서 위대한 스승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인 세존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절망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자들의 뒤에 배치된 보살들의 모습은 놀랍도록 평온하고 담담하며 태연하다, 몸의 표현에 있어서도 제자들은 뼈와 살가죽, 근육이 이루는 굴곡이 강조된 반면, 보살들은 매끄럽고 밝은 피부에 원만한 체형으로 묘사돼 있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몸을 타고 배열된 나한들과 보살들의 모습에서도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이러한 대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423년 북량의 담무참이 역출한 ‘대반열반경’ 40권(북전)’과 이를 편집한 ‘대반열반경 36권(남전)이 제시한다. 

“중생이 모든 번뇌와 무명에 가리워져서 뒤바뀐 마음을 낼 적에, 나에 대하여 내가 없다 생각하고, 항상한 것을 무상하다 생각하고, 깨끗한 것을 부정하다 생각하고, 즐거운 것을 괴롭다 생각하는 것이다.…나란 것은 곧 부처란 뜻이고, 항상하다는 것은 법신이란 뜻이고, 즐겁다는 것은 열반이란 뜻이고, 깨끗하다는 것은 법이란 뜻이니라.”(‘대반열반경’ 애탄품)

경에서 세존은 무상하고 괴롭고 나라고 할 것이 없고, 번뇌에 탁해진 유위법에서 반열반이라는 제련을 통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한 법성을 드러내었다. 뿐만 아니라 담무참의 의도적 편집인지 아니면 미처 채집하지 못한 것인지 몰라도, ‘대반열반경’에서는 석가여래의 열반 이후 장례를 하고 사리를 수습하는 장면은 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래의 반열반을 “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 하고, 이 상락아정의 이치를 깨달은 이들은 대승보살들이다. 이런 이유로 보살들은 여래의 열반에 동요함이나 슬퍼함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평정함은 와불상을 둘러싼 제자들과 나한들과 왕자들의 슬픔이 극렬할수록 더욱 비교되고 부각된다. 결국 벽화에서 가장 참배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제자들은 교의상 조연에 불과하다. 

죽음의 열반에서 상주하는 법신을 드러내는 이런 반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와불의 양측에 해당하는 남벽과 북벽에는 각각 과거 가섭불을 표현한 입불상과 미래 미륵불을 표현한 의좌상(倚坐像)이 조성되어 현재불인 석가모니 와불상과 함께 법신의 시간적 영속성을 상징한다. ‘팔(八)’자 형으로 조성된 천정에는 동·서·남·북과 동북·동남·서남·서북의 팔방에 정토를 그리고, 다시 중앙에 상방(上方) 정토를 그렸다. 와불의 침상 정면 중앙에는 작은 감실이 조성되어 있는데, 여기에 또한 정토를 그려 세존이 자리한 이곳을 하방(下方) 정토로 표현하였다. 이로써 열반을 통해 드러나는 법신은 시간과 공간에서 두루하고 상주함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무상한 육신의 죽음을 상징하는 입관, 운구, 다비 등의 도상은 더 이상 이용되지 않는 것인가? 역설적이지만, 158굴 주실의 형태는 팔자형의 관곽의 뚜껑을 얹은 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시방삼세에 편재하고 상주하는 법성은 여래의 ‘죽음’을 나타내는 관 내부에서 확인된다. 이 이치를 아는 것은 곧, 세존에게 마지막 공양을 올린 순타가 “여래께서 방편으로 열반에 드심을 보이는 줄 아는” 것이고, 막고굴 61굴과 같은 법화경변에서 방편품을 표현할 때, 열반도를 차용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보살은 아직 성도하지 않은 부처이며, 부처는 이미 성도한 보살이다.”(탕용통, ‘부처와 보살 佛與菩薩’)

오동환 중국 섬서사범대 박사과정 ory88@qq.com

[1651호 / 2022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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