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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브하야 푸트라 스님

“불교 부흥, ‘차별·폭력’에서 ‘평등·자비’ 인디아로 변모시킬 것!”

10일간 단기 출가 인연
비구의 삶으로 대 전환

경전‧동아시아 불교 탐구
한국어 등 13개 외국어

불교 매력‧불자 늘지만
경전‧교리에 매우 취약

인도 주요도시 전법 위해 
승려 2000명 육성 원력

10년 동안 500명 학생
승려교육 차 태국 유학

변호사 자격 취득 후
무료법률 상담도 펼쳐 

힌두교도 개종 요구 거부
독살 시도에 목숨 잃을 뻔

승려교육기관 설립 희망
80만 달러면 건축 가능

‘상월결사 인도순례’ 동참
“묵묵히 걷고 또 걸을 것”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살더라도 죽은 것”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전한 아브하야 푸트라 스님은 “저 또한 노력하지 않고 방일한 삶을 산다면 살아 있어도 승려로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사진=남수연 기자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살더라도 죽은 것”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전한 아브하야 푸트라 스님은 “저 또한 노력하지 않고 방일한 삶을 산다면 살아 있어도 승려로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사진=남수연 기자

‘추위와 더위, 굶주림, 갈증,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법정 스님 역 ‘숫타니파타’ 중)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전법의 길을 2022년 2월 상월결사가 걷는다. 하루 25km씩 43일간 총1167km를 걸어야 하는 험난한 대장정이다. 현재까지 참여 의사를 밝혀 온 순례자 중 세납이 가장 낮은 비구는 인도 ‘붓다의 사원(Vijayindra Aranya Vihar)’ 주지 아브하야 푸트라(Abhaya Putra: 무외인‧無畏人) 스님이다. ‘붓다의 사원’은 아잔타‧엘로라 석굴로 유명한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주의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에 자리하고 있다.

마하슈트라 주의 북동쪽 도시 나그푸르(Nagpur)의 달리트(Dalit‧불가촉천민) 신분 집안에서 태어났다.(1979) 13살 때 부모님의 권유로 참여한 10일간의 단기 출가(1992) 인연이 이어져 2000년 비구계를 받았다. 비구계 수지 직후 인도불교 부흥의 토대를 다지고자 ‘승려 2000명 양성’ 원력을 세운 아브하야 푸트라 스님은 2003년부터 2013년까지 500명의 아이를 태국으로 유학 보내 언어(팔리어), 교리, 수행 등의 승려 기본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인도에서는 드물게 계율을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스님은 변호사 활동도 겸하고 있는데 ‘붓다의 사원’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무료법률 상담을 해주고 있다. 2013년 힌두교도 세력의 독살 테러로 쓰러져 일주일 만에야 응급실에서 정신을 차린 스님은 이후에도 이교도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전법에 매진하고 있다.

아브하야 푸트라 스님이 탁발하고 있다.
아브하야 푸트라 스님이 탁발하고 있다.

대구 보현사 주지 지우 스님을 만나려 한국에 온 아브하야 푸트라 스님을 10월14일 법보신문 차실에서 만났다. 10월14일은 인도 불교사에서 의미 깊은 날이다. 인도 나그푸르(Nagpur)에서 인도불교 부흥을 이끈 바바사헵 암베드카르(Babasa heb Ambedkar‧1891~1956)가 50만의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힌두교에서 불교로 귀의한 날이기 때문이다.(1956.10,14) 아브하야 푸트라 스님은 유튜브를 통해 생생히 전하는 인도 현지의 ‘암베드카르의 불교 개종 기념식’을 직접 보여주며 “그가 주창한 인도 계몽운동은 위대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카스트 제도로 인해 신분 계급(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이외는 달리트)이 나뉜 인도 사회에서 달리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돼 왔습니다. 민주주의 국가 인도는 1947년 세워졌는데 당시 초대 법무부 장관이 암베드카르입니다. 그는 ‘피억압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직접 행동에 옮겨야 한다’며 달리트와 카스트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힌두교에서 불교로의 개종을 제안했습니다. ‘힌두교도로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나는 힌두교도로 죽지 않겠다’고 선언한 그는 1956년 오늘 불가촉천민과 함께 불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개종 2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 인도 불자는 전체 인구의 1%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암베드카르의 계몽운동이 10년만 더 지속됐어도 불자는 더 폭발적으로 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암베드카르가 인도에 선사한 건 불교의 평등입니다. 그 하나가 불가촉천민들의 의식을 깨웠고, 불교 개종의 용기를 솟게 했습니다. 아쉬운 건 평등사상의 원천인 부처님 말씀과 사상까지는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에도 전법에 관한 한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개종하는 사람 대부분은 불가촉천민인데 그들은 가난하다. 하여 고등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불교 교리와 사상에는 관심조차 두기 어렵다. 누군가 그들에게 법을 전해야 하는데 승려가 부족하고, 재가불자들을 위한 우리의 ‘불교대학’과 유사한 교육기관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불자라고 하지만 교리는 전혀 모릅니다. 단편적인 예를 하나 든다면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하는 행사는 있지만 법문하는 스님은 없습니다. 10일 동안 단기 출가했던 제가 비구의 길을 걷게 된 연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단기 출가를 권한 부모에게 “짧게라도 출가해 배울 게 있으면 열심히 공부하겠다”며 길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사원에서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교리 한 줄, 수행 자세 하나 일러주는 분이 없었습니다. ‘내일은 알려줄까?’라는 기대는 늘 실망으로 돌아왔습니다. 열흘이 넘고 한 달이 넘었습니다.”

불연이었을까? 불법을 향한 목마름은 자연스레 출가로 이어졌다. 그 기억은 그대로 ‘방과 후 자비교실’을 여는 계기로 이어졌다. 학교의 교실 하나를 얻어 아이들에게 부처님말씀을 전하니 속속 스며들어 갔다. 

스님의 여정에서 ‘기쁜 날’로 손꼽힌다. 전법에 진력하는 모습에 감동한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스님의 법명을 딴 ‘아브하야 푸트라 콜로니(Abhaya Putra Colony)’로 바꿨다. 동진 출가의 힘을 그때 알아챘고, 그 작은 깨달음은 원력으로 이어졌다.

‘부처님! 제가 살아 있는 한 인도에 승려교육기관(사원)을 세워 2000명의 스님을 양성하겠습니다!’

아브하야 푸트라 스님과 함께 한 수계식.
아브하야 푸트라 스님과 함께 한 수계식.

현재 인도 출신의 스님이 5000명 정도라고 하니 2000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가사만 입은 승려를 말함이 아니다. 불교 전통의 수행력을 갖추는 것은 물론 경‧율‧론 삼장에도 정통한 ‘선지식 2000명’을 육성하겠다는 발원이다. 

“그 스님들이 뉴델리, 아그라, 바라나시, 콜카타, 하이데라바드, 뭄바이 등의 주요 도시에 사원을 세워가며 부처님 법을 전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벅차오릅니다.”

스님은 영어와 태국어 등 13개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한다. 언어에 특출한 소질이 있거나 좋아해 공부한 게 아니다. 경전을 보려 팔리어를 공부했고, 동아시아 불교를 탐구하고자 한국어, 일본어, 미얀마어, 라오스어를 공부했다. 스님이 구사하는 외국어 중에는 신드어, 콘칸어, 칸나다어 등 인도어가 유독 많다. 사투리가 아니다. 완전히 다른 언어다. 

“인도 전역에서 승려교육기관을 찾아온 행자‧사미들에게 올곧게 법을 전하려면 우선 그들이 쓰는 언어를 습득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습니다. 출가 마음을 내었다고 해도 자신이 쓰는 말 외의 언어는 모를 게 분명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교육은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2000 선지식 육성’은 꿈으로만 간직하지 않았다. 부모의 허락을 받아 10대 초반의 아이들을 태국으로 보냈다. 승려교육기관이 없으니 태국에서 기본교육을 받도록 한 것이다. 

아이들의 유학 자금 확보는 아브하야 푸트라 스님의 몫이다. 도반과 한국, 태국 등의 인연 닿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소상히 전하며 도움을 청했다. 지우 스님도 능인선원 태국지원(방콕)에서 우연히 만나 인연을 맺었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 태국으로 유학 보낸 학생은 약 500명이다. 나무랄 데 없는 실력을 갖춰갔는데 한계를 보였다.

“유학 4년 전후 즈음 아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여, 태국에서의 팔리어 공부는 대부분 4년(3급 실력)에 중단됐습니다. 6년을 더했으면(9급 실력) 경전을 보는데 전혀 문제 될 게 없었을 겁니다. 그 아이들을 받아 줄 교육기관이 인도에는 없기에 그 이상의 정진은 어려웠습니다. 아쉽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중의 누군가는 저처럼 스스로 승려의 길을 찾아 걸으리라 믿습니다.”

아이들의 유학 프로그램은 일단 접고 귀국했다.(2013) 마침 태국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주 동부에 자리한 와르다(Wardha)에 사원 하나를 마련했는데 불자들의 발길이 속속 이어지며 제법 사원의 기틀이 잡혀갔다. 그때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날, 지도자급에 속하는 힌두교인 몇 명이 찾아와서는 “개종하면 도와주겠다”고 하여 “그런 도움은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며칠이 지난 후 낯모르는 힌두교도들이 사원으로 몰려와서는 ‘공양’을 올리겠다고 했다.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느껴 그들이 가져온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오렌지 주스라도 마시라’고 자꾸 권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한 모금했는데 불과 몇 초 만에 그 자리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독을 탄 주스였던 겁니다.”

전법 확장을 우려한 힌두교도들이 ‘손을 쓴 것’이라는 건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봐야 한다.

“퇴원 후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 들어 알았습니다. 제가 응급실에서 깨어나지 못해 누워 있을 때, 그들은 ‘승려가 죽었다!’며 파티를 열었다고 합니다. 사원에 남겨졌던 가방과 사물함을 살펴보니 저의 여권은 물론이고 땅과 건물의 소유를 증명하는 문서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후 사원을 찾았던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변호사를 고용해 법적 대응을 강구했는데 그 변호사 역시 힌두교도 입장만 두둔했다. 법학 학사(2007)에 그치지 않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무료 법률상담에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붓다의 사원’ 전경.
‘붓다의 사원’ 전경.

호수를 옆에 둔 산자락의 땅 15에이커를 확보해 ‘붓다의 사원’을 마련했다.(2018)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려 한다.

“저 혼자 아이들을 유학 보내고, 승려교육기관을 마련하는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좀 더 많은 분과의 협력 속에 진행됐다면 더 좋은 결과를 냈으리라 봅니다. 인도불교 부흥에 관심 있는 불자들과의 인연을 더 맺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브하야 푸트라 스님이 계획한 200명 수용의 승려교육기관을 설립하려면 미화 80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한다. 강의실과 수행 공간은 물론 숙소 설계까지 포함한 비용이다.

“저 스스로 원력을 잃지 않는 한 인연은 닿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다시 일어서면 인도 사회는 어떻게 변할까?

“차별 속 폭력이 줄고, 평등 속 자비가 흐르는 세상, 지금보다는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인도로 변모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지침으로 삼는 일언을 청하니 ‘법구경’ 스물한 번째의 부처님 말씀을 전했다. 

‘노력(정진)하는 사람은 사멸하지 않는 길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의 길로, 노력하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아 있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살더라도 죽은 것이다.’ 

“저 또한 노력하지 않고 방일한 삶을 산다면 살아 있어도 승려로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인도 8대 성지 순례길은 사미‧비구 때 두 번 걸었다. 완주하는 데 50일이 걸렸다고 한다. 부다가야의 성지에 들어섰을 때 “온몸의 솜털이 돋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인도는 낮과 밤, 새벽의 온도 차가 심합니다. ‘좋은 침낭’을 준비하시기를 권합니다.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그 무엇도 아랑곳하지 마시고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저 또한 묵묵히 걸으려 합니다. 부처님께서 걸으신 길입니다.”

인도불교 부흥을 향한 험지도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걸어갈 무외인(無畏人) 아브하야 푸트라(Abhaya Putra) 스님이다.

통역=윤태훈 기자 yth92@beopbo.com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655호 / 2022년 1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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