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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들은 말들

기자명 혜민 스님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들이

내 말이었나 남의 말이던가


“끝도 없는 정치 얘기 그만 좀 하소.”

같은 절에 있는 스님 한 분이 지나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젊은 스님과 신도님들이 모여 최근 한국 정치에 관해 한창 열을 내면서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신 스님 한 분께서 우리들을 향해 말을 툭 던지신 것이다. 그 말 한마디에 언제 난상토론을 벌였냐는 듯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도 지난 2주간 누구를 만나든지 온통 한국정치 이야기뿐이었다. 절도 예외가 아니어서 신도님 두세명만 같이 앉으면 다들 정치 이야기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 날따라 나도 신도님 틈에 끼어 여러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그 말씀이 날아온 것이다. 스님의 지나가는 한 말씀이 나에게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장군 죽비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사실 출세간(出世間)을 목표로 머리 깍은 승려인 처지에 세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속인과 다를 바 없이 관심을 많이 두는 것은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닌 것 같다. 더욱이 나처럼 수행의 문턱에도 제대로 들지 못한 이가 세간의 일에 정신을 몰두한다는 것은 자신의 본분을 뒤로한 채 망상만 키워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불교 입문서를 보고 심취해서 나름대로 명상을 해보겠다고 방석에 앉았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것은 지혜가 나타나는 고요하고 밝은 마음 상태가 아니라 얼마나 내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재잘거리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재잘거림이 내가 멈추라고 이야기한다고 멈춰지는 것도 아니고 또 멈추라는 말 자체가 또 다른 재잘거림의 일부라는 사실에 당혹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재잘거림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디서 보거나 주워들은 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할 때도 내가 직접 경험하고 판단한 이야기보다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들이 내 입을 통해 그대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선가(禪家)에서는 문자와 말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그 뜻은 아마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주워듣고 깨달음의 경지를 논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요즘 들어 우리가 내뱉는 말의 대부분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나온 말이라기보다는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내 이야기인양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곳에서도 보면 각종 언론이나 정당이 내뿜는 말이나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타인에게 전달하는 경우를 자주 만나게 된다.

정보와 통신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정말로 말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수많은 매체와 견해들이 우리가 보아야 할 진면목을 토막내거나 포장을 씌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같이 할 말도 들리는 말도 많은 시절에는 어떤 말이 본인의 말이고 또 어떤 말이 주워들을 만한 말인지를 내 안에 있는 ‘지혜’로 걸러내는 과정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혜민 스님/vocalizethis@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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