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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수행 이란희(자비화·35) - 하

기자명 법보

병상서 죽어가던 아버지 보고
수행, 남에게 도움되는지 의문
자애명상 접하며 자비심 이해
나와 남 둘 아님 알면 지혜 발현

주변은 고요했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소리, 이따금씩 들리는 새 소리. 선방에는 30명 남짓한 수행자들이 좌복 위에 앉아 각자의 수행 주제로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그들 사이에서 보호받는 느낌도 들었다. 선원에서 집중명상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평온함은 이내 무너졌다. 10년간 요양병원에서 홀로 생활하시며 외롭게 생을 마무리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에 한동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소홀했던 분이었다. 가족 모두 아버지로 인해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아버지를 외면했다. 그렇게 10년, 명상센터에 오기 전날 만난 아버지는 오랜 병원 생활로 거동을 할 수 없었고, 딸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의식이 흐릿했다. 그날 아버지를 마주하면서 그동안 외면했다는 죄책감과 죄송함을 처음으로 느꼈다. 병상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 선방에서 고요히 앉아 행복감을 누리는 나의 모습. 상반된 두 모습이 대비됐다. 그 순간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내가 수행하는 게 아버지, 가족,  지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데, 수행이 지혜를 닦는 것이라면 자비는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가? 수행하고 있는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 나만 행복한 게 아닌가?'

명상수행을 처음 시작하게 된 건 괴롭게 만들었던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수행으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편안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발원이 자리 잡았다. 부처님 가르침인 ‘자비’를 내 삶으로 끌어들이게 된 계기가 아니었을까.

초기불교에서는 자비, 즉 자애와 연민을 계발하기 위한 수행법으로 자애명상과 연민명상을 소개한다. 자애명상과 연민명상은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수행이지만, 부처님은 수행자들이 수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장애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자애명상을 많이 하라고 권하셨다. 삶으로 끌어들인 ‘자비’가 더 깊이 뿌리 내리게 된 과정에서 자애명상을 빼놓을 수 없다. 

자애명상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때 함께했던 사람,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면서 시작한다. 그때 느낀 행복감, 평온함, 따뜻함, 만족감을 마중물 삼아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 그리고 모든 중생들을 향해 진정으로 행복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자애명상을 했던 순간은 여전히 생생하다. 하루 종일 회사 업무로 스트레스 받고 있었던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명상하는 20분 내내 행복한 마음에 머물렀다.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 그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향하는 과정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느 날 바쁜 출근길이었다. 지하철에 발을 놓는 순간 지하철 안의 모든 이들을 향해 자애문구를 외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그 마음을 알아차린 순간, 그들이 나와 떨어져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늘 하던 자애명상 구절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던 것인지, 자애심이 진정으로 발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수행 과정에서 귀한 경험이 되었다. 

내 수행이 다른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선원장 스님께 물어보기도 했다. 스님께서는 자비로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너와 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당시엔 퍽 와 닿지 않았다. 어느 좋은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말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명상할 때마다 그때의 질문과 스님의 대답이 늘 함께 뒤따랐다. 피상적으로 다가온 대답이었지만, 요즘은 스님 말씀의 뜻을 점점 실감한다. 우리 모두는 연결돼 있다는 것, 그렇기에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는 것. 그게 곧 지혜와 자비의 발현이라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일체중생의 고통을 연민하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진리로 드러내어 주신 붓다, 그 진리가 모두의 삶에 가 닿을 수 있기를. 오늘도 명상 수행을 하며 발원해본다.

[1661호 / 2022년 1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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