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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대한 성자의 꿈

우리들 꿈은 저 경이로운 석가모니 꿈의 부록들

위대한 성자의 꿈은 무수하게 또 다른 대칭적 꿈 만들어내
그건 한때 옛 이역본과 함께 사라져버린 아난과 우리들 꿈
우리는 각자 그 부록의 한 페이지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일본 무로마치시대(1336~1573) 조성된 유식만다라도. 일본 야쿠시지(藥師寺) 소장.
일본 무로마치시대(1336~1573) 조성된 유식만다라도. 일본 야쿠시지(藥師寺) 소장.

나는 대학에서 불교의 옛 주석서를 번역하고 그에 관한 논문을 쓰는 일을 주업으로 삼고 있지만, 오래전부터 학문의 제약을 벗어나 조금 자유로운 형식의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 열망은 옛 문헌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세상의 흥망성쇠에 냉담한 듯한 옛 주석가의 지루한 장서(長書) 안에는, 나로 하여금 하던 일을 멈추고 이상한 상상 속으로 빠져들게 했던 비밀스런 형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나는 꿈속에서 본 것처럼 어지럽고 무질서한 그 형상들 중의 하나가 어쩌면 우리의 힘겨운 삶에 깃든 어떤 비밀을 알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다사다난했던 검은 호랑이해가 저물어갈 무렵, 법보신문의 이재형 기자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와 그 열망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고맙게도 예전에 내가 무심코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내년 초부터 신문에 에세이를 연재하자고 제안했다. 더 한가해지면 써보겠다는 나의 계획은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그의 충고에 용기를 내서 글을 쓰게 되었다. 

이제부터 나는 자유로운 몽상가가 되어 이곳에서 저곳으로 넘나들 것이다. 그러나 마치 소가 풀을 뜯으러 멀리 돌아다닌다 한들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문헌이 나의 상상을 제약할 것이다. 또 그 문헌들은 알고 보면 ‘한 위대한 성자의 경이로운 꿈’에서 비롯되었으니, 이번 에세이의 첫 꼭지를 그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다. 나의 글은 그 성자의 꿈속에서 처음으로 공식화된 유식(唯識, 모든 것은 오직 식이 현현한 것)의 교리에 영감을 받은 것이고, 나는 ‘식’이라는 말이 ‘꿈’의 동의어라고 생각하며, 나의 상상은 결국 그 꿈의 부산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꿈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석가모니라고 부르는 한 성자가 몇 년 며칠인지 알 수 없는 어느 때 지극히 고요하고 밝은 마음으로 정토(淨土)를 꿈꾼다. 그의 눈앞에는 곧장 어떤 예술가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답고 오묘한 빛깔과 모양들로 장식된 정토의 대궁전이 생생하게 현전한다. 그는 자기 꿈속의 정토를 그저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 몸을 나타내어 대궁전의 주인으로서 높은 법좌에 앉는다. 그 궁전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수많은 대중들, 또 ‘인간인 듯 인간 아닌(人非人)’ 모습을 한 기묘한 무리들이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오직 말로만 전해지는 전설 속의 존재들, 가령 왕 중의 왕임을 상징하는 서른두 가지 상호를 빠짐없이 갖춘 전륜왕, 하늘과 땅과 바다를 지탱하는 용(龍)들, 수많은 어린 용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산다는 찬란한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 한가하게 음악을 연주하며 음식 냄새만 찾아다니는 건달바 등도 제 형상을 완전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이처럼 성자의 불가사의한 정신력으로 화작(化作)한 변화중 이외에도, 자신의 도력으로 성자의 꿈속에 들어와 몸을 나타낸 실재의 보살중도 있었다. 그리고 그 정토의 주인은 세심한 자비심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세상의 모든 이름들과 그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고, 날카로운 비유법으로 그 모든 것들의 본성은 ‘유식’임을 이해시켰다.’

이 꿈의 일화는 신역 ‘해심밀경’의 ‘서품’을 내가 짧게 각색한 것이다. ‘한때 석가모니께서 선정의 마음으로 현현해낸 정토의 대궁전에 머무시면서 타력 혹은 자력으로 그곳에 몸을 나타낸 대중을 위해 이 경을 설하셨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저 경이로운 정토의 일화를 전해 들으면 앞뒤 따지지 않고 믿으려는 충동에 사로잡히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주석가의 중요한 임무들 중의 하나는 그런 충동적 믿음을 냉정하게 점검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석 중에는 이런 문구도 있다. ‘이미 산실된 어떤 이역본에는 ‘석가모니께서 기사굴산에서 이 경을 설하셨다’라고 되어 있다.’ 나의 경우, 이 한 문구가 나의 열정에 잠시나마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전해진 석가모니의 교설은 모두 제자 아난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전해준 것들이고, 저 아난은 석가모니가 성도한 날 태어나서 20년 후에 시자가 되어 스승의 곁에서 직접 듣고 보았던 성문승이다. 그렇다면 아난 성문이 직접 목격했던 것은 예토의 기사굴산에 계신 석가모니이지, 높은 도력의 대승 보살들과 정신적으로 감응하고 있는 정토의 주인은 아닐 것이다.

만약 자기 삶 안에 병들지 않는 기쁨과 열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길 바란다면, 모든 것을 오직 이성의 판단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옛 주석가들에게서 그런 모습도 엿본 것 같다. 어떤 이는 옛 문헌을 뒤져 ‘아난’이라 불리는 세 명의 동명이인을 찾아내어 그 중에 대승의 아난이 저 일화를 전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어떤 이는 ‘범부의 눈에는 기사굴산에서 설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라는 타협적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나는  어느 말이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왠지 후자의 생각이 더 마음에 든다. 그것이 나의 상상을 더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저 석가모니의 위대한 꿈이 두 개의 대칭적인 세계로 나타난다고 말하는 듯하다. 즉, 위대한 불보살들이 서로 감응하고 있는 정토라는 정신적 세계, 그리고 아난 성문과 범부들이 함께 목격했던 기사굴산이라는 역사적 공간. 만약 제 정신일 때 사물이 똑바로 알려진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의 정신이 얼마나 맑고 밝은지에 달려 있다는 것도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전자는 비현실적인 것 같지만 실재에 더 가깝고, 후자는 현실적인 것 같지만 허구에 더 가깝다. 두 부류의 대중은 똑같이 어떤 존재의 음성을 들었지만 각기 보고 들은 것이 다르고 이해와 행위의 깊이도 다른 것이다.

나는 한때 시간이 그 두 세계의 간극을 메워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중생계가 끝이 없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저 위대한 성자의 꿈은 무수하게 또 다른 대칭적 꿈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은 한때 옛 이역본과 함께 사라져버린 아난의 꿈이었고, 지금은 더욱 어지럽게 변형된 우리들의 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변형된 꿈의 세계가 저 정토의 찬란하고 오묘한 빛깔과 모양들에 비해 불완전하고 조잡한 형상과 질료들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우리의 열정과 믿음까지 쇠퇴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꿈은 저 경이로운 꿈의 또 다른 부록들이고, 우리는 각자 그 중의 한 페이지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에세이도 저 꿈에서부터 시작했으므로 그 끝도 필시 꿈과 같은 것이리라. 가끔씩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나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고 동조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할 것 같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663호 / 2023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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