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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주라청’ 명문기와 발견…“승려교육기관 밝힐 단서”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23.01.03 10:24
  • 호수 1664
  • 댓글 0

기고-김태형 송광사성보박물관 학예실장

고려시대 부석사 지금보다 훨씬 넓어 사역 다시 설정해야
난개발로 파괴되는 부석사 전성기 사역 보존·발굴조사 시급

이종원 건국대 교수가 수습해 부석사에 전달한 ‘부석사 주라방’ 명문 와편(위)과 탁본(아래).
이종원 건국대 교수가 수습해 부석사에 전달한 ‘부석사 주라방’ 명문 와편(위)과 탁본(아래).

세계문화유산이자 화엄종찰 영주 부석사의 전성기 사역은 어디까지였을까. 현재의 부석사는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 남쪽 산기슭에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남북 축선상에 이어져 있다.

그래서 부석사와 관련된 연구나 조사는 주로 현재의 사역에 국한에 이루어져 왔지만 구전에는 무량수전 동서 10리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 동쪽 보물 제220호 석조여래좌상이 있었던 북지리 179번지 일대는 한때 동방사지(東方寺址)로 불렸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동방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에 있는 절터라는 뜻이 와전돼 그렇게 불렸다.(임천, ‘영주 부석사 동방사지의 조사’, ‘고고미술’ 2권 7호, 1961 참조)

이 일대에서는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의 기와들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그중에 ‘천장방(天長房)’이 새겨진 명문 기와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어 부석사 창건이후 고려말까지 중요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보물 제220호 석조여래좌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삼신불(三身佛)이 봉안됐던 곳으로 미술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1958년 약식 조사 후 그대로 방치된 채 과수원으로 경작되면서 훼손이 심각하다.

동쪽 폐사지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방사로 잘못 알려져 부석사와는 별개의 사찰로 취급돼 왔지만 최근 현 부석사 서쪽 지역에서 전성기 사역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 발견됐다.

지난해부터 부석사 서쪽 사역을 조사해온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이종원 교수가 수습하여 부석사성보박물관에 전달한 다수의 명문 기와들은 부석사의 전성기 사역을 밝힐 수 있는 유물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이 가운데 ‘부석사 주라청(浮石寺 周羅廳)’ 명문기와는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격자문 바탕에 글이 새겨져 있다. 주라청에 대한 문헌자료는 확인되지 않지만 ‘주라’는 승려의 출가와 관련돼 단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라는 처음 승려가 되려고 머리를 깎을 때 스승이 가장 나중에 깎아 주는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의미한다.

주라에 대한 용례는 1023년 조성된 합천 영암사 적연(寂然)국사 자광탑(慈光塔) 비문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적연국사가 삭발한 뒤 그 머리카락을 따로 보관했다다는 ‘소락주라(所落周羅)’가 비문에 등장한다. 1060년에 제작된 칠장사 혜소국사비(七長寺 慧炤國師碑)에도 국사가 광교사(光敎寺)에 가서 충회대사(忠會大師)를 은사로 하여 정수리에 있는 주라(周羅)를 잘라 버리고(大師忠會頂落周羅…)라는 비문도 있다.

또한 고려 문종의 장인이자 문신인 이자연 묘지명(李子淵 墓誌銘, 1061년)에는 그의 아들 가운데 다섯째 ‘소현(韶顯)이 어려서 삭발 출가해 유가업(瑜伽業) 대선장(大選場)에 한 번에 급제하여 대덕(大德)이 되었다(韶顯少削周羅一捷于瑜伽業大選場為大徳)’는 내용에서도 주라가 확인된다. 또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福興寺 景德國師墓誌銘, 1072년)에서도 국사가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師自削周羅)는 표현도 등장한다.

그렇다면 ‘부석사 주라청’ 명문와는 어떤 성격을 가진 건물에 올린 기와였을까. 문헌에 딱 들어맞는 단어가 있다면 문제는 쉽게 풀리지만 현재로서는 여러 기록을 토대로 추정을 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라청은 승려의 출가와 관련된 기관이었음은 분명하다. 중국 당송대 출가 관련 자료에서 중요한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중국 당송대에는 처음 승려가 되고자 절에 들어온 행자는 사미계를 받기 위해 승록사(僧錄司)에서 주관하는 고시를 통과해야 했다. 고시에 합격한 행자는 도첩과 부역 면제증인 면정유(免丁由)를 받아 해당 총림으로 돌아온 뒤 득도식에 참여하는데 수계식 당일 삭발을 할 경우 번거로워 하루 전에 머리카락 대부분을 삭발하고 정수리 머리카락(주라) 일부를 남겨 놓는다. 수계식 당일에는 10계를 낭독한 후 스승이 남은 주라를 깎아 주는데 그 전날 머리를 깎는 것은 계를 받을 행자가 많았음을 의미한다.(윤창화,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민족사. 2017)

9세기부터 13세기 조성된 통일신라와 고려의 고승 비문을 살펴보면 10대에 출가해 20세 전후 구족계를 받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10대의 나이에 출가한 이들은 짧게는 수년 길면 10년 가까이 사찰에 머물게 되는데 이들의 교육을 담당한 사찰 내 기관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부석사에서 출가한 혜철선사의 행장을 기록한 ‘적인선사비’에 따르면 선사는 15세에 출가하여 22세에 구족계를 받았고 부석사에는 동배(同輩) 즉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미 혹은 행자들이 다수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희양산문을 개창한 지증대사도 10세 즈음 출가하여 부석사 범체대덕에게 화엄을 배우고 17세에 경의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사자산문의 도윤(道允)선사도 7세 때 오관선사에 가서 진전법사에게 출가해, 15세에는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배웠고 19세에 백성군(白城郡) 장곡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음이 그들의 행장을 적은 비문에서 확인된다.

이들 기록을 토대로 당시 출가에서 득도까지의 과정을 정리해 보면 동진 출가한 행자들은 출가한 사찰에서 몇 년간 사찰 예절 등 기초 지식을 습득한 뒤 15세 즈음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강원과 같은 큰 절의 교육기관에 들어가 4~5년간 경전 등을 배운 다음 정부에서 지정한 계단 사찰[官壇]에서 구족계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석사에도 이와 같은 사미전문 교육기관이 있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곳이 바로 ‘주라청’이다. 주라청과 비슷한 사례로 중국 송대에는 부모의 허락을 받고 절에 들어온 행자들은 경내에 있는 ‘동행당(童行堂)’에 머물며 사미가 되기 위한 여러 교육 등을 받는다고 하는데 동행당이 주라청과 같은 성격의 기관으로 보인다.(카마다 시게오, 정순일 역 ‘중국불교사’, 경서원)

‘부석사 주라방’ 등의 명문 와편이 발견된 현 부석사 서쪽 구역. 김태형 학예연구실장 제공.
‘부석사 주라방’ 등의 명문 와편이 발견된 현 부석사 서쪽 구역. 김태형 학예연구실장 제공.

한편 ‘부석사 주라청’과 ‘통화26년(統和二十六年)’, ‘천흥(天興)’명 명문기와의 발견은 그동안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한 부석사 사역 연구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점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동쪽 사역에서 발견된 ‘천장방’ 등의 명문기와와 현재 사역 주변에서 출토된 ‘대장당’, ‘대봉지원’ 등의 명문기와를 비롯해 이번에 확인된 ‘부석사 주라청’ 등 명문기와는 전성기 부석사 사역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다.

이들 명문기와를 바탕으로 부석사 전성기 사역을 펼쳐보면 봉황산 자락에 삼보(三寶)를 상징하는 3개의 축선으로 사역이 형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즉 보물 제220호 출토지인 부석면 북지리 179번지 일대는 금당(金堂)이 있는 불(佛)을 의미하고, 무량수전과 ‘대장당’, ‘강당’ 등의 명문기와가 출토된 북지리 148번지 일원은 법(法)에 해당한다. 이어 이번에 ‘부석사 주라청’ 명문기와가 발견된 북지리 80~90번지 일대는 승려 교육기관 및 거주지로 ‘승(僧)’을 의미한다. 즉 부석사 전성기 사역은 동쪽에 불보(佛寶), 중앙에 법보(法寶), 서쪽에 승보(僧寶)를 상징하는 전각들이 중심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부석사 전성기 사역은 경작과 개발로 인해 훼손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영주시에서 발주한 ‘영주 부석사 관광지 조성사업부지’ 부석면 북지리 247번지 일대에서는 부석사 창건 전후 것으로 보이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아직까지 이곳에 대한 조사는 시굴 단계에 머물러 있고, 현재는 그마저 중단된 상태다.

김태형 학예연구실장
김태형 학예연구실장

이번 명문 기와의 발견은 국찰(國刹)로서의 규모와 화엄종찰로서의 부석사 성격을 규명해내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영주시 차원에서 이루어진 부석사 주변 발굴은 이제 국가적인 사업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에 따라 농지경작과 관광지 개발 사업으로 인해 훼손되고 있는 부석사 전성기 사역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사적 지정과 함께 이 지역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는 물론 그 결과에 따른 대대적인 발굴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1664호 / 2023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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