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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45)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 (1)

당에서 화엄교학 배워옴으로써 신라불교를 국제성 가진 불교로 확대

원효는 승속 넘나드는 재가거사, 의상은 청정비구로서 대중 교화
의상은 유학에 성공한 뒤 화엄교학 통해 신라불교의 물줄기 바꿔
가장 창조적 업적 이뤘으나 원효와 의상은 당시 불교계의 비주류

동진 천축삼장 불타발타라 ‘대방광불화엄경’ 60권. [동국대 불교학술원]
동진 천축삼장 불타발타라 ‘대방광불화엄경’ 60권. [동국대 불교학술원]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대방광불화엄경변상. [문화재청]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대방광불화엄경변상. [문화재청]

의상(625~702)이 생존하였던 7세기 후반기는 신라의 국가발전과정에서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다. 이 기간은 ‘중고’기의 26대 진평왕(579~632)·27대 선덕여왕(632~647)·28대 진덕여왕(647~654), 그리고 ‘중대’기의 29대 태종무열왕(654~661)·30대 문무왕(661~681)·31대 신문왕(681∼692)·32대 효소왕(692∼702) 등 6인 국왕의 재위 기간에 해당되는데, 신라의 역사를 ‘중고’기에서 ‘중대’기로 구분케 할 만큼 커다란 사회적·사상적인 변혁기였다. 우선 대내적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지배체제가 정비되었으며, 율령체제가 도입되고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대두됨으로서 정치와 불교가 일체화된 제정일치적인 정치형태의 잔재를 청산하는 단계로 정치사상의 발전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에 상응하여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서도 정치 영역과 구분되는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었다. 또한 대외적으로 당과의 군사동맹을 통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세력마저 축출하는데 성공하여 삼국통일을 완성함으로써 영역과 주민이 원래의 신라에 비하여 3배로 크게 확장되었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은 삼한일통(三韓一統)의 주체자라는 긍지를 바탕으로 과감하게 방계 귀족세력을 도태시키는 정치개혁을 통하여 왕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중앙의 관료체제와 지방의 행정체제의 정비를 통한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완성하고 그 운영원리로서 유교를 채택하고, 유학자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을 정비하였다. 그 결과 신문왕과 효성왕의 뒤를 이은 33대 성덕왕(702~737)에 이르러 신라는 마침내 극성기를 맞기에 이르렀다. 

한편 7세기 후반기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정비되고 골품제라는 신분제도가 고착화됨에 따라 씨족공동체가 해체되면서 탈락계층이 생기게 됨으로써 신분 계층 사이 갈등이라는 새로운 사회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리고 또한 오랜 기간의 삼국 사이의 항쟁과 뒤이은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주체세력의 영광과 긍지의 이면에는 수많은 전사자의 발생과 유족들의 희생이 있었고, 전란으로 인한 재산상의 손실과 과도한 부채로 시달리는 고통스러운 빈민층과 노비수의 증가 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 상황이 야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정치 영역이 담당해야 할 몫이었지만, 인간 내면세계의 각성을 통하여 고통과 상처, 불안과 고뇌를 해소함으로써 안정과 평화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종교영역에서의 교화활동도 동시에 요구되지 않을 수 없었다. 7세기 후반의 이러한 사회적·사상적 변화 상황에 직면하여 왕즉불사상(王卽佛思想)을 중심으로 하는 ‘중고’불교로는 더 이상 대응할 수 없게 되었으며, 새로운 ‘중대’불교 성립이 시대적 과제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역사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불교사상과 교화 방법이 모색되었는데, 그 중심적인 인물이 바로 원효와 의상이었다. 원효는 세속과 출가를 넘나드는 재가의 거사로서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의 수립과 무애한 대중교화 활동을 전개하였던 반면, 의상은 청정한 비구로서 화엄교학의 정립과 화엄종이라는 교단의 창립을 통한 교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두 사람은 평생의 도반 관계이었으면서도 불교사상의 내용과 교화 방법에서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으나,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아울러 통합을 이루고, 영광 뒤에 가려진 고통을 해소하여 평화를 구축한다는 시대적 과제에 부응하는 역사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역할이 상호 보완하는 관계였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 수립과 의상의 화엄종 창립의 직접적인 요인과 계기는 불교계 안에서 조성되고 있었다. 7세기 전반경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지 100여년을 지나는 동안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동아시아 불교권의 중심 지역인 중국에의 유학생 파견과 경전들의 전래,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선진적인 불교의 영향 등으로 불교 이해의 기반이 착실하게 구축되고 있었다. 특히 수(隋)와 당(唐) 제국의 중국 통일 이후에는 세계정책의 일환으로 홍려시(鴻臚寺)라는 관부를 설치하여 해외 유학생을 대상으로 불교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신라의 불교 발전이 크게 촉진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원효와 의상이 불교에 입문하는 7세기 중반 즈음에는 구역(舊譯) 경전들을 폭넓게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될 수 있었다. 그런데 645년부터 번역되기 시작된 현장(玄奘)의 신역(新譯) 경전들의 전래와 함께 신역경전으로 인한 당 불교계의 파동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신라 불교계는 커다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새로운 분위기 조성은 구역경전을 통해 불교사상의 이해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원효와 의상으로 하여금 급거 당에의 유학을 결행하게 하였다. 2차의 유학 시도 끝에 원효는 중도에 포기하고 구역불교를 바탕으로 신역경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여 독자적으로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반면 의상은 초지일관 유학에 성공하여 신역불교의 자극을 받아 새로 성립되는 화엄교학을 받아옴으로써 신라불교를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새로운 불교는 신라불교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의 조류에 참여한 국제성을 가진 불교로 확대시킨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한편 원효와 의상이 활약하던 7세기 후반은 신라의 불교사상사에서 전성기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전체 역사에서도 가장 수준 높은 창조적 업적을 이룩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러한 업적을 이룬 주역이 바로 원효와 의상 2인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당시 신라 불교계에서 원효와 의상의 불교는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2인이 신라불교의 전개 방향을 바꾸고,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당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사회변화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된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지원을 받기는 하였지만, 중앙의 불교교단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들은 여전히 ‘중고’기의 불교전통을 계승한 중앙의 귀족출신 승려들이었다. 국가적인 불교행사인 백고좌회에서 원효를 배제한 100명의 고승 대덕, 원효가 저술한 ‘금강삼매경소’ 5권을 감추어 강론을 방해하려고 시도했던 무리들, 그리고 원효가 ‘금강삼매경’의 강의를 마치면서 “지난날 백 개의 서까래를 가릴 때는 비록 모임에 끼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 한 개의 대들보를 가로 놓을 때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구나” 하고 일갈했을 때에 얼굴을 숙이며 부끄러워했고, 마음속으로 참회하였다는 이름난 대덕들이 바로 당시 교단의 주류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의상이 문무왕의 명을 받아 새로운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를 창건하려고 할 때에 방해했다는 권종이부(權宗異部)의 500명의 무리들도 기성 교단에 속한 인물로 추정되며, 화엄종의 창립에 대한 불교계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었음을 나타내주는 설화이다. 원효와 의상에 대한 이상의 설화들은 뒷날 원효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고, 의상의 화엄종이 주류로 등장한 이후의 원효와 의상 측의 입장을 반영한 내용이었고, 사건 당시의 기성 교단측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었다면 전연 다른 내용과 평가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왕즉불사상의 ‘중고’기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 자장이었는데, 그는 친당정책의 추진과 당 문물의 적극적인 수입을 주장한 점에서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태종무열왕(김춘추)과 입장을 같이하였지만, 유교를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채택한 정치세력과의 갈등으로 마침내는 태종무열왕 즉위 전후에 중앙 불교계에서 밀려나서 지방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치었다. 그러나 태종무열왕을 이은 문무왕대에도 중앙 불교계에서는 여전히 자장 계통의 인물들이 주류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자장의 누이인 법승랑(法乘娘, 南澗夫人)은 사간의 관등을 가진 재량(才良)과의 사이에 국교(國敎)대덕·의안(義安)대덕·명랑(明朗, 神印宗)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둘째 아들인 의안은 문무왕 9년(669) 교단을 관리하는 승관인 정법대서성에 임명되고 있었으며, 특히 셋째 아들인 명랑은 문무왕 10년(670) 의상이 당에서 귀국하면서 전해온 당군의 침공 소식에 대비해서 사천왕사에서 설행한 문두루비법을 주관한 인물이었다. 

명랑은 밀교 계통인 신인종의 개조로 추앙되었으며, 사천왕사는 문무왕 19년(679)에 준공되어 신라의 호국불교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특히 사천왕사는 ‘중고’불교의 대표적 사찰이었던 7처가람의 하나였는데, ‘중대’불교에서도 국가에서 관리하는 7대 성전(成典) 사찰의 하나로서 높은 위상을 유지하였다. 7대 성전 사찰은 ‘중고’불교의 7처가람에 속하였던 사천왕사를 비롯하여 영묘사·영흥사 이외에 봉성사·감은사·봉덕사·봉은사 등 중대왕실의 원찰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던 것을 보아 중대불교도 정치적인 역할은 크게 감축되었으면서도 왕실불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대 중앙 불교계에서의 원효와 의상의 불교 위치는 아직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그들의 불교가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9세기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9세기 초에 이루어진 원효의 현창사업과 ‘고선사서당화상비’의 수립, 그리고 8세기 후반의 의상의 법손들에 의한 불국사·석굴암의 조성과 9세기 초의 해인사 창건 등의 불사가 계기가 되었던 것인데, 특히 의상 계통의 화엄종은 왕실과 중앙귀족과 직결된 것을 계기로 하여 주류적인 종파로 대두하게 되었다.

7세기 중반 이후의 신라 불교계에는 새로운 중대불교로서 의상의 화엄학과 쌍벽을 이루었던 유식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의 지엄을 이어 화엄학을 대성한 법장의 동문 선배로서 의상이 있었다면, 그보다 한발 앞서 신유식학의 현장을 계승하여 법상종을 창립한 자은기의 동문 선배로서 원측(613~696)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당에 가서 섭론종의 법상과 승변에게 구유식학을 배우고, 뒤에 귀국한 현장에 사사하여 일가를 이루어 서명학파로 불렸다. 그는 당에서 일생을 마쳤으나, 그의 유식학은 효소왕 1년(692) 도증의 귀국으로 신라에 전해지고, 태현에게 이어지면서 독립된 학파를 이루었다. 그리고 현장의 역경에 참여한 신방, 현장에게 직접 배운 순경, 문무왕이 국사로 책봉하라는 유언을 남긴 경흥 등이 있었으며, 특히 흥륜사의 승려로 전하는 도륜의 ‘유가론기’에는 10여인의 신라 유식학자들의 저술을 인용하고 있을 정도로 많은 학승들의 저술을 남겨주고 있었다. 그밖에 의상의 10대 제자 가운데 1인으로 전하는 의적도 원래 유식법상종의 승려였다고 전해지며, 경덕왕대에는 법상종의 태현과 화엄종의 법해 사이에 벌어진 법력 대결의 설화를 전해줄 정도로 경쟁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 당대에 인도나 서역으로부터 새로 전해진 불교로는 7세기 중반의 유식학에 이어 8세기 전반의 밀교가 있었다.   

신라에는 이에 앞서 치병(治病) 양재(禳災)의 주술적인 밀교승으로서 명랑·밀본·혜통 등이 있었으며, 뒤를 이어 선무외·금강지·불공 등에 의한 체계적인 교학을 갖춘 밀교를 받아들인 신라승들이 다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영묘사 출신의 불가사의를 비롯하여 현초·의림·혜일 등이 확인되며, 당에서 인도에 걸쳐 활약했던 밀교승으로는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와 오진 등이 있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64호 / 2023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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