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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전 주석의 비밀스런 속성에 대하여

원측과 똑같이 사유할 때 그의 존재가 드러난다

철학과 대학원생 땐 원측 역주로 20년 보낼 줄 생각도 못해
원측도 숱한 옛 문헌들 섭렵하면서 또 다른 누군가 됐을 것
옛 사람 자취 답습하는 행위 안에 멋지고 은밀한 속성 있어

중국 시안 근교 흥교사에 세워진 원측 스님의 승탑.
중국 시안 근교 흥교사에 세워진 원측 스님의 승탑.

나는 우연한 계기로 신라 출신 유식학자 원측(圓測) 스님의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지난해 그 역주서의 마지막 권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분명 위대한 고전이기는 하지만, 이 한국 땅에서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인기와 명성을 누렸던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해심밀경’에 대한 백과사전적 주석서로, 사람들이 다 읽어볼 마음을 내지 못할 정도의 방대한 분량으로 되어 있다. 내가 철학 전공의 대학원생 신분이었을 때만 해도 이런 지루한 주석서의 번역과 원문 교감으로 세월을 보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그것을 아주 경멸해야 할 일처럼 여겼다. 아마도 우리의 인생은 생사의 이치를 알기에는 너무 짧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도 다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유 때문에 그 책의 역주에 매달리다가 어느새 근 이십 년을 보냈다. 언젠가 이 작업이 끝나면, 내가 어떻게 그 긴 시간을 지나왔는지 솔직하게 소감을 밝히고 싶었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자주 이런 생각을 했었다. ‘저 주석서들에 빽빽하게 채워진 알아들을 수 없는 문구와 기호들은 모두 이 세계 위에 덧없이 추가된 부수적인 것들이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와는 다른 어떤 것이리라. 그렇다면 저 주석가와 나의 이러한 노고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옛 문헌들에 그에 대한 대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불교 경전마다 ‘이 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며 또 남에게 해설해주는 자의 공덕은 무량하고 불가사의하다’라고 찬탄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공덕의 불가사함은 오직 부처님만이 다 아시는 것이기에, 나 같은 범부들은 믿을 수는 있어도 체감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내게는 음성 언어의 위대함을 기억하는 고대인들의 어떤 경구가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입에서 나온 말에는 날개가 있지만 글로 쓰인 말은 그대로 있다.’ 부처님은 한 글자도 쓰지 않았고, 오직 제자들과 직접 말로 대화하였다. 단지 한 마디 음성만 듣고도 그 자리에서 깨치고 환희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경전이나 주석서들은 내가 물어본다 해도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불경스럽게도 ‘양떼들의 죽음’을 떠올린다. 언젠가 ‘터키의 동부 산악 지대에서 1500여 마리의 양떼들이 갑자기 줄지어 달려서 모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이 잊히질 않는다. 그때 나는 양들이 떼를 지어 있으면 서로 애정이 생겨 그 우두머리를 뒤쫓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저 양떼들의 집단적 죽음은 마치 나의 운명에 대한 잔인한 비유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1400여년 전에 원측이라는 승려가 옛 경론을 주석하는 데 일생을 바쳤고, 현재 나는 다시 그의 주석서들 중의 하나를 역주하는 데만 20여년을 보냈으며, 어쩌면 오랜 세월이 지나 누군가 도서관의 한 구석에 꽂혀 있던 내 역주서의 오류를 바로 잡느라 또 많은 시간을 소비할지도 모른다. 우리들 간의 시간적 간극은 이 우주가 이루어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무수한 겁 안에서는 저 양들이 서로를 뒤쫓아 가는 시차만큼이나 짧은 것이다. 나는 그 주석가가 성전의 주석에 일생을 바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었다. 저 양떼들의 죽음과 같은 것은 평생 열의와 신념을 갖고 어떤 한 가지 일에 임했던 사람들이 진정 피하고 싶은 최악의 결말이지만,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내가 마음속에서 그런 두려움과 혼란만 키워왔던 것은 아니다. 나는 옛 문헌을 번역하느라 보낸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한가한 몽상가로 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을 때 두서없는 여러 관념들이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개 잠시 떠올랐다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어떤 것은 내가 이번 생의 힘겨운 소임을 마칠 수 있도록 주술적 힘을 발휘했던 것도 있다. 만약 내가 너무 지루해진 나머지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면,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해 본 사람이 지구상에 몇 명은 더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어느 날 나의 의식이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나는 책상 하나만 놓인 적막한 방에서 미동도 않고 앉아서 소리 없이 책을 읽는 원측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는 음성 언어를 건너뛰고 문자 언어를 통해 곧바로 직관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는 이런 식으로 평생 동안, 다른 누군가도 만약 그가 배웠던 원리와 방법에 따라서 사유한다면 아마도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될 그런 문제들에 대해 사유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어폰으로 바깥 소음을 차단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아 그 책의 수많은 문장들의 의미를 이해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항상 원측이 무슨 생각으로 이 문구를 썼을까를 숙고하면서 그가 생각했던 바가 나에게도 알려진 것 같으면 주저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의 많은 시간은 이런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이런 영감이 떠올랐다. ‘내가 원측과 똑같이 사유하고 있을 때는 그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그가 쓴 문구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대로 받아들일 때마다 나는 그 문구를 쓰고 있던 순간의 그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영감이 저 주석가와 나의 노고에 깃든 어떤 비밀스런 의미를 암시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윤회설을 조금 변용해서 그럴듯한 논리를 만들어 보았다.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는 모두 무상한 존재이지만, 순환하는 주석의 역사 안에서는 어떤 불멸의 존재로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원측의 책을 통해 때때로 그로 나타나듯, 그 또한 수많은 옛 불교 문헌들을 섭렵하면서 오랜 시간을 또 다른 누군가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불멸의 기억 자체가 계속해서 이 세계에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단 하나의 영적인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한때 철학과 스승들로부터 자기만의 독창적인 사유의 중요성에 대해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옛 문헌을 역주하며 산다는 것은 그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옛 사람의 발자취를 답습하는 나의 지루한 행위 안에 이 세계의 아주 멋지고 은밀한 속성이 계속해서 남아 있다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665호 / 2023년 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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